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수한 막국수, 달콤한 가자미, 살살 녹는다
김고로가 속초에 거주하던 시절에 자주 가던 (지금은 없는) 일식 라멘집 사장님은 주문진이 고향이라고 하셨었다. 전공은 스페인 음식이었으나 일식 라멘에 반해 일식 라멘 집을 차렸었던 그는 주문진이 다른 건 몰라도 단 하나는 다른 곳보다 괜찮다고 말했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회막국수나 회냉면은 다른 영동지역 보다 주문진이 제일 괜찮다고 봐요. 속초, 강릉이나 고성에서 먹는 것보다 훨씬 맛이 좋다고 할까."
이 말을 들으면 강릉 출신이 아닌 외지인들은 '주문진이 강릉에 속해 있는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좁은 동네에서도 지역을 나누고 출신을 나누는 일은 전국 어디나 동일하게 허다한 일이다. 사실 주문진과 강릉은 처음부터 강릉 행정구역이 아니었다. 강릉은 강릉시와 명주군으로 나뉘었고 주문진은 주문진읍이었으나, 명주군은 강릉시에 편입되고 그 이후 차례로 주문진읍은 '강릉시 주문진읍'이 되어서 강릉 사람들이나 주문진 사람들이나 서로가 같은 출신 혹은 같은 도시에 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주문진 출신의 사장님은 '회냉면이나 회막국수는 주문진이 강릉보다 낫다'라는 말을 하실 수 있었던 것. 당시 속초에 살던 김고로는 주문진의 회냉면, 회막국수는 어떤 맛이길래 그럴까 싶은 궁금증이 올라왔지만 주문진에서 회냉면, 회막국수를 먹어볼 기회가 없었던 김고로에게 그것은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을 뿐.
하지만 그 이후 김고로는 강릉으로 이주를 오게 되었고 주문진의 회냉면, 회막국수와 장칼국수가 생각날 때면 손쉽게 갈 수 있게 되어 한가한 평일이나 주말에 주문진의 맛이 그리우면 버스를 타고 훌쩍 주문진으로 간다. 주문진에서 회막국수를 먹을 때면 김고로가 주로 찾는 곳은 '신리면옥'이다. 디지털강릉문화대전에도 수록이 되어 있는 주문진의 대표적인 노포로서 개업한 지는 이제 40년이 되어가는 회막국숫집, 현재까지 자리를 지키고 계시다는 것은 그만큼의 저력이 있는 집이라는 의미이며 2002년에는 솔올택지지구로 분점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집에서 가까운 분점보다는 본점을 가기를 더 선호하는 김고로, 주문진에 거주하는 (나이는 어리지만 ) 친구 J군이 일요일 오후에는 아내가 잠시 다른 일을 하러 가서 홀로 남는다는 점을 알고는 회막국수로 점심을 해결하자고 꼬셨다.
강릉에서 7번 국도를 타고서 주문진으로 들어가는 길은 몇 갈래가 있으나, 신리면옥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강원도립대로 빠지는 길을 지나서 고가도로에서부터 주문진으로 빠져 내려가는 대로를 택하는 것이 좋다, 이 대로를 따라서 신리면옥을 비롯한 남북면옥 등 막국수 집과 주문진 읍내의 외식 거리 및 수산시장으로 들어가기에 편하다.
"형, 형이랑 나랑 신리면옥을 간 적이 있나?"
"아니, 너랑은 남북면옥을 갔었지. 남북면옥은 회막국수에 명태 식해를 올리지만, 여기는 진짜 가자미식해를 올려."
"오, 그것도 맛있겠는데."
이제는 몸무게의 측정 단위를 kg이 아닌 t을 쓸 정도로 몸집이 상당히 큰 J군은 김고로가 결혼하기 전에는 함께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식도락을 즐기기도 했었다. 크게 식재료나 요리 방식을 가리는 친구가 아니기에 식도락을 다니기에는 좋은 친구다. 그렇게 김고로와 이쁜 그녀, J군은 신리면옥에 도착한다. 이전에 신리면옥이 시작을 했었던 것인지, 아니면 별관으로 사용했었는지 알 수는 없는 알루미늄 사시와 구옥 지붕, 얇은 벽으로 된 가건물처럼 보이는 허름한 건물에 빨갛고 파란 글씨로 메뉴가 쓰여있는 빈 건물 옆, 굵고 진한 파란색으로 '신리면옥'이라는 글씨가 밝고 하얀 간판에 박혀있다. 참고로 신리면옥의 '신리'는 주문진읍 신리천의 강 이름인 '신리'에서 유래되었다고 디지털강릉문화대전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다.
