밭고랑을 매었으니 팔 할은 한 셈이다

4월 8일, 신성한 삽질을 모욕한 자 누구인가?

by 제이식

4월 8일


3월에는 잊을만하면 칼바람을 몰고 내려오는 꽃샘추위가 하도 애살을 부리는 통에 봄인지 아닌지 도통 실감이 나지를 않았었는데, 이제야 동장군이 제 명을 다했나 보다. 남쪽에서 불어온 훈풍은 결국 벚꽃을 틔어내었고, 하룻밤 사이에 전해진 봄의 승전보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니 갑자기 마음이 바빠진다.


'연장을 챙기자! 밭매러 갈 때가 되었다!'


올해 텃밭도 작년처럼 2구좌를 신청했다. 1구좌가 5평이니 2구좌면 10평 남짓인데, 같은 2구좌라도 주인아저씨가 대충 눈대중으로 땅을 갈라 주니 자리마다 모양도 제각각이고 크기도 조금씩 다르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좋은 땅과 비교적 안 좋은 땅이 갈리는데, 어떤 땅이 걸리느냐는 순전히 제 운에 달렸다. 작년에는 입구에서 너무 먼 쪽이라 가을걷이 때 배추랑 무를 차로 실어 나르느라 진탕 고생을 했었기에, 올해는 좀 가까운 쪽이 걸리길 내심 바라며, '내 땅이 어디인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구좌마다 꽂힌 팻말을 하나씩 훑어갔다.

"여기 있네!" 아내가 먼저 우리 땅을 발견하고 소리를 쳤다. '올해는 어떤 자리가 당첨되었으려나?' 아내가 있는 쪽으로 냉큼 달려갔다. 자리를 보아하니 입구 바로 앞은 아니지만 그래도 작년에 비하면 꽤 가까워졌다. 땅은 사다리꼴 모양인데, 자투리 땅이 서비스 면적으로 들어왔다. 대충 어림잡아 작년보다 두 고랑은 더 나올 것 같다. 개울 바로 앞자리라 물 빠지는 길 내기도 쉬워 보인다. 수도도 멀지 않아 밭에 물 주는 수고로움도 한결 덜 수 있겠다. 이 정도면 명당이라 할 만하다. 올해는 운빨이 좀 따라주나 보다.


올해는 땅 뽑기 운이 좋다!
괭이와 삽과 고부래! 너희만 있다면 내 무엇이 두려우랴!


이제 연장질을 시작할 차례이다. 괭이, 삽, 고무래를 짊어지고 호기롭게 텃밭에 입성은 했는데, 막상 고랑을 파려니 망설여진다. 고랑을 파는 것이 한 해 농사의 시작인데, 첫 작업을 잘못해 놓으면 한 해 농사를 말아먹는 수가 있다. 특히 작년에는 고랑을 잘못 파서 아주 낭패를 봤는데, 너무 깊고 울퉁불퉁하게 파 놓은 고랑은 장마 때 물이 차 버렸고, 덕분에 기껏 길러놓은 파는 전부 썩어 문드러지고, 고추농사도 다 망쳤었다. 또 너무 좁게 고랑을 파서 사방으로 가지를 뻗친 토마토를 키우는데도 아주 애를 먹었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어찌 시작하나?' 뜸을 들이다,아내가 먼저 괭이를 들고 나서기로 했다. 어림잡아 한 걸음 정도를 고랑 사이 간격으로 하고 고랑이 될 자리를 따라 괭이로 슬슬 긁으며 앞으로 나아가면 내가 그 뒤를 따라가며 삽질을 할 요량이다. 고랑이 될 자리에 흙을 삽으로 떠서 둔턱이 될 자리 위에 뿌린다. 괭이가 슬슬 앞으로 나간 자리를 삽질로 따라가려니 허리를 펼 새가 없다. 꼴랑 10평 텃밭이라지만, 연신 허리를 숙이고 삽질을 하려니 등줄기에는 땀방울이 흐르고, 손은 아리아리하다. 10평 텃밭이 이리도 넓었단 말인가? 겨우 두 세 고랑 만들어놓고 남은 텃밭을 쳐다보니 광야처럼 드넓기만 하다.

문득 누군가 헛짓거리를 하고 다니면 뒤에서 "삽질하고 있네" 하고 수군거렸던 기억이 났다. 군대에서조차 삽질은 내 몫이 아니었기에 인생 최대의 삽질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삽질'을 폄하했던 어린 날의 입방정이 부끄러워졌다. 만일 농부의 '삽질'이 없었다면 내 입으로 작은 좁쌀 한 톨이라도 넣을 수 있었겠는가? '삽질'은 위대했고, 신성한 것이다. 삶의 원천이 '삽질'에서 비롯되는 것이었거늘. 앞으로 신성한 '삽질'을 모욕하는 자 있다면 내 바로 그를 응징하리라!


삽질이 끝났다. 지나온 길을 돌이켜보니 둔턱은 울퉁불퉁하고 고랑은 삐뚤삐뚤하다. 그래도 괜찮다. 아내가 고부래를 들고 내 뒤를 따르기 때문이다. 정신머리 없는 텃밭을 머리 빗겨주듯 고부래로 살살 긁어주면 방정맞은 텃밭이 반듯하니 단정해진다. 근데 욕심 없이 널찍이 고랑을 팔 계획이었는데 어째 뒤로 갈수록 고랑이 점점 좁아졌다. 마음은 그리 안 먹었는데 속마음은 또 달랐던 것인가? 한 고랑이라도 더 만들고 싶은 마음에 손이 제멋대로 움직였나 보다.


고랑을 만들었으니 이제 둔턱에 검정 비닐을 덮어줄 차례이다. 소위 '멀칭'이라 부르는 이 작업은 여름에 잡초들의 융단폭격을 피하려면 필수이다. 어디서 날아오는 것인지 땅에서 솟아나는 것인지 잡초는 뽑고 며칠만 지나도 그 자리에 그만한 크기로 다시 자리를 잡고 있다. 제 아무리 질긴 생명력과 의지를 가진 것이라도 '잡초'보다 더 할 순 없을 듯하다. 오로지 이 녀석들을 막을 방법은 온 밭을 비닐로 덮어서 얼씬도 못하게 하는 방법뿐이다.

'멀칭'은 2인 1조 작업이 기본이다. 한 사람이 비닐 끄트머리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으면 다른 한 명이 지관을 잡고 뒤로 물러선다. 그러면 비닐이 호로록 풀어지며 땅을 덮고, 그 다음 모종삽으로 살짝 비닐 아래 흙을 떠서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위에 얹어주면 된다. 이것도 말은 쉬운데 열 세 고랑이나 하려니 아무래도 꾀가 난다.


"마지막은 비닐 덮지 말까?"

"그냥 하는 김에 다 하자."


조금이라도 빼 보려 하는데 아내는 그럴 생각이 없다. 그래도 꾸역꾸역 열세 고랑을 모두 비닐로 덮고 나니 뿌듯하기는 하다. 이 정도까지 했으면 일 년 농사 팔 할은 한 셈이다.


멀칭까지 했으니 농사일을 팔 할은 한 셈이다.
삽질 좀 했다고 핸드폰 지문 인식이 안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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