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쁜 여자와 함께 손을 잡고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약속한 어느 날이었다. 이쁜 여자는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포남동과 용지각 근처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었고 나는 지금과는 다른 직장에서 2교대로 일을 하고 있던, 소박한 삶의 즐거움을 누리던 그런 때였다.
이쁜 여자가 직장 동료들과 함께 점심을 곧잘 먹으러 가던 한식 백반집으로 식사를 하러 왔다. 한 남매의 어머니 되시는 사장님께서 이제는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되시고, 장성한 아들과 함께 부엌을 책임지며 점심과 저녁에 주변의 노동자들을 위해서 백반을 파시는 식당, '남매식당'. '남매'라는 이름이 들어가니 '남매'가 하는 식당인가? 하고 물을 수도 있지만 슬하에 '남매'와 그들의 손주들까지 두신 인심 넉넉하신 사장님께서 오래전부터 운영해 오신 밥집이다.
아침 일찍부터 매일마다 식재료 준비를 하시고 오전 11시 정도부터 점심 영업을 하시는데 가게가 큰 편은 아니라서 점심시간에 조금이라도 주춤해서 늦게 가면 기다리거나 다른 곳으로 점심을 해결하러 가야 하는, 용지각 근처의 인기 밥집 중 하나이다. 남매식당이 이 동네의 인기 밥집인 이유는 근처에 한식 백반집이 없어서가 아니다, 식당이 유지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밥맛'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인심 넉넉하신 사장님의 접객태도는 말할 것도 없고.
"오늘은 뭐 먹을 거?"
사장님이 약간의 강릉 사투리가 섞인 구수한 말투로 물으신다.
"우리 뭐 먹을까?"
평소와 같으면 둘이서 왔을 때, 남매식당에 오는 많은 사람들이 주문하는 것처럼 불맛에 매콤 칼칼, 쫄깃하며 잡내도 없는 오징어볶음을 주문하겠지만 그날 우리는 달랐다. 각자 먹고 싶은 것이 다른 것이었다.
"나는 제육볶음."
"그래? 그럼 난 두부찌개, 나눠먹자."
"그래, 그래."
서로의 메뉴가 결정되자 우리는 사장님을 외쳐 부른다.
"사장님! 저희 제육에 두부찌개요!"
"응~ 아들! 홀에 제육에 두부도 하나씩!"
주방과 홀에 걸쳐서 서계시던 사장님께서 주방에서 큰 웍을 잡고 불질을 하고 계시던 아드님께 주문을 넣는다. 주방에서 손목을 부지런히 움직이시던 아드님이
"예~~!!" 하며 주문을 접수한다.
남매식당은 동네에 있는 지극히 '평범한' 백반집이라 구조도 생각보다 단순하다. 겉에서 보면 세월에 직격탄을 맞은 허름한 간판과 블라인드가 내려간 외관이라 '영업을 하는 게 맞나?' 싶은 의심을 갖게 하지만, 막상 식사시간에 문을 열고서 들어오면 우글거리는 손님들과 가게 가득한 불향과 음식냄새로 바쁜 삶의 현장을 간접 체험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널찍하고 긴 신발장에 신발을 놓고 들어오면 길쭉한 테이블들에 옹기종기 손님들이 모여 앉고, 한족 벽면에는 사장님이 다니시는 교회에서 받은 달력, 반대쪽 벽에는 구식 텔레비전에서 종합 뉴스채널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거기서 조금 더 들어가면 환하고 널찍한 주방과 두세 개 정도 되는 큰 화구에서 불질하는 아드님의 모습, 그리고 밑반찬을 꺼내어 주시는 어머니 사장님의 모습을 바로 볼 수 있는 오픈 주방.
반투명의 플라스틱 물통을 사장님이 갖다 주시면 종이컵에 물도 알아서 따라먹는 정겨운 우리네 백반집. 자리에 앉아서 주변을 잠시 둘러보니 이 집의 대표메뉴인 오징어볶음을 비롯하여 제육볶음, 비빔밥, 청국장 등등 이름만 들어도 군침이 도는 메뉴들이 우리의 눈을 홀린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 보고 싶었잖아."
이쁜 여자의 얼굴을 알아보는 어머니 사장님이 정겹게 안부인사를 건넨다. 이쁜 여자도 웃으며 어머니 사장님께 인사한다.
"신랑이랑 같이 오고 싶어서 시간 맞추고 와서 그래요."
"자주 오고 그래, 얼굴 까먹겠어~"
'또 오세요, 손님'이라는 같은 말도 더 정겹고 재미있게 말씀하시는 어머니 사장님의 구수한 말투는 언제 들어도 즐겁다. 실제로 사장님께서 이쁜 여자의 얼굴은 자주 봐서 기억하시는데, 내 얼굴은 잘 알아보지 못하셔서 나 혼자서라도 조금 더 자주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그 사이에 주방에서는 불에 음식들을 볶고 뚝배기에 찌개를 끓이는 바쁜 소리들이 오가고, 어머니 사장님도 밑반찬을 담아내시며 손님들에게 음식을 대접할 준비를 하신다.
"신랑! 밥 몇 개 줄까?"
"한 공기만 더 주세요!"
"그래~! 모자라면 더 달라고 혀! 달걀은 비싸서 한 개 더 못 주는데, 밥은 더 줄 수 있어."
큰 그릇에는 큰 음식이 따른다
내가 주문한 제육볶음은 커다란 스테인리스 용기에 공깃밥이 따로 나온다, 제육볶음 소스에 밥을 비벼 먹는 손님들이 많기에 큰 그릇에 공깃밥을 하나 더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반숙 달걀프라이는 누구에게나 제공되는 서비스. 두부찌개를 주문한 이쁜 여자에게도 달걀프라이가 함께 나가고 나머지 밑반찬들이 인원수에 맞게 나온다. 사시사철 달라지는 제철 식재료들로 조금씩 밑반찬의 종류에 변동은 있지만 남매식당의 손맛은 변치 않는 것이 장점.