건물 입구에 다다르면 민트색의 커피자판기와 파란 휴지통 그리고 큰 고깃집의 입구인 듯 붉은색과 파란색의 원형 조명이 벽돌기둥 위에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반원형의 노란 천막 아래로 들어가면 돼지고기 수육의 쿰쿰한 육수 냄새와 막국수의 구수한 면수 향기가 우리를 이끌며 손짓한다.
입구 우측에는 살짝 어두침침한 조명과 빛살 아래 물을 담아놓는 깊고 커다란 고무항아리와 면 헹굼 및 삶기를 위한 자재들이 군데군데 김과 메밀의 향기를 뿜고 있다, 스테인리스로 된 주방 외부틀의 유리창 아래로 분주하게 움직이시는 주인장의 모습.
드르르륵
옆의 허름한 건물보다는 조금 더 세련된 새시의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정집의 장판과 벽과 같은 내부 장식 그리고 한편에 놓인 큰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소음들, 벽과 천장 근처에는 방송이나 신문기사등에 출연했던 영광의 순간들과 이곳을 방문한 많은 유명인들의 싸인들이 트로피처럼 진열되어 있다. 신리면옥의 메뉴는 막국수, 냉면, 만두 그리고 수육. 막국수와 냉면은 가자미식해를 넣었느냐 혹은 물이냐 비빔이냐에 따라서 총 4가지. 신리면옥은 회비빔막국수로 입소문을 떨쳤던 곳이라 신리면옥에서 김고로의 선택은 항상 회비빔막국수이다. 그리고 비빔막국수가 좋은 점은 육수를 얼마나 붓냐에 따라서 물막국수로도 변형하여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걸로 드릴까요?"
"회비빔막국수로 3개 주세요."
그들이 앉고서 막국수를 주문하자 곧이어 막국수 육수와 겨자, 김치와 무절임이 따라 나온다.
쪼르르륵
김고로와 J군은 옆에 있던 종이컵을 꺼내어 육수를 살짝 맛본다. 은근한 달콤함과 짭짤하고 어두운 빛깔에서 나오는 감칠맛이 입안을 휘감는다, 간장과 설탕 외에 신리면옥의 노하우로 뽑아낸 육수가 시원하면서 입을 계속 '쩝쩝'거리며 다시게 만드는 묘하게 매력적인 맛. 굉장히 달콤하고 짭짤한 '단짠'의 강한 맛이 아니라 아주 은근하게 속삭이는 맛. 하지만 이 육수가 막국수에 더해지기 시작하면 막국수의 고명, 메밀국수와 파괴적인 시너지 효과가 된다는 사실을 신리면옥의 손님들은 알고 있다.
"막국수 드릴게요."
막국수 집도 토렴만 하고 나면 금방 한 끼가 준비되는 국밥집처럼 막국수에 들어가는 메밀면이 삶아지는 짧은 시간만 잠시 기다리면 금방 나오는 한국식 패스트푸드라고 김고로는 주장한다. 물론 면틀이 최신식으로 기계화된 지금의 시대보다 나무틀로 압축하여 면을 내리던 옛 시절에는 시간이 더 걸렸을 테지만.
달콤하고 고소함이 시원한 공기와 함께 콧속으로 밀려들어온다. 막국수는 시원한 음식인지라 지금은 냉면처럼 여름에 선호하는 음식이지만, 태생은 겨울 깊은 밤에 야참처럼 먹던 겨울음식이라 그런지 아직 낮공기가 쌀쌀한 때에 먹으면 더 맛있다고 김고로는 주장한다.
테이블마다 올려진 메뉴와 안내에는 입맛에 따라서 육수를 자작하게 붓고 설탕과 겨자, 식초를 적절히 넣어 조미 후 먹으라고 친절히 안내를 하고 있지만 김고로는 주인장이 내어주는 고명과 양념, 육수의 맛에 불만이 없고 이를 그대로 즐기고 싶기에 조미를 추가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가자미식해와 이의 양념만으로 메밀면의 심심한 맛을 보충한다고 생각하니까.
김고로는 다른 일행들과 함께 차례로 막국수에 짙은 갈색으로 찰랑거리는 막국수를 메밀면이 적절히 잠길 정도로만 붓고 막국수를 비비기 전에 양념 옷을 털어내지 않은 가자미식해를 한입 먹는다.
사각사각
으적으적
처음에는 다른 가자미식해들과 차가운 곳에서 모여있었기에 살얼음과도 같은 아삭거리는 식감과 식초에 삭혀 부드럽게 튕기는 가자미의 뼈가 함께 씹힌다, 바삭 혹은 사각거리는 가자미의 뼈와 그를 든든하게 둘러싼 부드러운 가자미의 살이 달콤하게 혀 위에서 사근사근 녹아내린다.