밑반찬은 철마다 바뀌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제육볶음을 받아 든 나는 일단 밥을 넣어서 비벼먹기 전에 제육을 한점 집어서 씹는다. 남매식당의 제육볶음은 달달한 맛은 거의 없다, 다만 큰 화구에서 큰 웍에 볶아서 내놓은 불맛에 짭짤하고 칼칼하며 매콤한 맛이 특징. 고기를 씹을 때마다 쫄깃한 육질에서 매콤한 불맛이 솟아올라 나의 입천장을 그슬리는 느낌이다. 실제로 입천장을 데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제육볶음의 불맛이 코로 올라온다. 가끔 보면 중화요리 집에서 한식을 하는 경우가 있다, 육개장이나 제육볶음, 국밥 같은 것들. 나는 중화요릿집을 갔을 때 제육볶음이 있으면 주문을 하는 편이다. 강한 화구의 웍질로 볶아낸 매콤한 고기볶음은 맛이 없을 수가 없으니까. 그리고 남매식당의 제육볶음에서도 강한 불맛이 나는 제육볶음을 기대할 수 있다. 매콤 칼칼해서, 달착지근한 제육볶음을 선호하시는 분들은 안 좋아하실 수도 있지만 나는 달달함 보다는 불맛과 훈연향을 더 선호하니까.
여백의 미는 공깃밥을 위한 것이다
"크으, 이거지, 남매식당의 제육은 불맛이지."
나는 공깃밥으로 나온 흑미밥을 큰 스테인리스 그릇에 넣어 제육볶음과 함께 슥슥 볶고, 달걀 반숙을 톡 깨서 비비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처음 나왔을 때는 적어 보이던 제육볶음이 밥과 만나니 양이 두배로 불었다.
육향과 후라이의 바삭함을 한 입에
훈연향이 섞인 짭짤한 맛이 밥과 만난다, 매끈거리는 칼칼함이 고슬고슬한 쌀알 사이로 들어와서 혀에 감칠맛을 때려 붓는다. 불향과 함께 내 얼굴이 불에 타오르는 기분. 밑반찬으로 나온 아삭한 콩나물, 시금치, 고사리 등등, 남매식당은 주 음식도 맛이 좋지만 함께 나오는 밑반찬들도 싹싹 비우게 되는 백반고수의 손맛. 밑반찬들의 맛을 보면 사장님께서 가능한 오래 남매식당을 운영하셨으면 하는 소망을 저절로 갖게 된다.
매콤칼칼한 두부찌개
이쁜 여자가 주문한 남매식당의 두부찌개는 강원도 영서지방의 방식인 '짜박 두부'와 비슷한 맛이다. 참기름 혹은 들기름과 매콤하고 굵은 고춧가루 양념, 간장 등으로 간을 해서 국물이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게 '자박자박'하게 끓여내는 방식이라 '짜박 두부'라고 부른다. 인제 군내에 가면 두부집들이 많은데 그 집들은 다 짜박 두부를 팔고 있다. 남매식당의 두부찌개를 처음 먹었을 때 무언가 익숙한 맛이라고 느꼈는데, 내가 이전에 인제를 두어 번 방문하면서 먹었던 그 짜박 두부의 맛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남매식당의 두부찌개를 나는 참 좋아한다, 방문할 때마다 주로 주문하는 메뉴 중 하나다.
참기름과 고춧가루가 만나 향긋한 고춧기름을 만든다
야들야들, 탱글거리는 강릉의 두부를 얇게 썰어서 참기름을 기본으로 한 양념장, 찌개에 넣어 끓여내면 콩과 참깨가 만나 고소하고 또 고소하며, 맵지는 않은데 무언가 칼칼한 맛이 나는 매력적인 고소함이 입안에서 폭발한다. 입안에 참깨를 털어 넣고 우적우적 씹는 듯한 찌개다, 하지만 그 맛이 과하지 않다. 견과류의 고소함과 고춧가루의 칼칼함이 부드러운 두부맛과 만나 균형이 잘 잡혀서 질리지 않는 맛이다.
쫄깃하고 부드러운 표고버섯과 야들거리는 두부
두부찌개의 국물을 한입 떠먹으면 참깨와 고춧가루가 빚어내는 감칠맛이 혀와 입안에 쫘악 펼쳐진다. 남매식당의 오징어볶음이나 제육볶음, 비빔밥만큼 자주 나가는 음식은 아니지만 나와 같은 견과류 사랑꾼들에게 지속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그리고 이 두부찌개 안에 들어있는 탱글거리는 두부의 식감도 내 치아를 즐겁게 하는 것이라, 뜨끈하고 매콤한 국물을 후후 불어가며 두부를 후루룩 흡입할 때, 두부와 고소 칼칼한 국물이 함께 입안에 들어오면 온몸에서 짜르르 느끼는 전율.
"크으, 이 맛이지."
이쁜 여자와 함께 두부찌개를 나눠 먹으며, 칼칼함이 우리의 식도를 긁으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뜨거운 탄성. 제육볶음으로 입안에 불을 지피고, 목젖과 식도는 두부찌개로 칼칼하게 뜨거움을 들이붓고. 그래, 이것이 한국인의 점심 밥상이다.
"다음번에는 와서 오징어볶음 먹을까."
"그래, 그러자."
지금은 직장에서 거리가 많이 멀어진 남매식당이라, 가보지 못한 시간이 오래되었지만 이쁜 여자와 조만간 또 인사드리러 가봐야지. 화끈한 불맛으로 화답을 해주시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