"아, 가자미식해가 달다, 엄청 달아. 입에서 쫄깃하게 씹히네."
김고로는 뼈와 생선살을 같이 잘게 썰어서 내어놓는 뼈째회(세꼬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가자미라고 할지라도. 살과 함께 생선뼈가 씹히다 보니 걸리적거리는 식감을 싫어해서이다. 하지만 가자미식해라면 다르다, 산성 액체 안에서 푹 녹아내리고 발효된 가자미의 비단결 같은 살점과 그 사이에서 말랑거리는 뼈가 더 이상 따갑지 않고 살점처럼 쉽게 씹혀서 더 이상 거슬리지 않는다. 그렇게 달콤하고 새콤하게 가자미식해로 입천장과 벽을 적시고 나면 그 후에는 수분을 잔뜩 머금은 매끌거리는 메밀면으로 혀를 다시 달랜다.
신리면옥의 막국수는 껍질과 메밀 알맹이가 함께 들어간 메밀면, 구수하고 찰랑거리는 쫀득거림에서 메밀의 구수함이 묻어 나온다. 김고로는 순 메밀로 된 메밀면의 구수함과 심심함을 더 선호하는 편이지만 강릉에서도 그러한 메밀면을 사용하는 집은 찾아보기가 어렵기도 하고, 밀가루가 조금 섞여서 찰기 섞인 몸짓으로 꿈틀거리는 식감도 제법 괜찮다. 그리고 '후루룩'하면서 면을 '쳐서' 올릴 때 구수한 메밀맛이 울컥하고 입안을 가득 채우는 순간도 막국수를 먹는 즐거움이다.
김고로는 막국수와 가자미식해를 씹는 연속을 멈추고 싶지 않다, 메밀면에 묻은 양념은 자극적으로 달거나 매콤하지 않다. 튼튼하게 집을 받쳐주는 기초석처럼, '나 여기 있어요'라고 주장하지 않고 은근하게만 달고, 매콤해 보이지만 맵지 않은 신리면옥 막국수의 양념은 가자미식해나 막국수에 큰 힘을 들이지 않고 그저 뒤에서 묵묵하게 두 식재료가 최고의 맛을 발휘할 수 있도록 밀어주는 역할이다.
김고로가 신리면옥을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가자미식해'를 쓴다는 점도 있다, 대부분은 단가가 더 저렴하고 대중적으로 선호되는 명태식해를 얹어서 회냉면이나 회막국수를 하기 때문에 가자미식해를 올리는 막국수나 냉면 집은 점점 더 찾아보기가 어려운 추세이기 때문이다. 김고로가 모든 막국수 집을 다녀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곧 폐업을 앞둔 '제일함흥냉면'이나 신리면옥 외에는 어느 집이 또 가자미식해를 얹어주는 회막국수를 하는지는 모른다. 즉, 아직까지 가자미식해를 얹어주는 집은 꽤나 귀한 집이라고 말을 하고 싶은 김고로.
달콤하고 부드러운 가자미식해의 사각거리는 식감과 쫄깃하고 말랑하며 구수하고 심심한 맛을 내는 메밀면, 거기에 그 둘의 맛을 뒷받침해 주는 양념의 조화까지 이 세명의 합이 완벽하게 맞춰지는 그릇 안에서 겨자, 식초 등 다른 엑스트라들이 파고들어 올 틈은 없다고 단언하다.
그러다가 잠시 가자미식해의 숨어있던 비린내가 살며시 올라온다 싶으면 반찬으로 나온 김치나 새콤달콤한 무절임을 아삭아삭 씹으면서 입맛을 초기화시키고는 다시 먹다 보면 막국수가 금방 사라져 버린다. 같은 시장함을 가졌으며 먹는 속도가 훨씬 빠른 J군과 김고로는 이미 다 먹어가는데 이쁜 그녀는 아직 1/3이 남은 시점. 괜찮다, 천천히 먹는 습관이 빨리 먹는 습관보다는 훨씬 건강한 습관이니 이쁜 그녀의 느린 식사를 격려하는 둘.
"오랜만에 와도 맛은 예전 그대로네."
"언제 와도 맛이 좋지?"
"나중에 J 군네 아내랑도 같이 오자."
"후식은 뭘로 할까?"
"농협 근처에 도넛 집에서 팥도넛 먹자."
식사를 다 마친 그들은 아직 배가 다 차지 않았는지, 그다음 무슨 후식을 먹을까 얘기하면서 주문진의 길거리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