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일기] 조롱박, 속초

즉석떡볶이, 옛날의

by 김고로

한반도에 밀과 밀가루가 귀해서 국수, 만두 등의 면상에 올라갈 만한 음식들이 모두 비싼 음식 대접을 받았을 적의 먼 옛날, 찹쌀로 빚은 가래떡으로 간장과 고기, 야채 등과 버무려 볶아 맛을 낸 궁중의 떡볶이는 오늘날 이전과는 많이 다른 모습을 지닌 음식이 되어버렸다.


궁중의 나인들이나 대감마님 집의 부엌 시종들이 공을 들여 진상한 음식을 먹던 '왕'이나 귀족들이 아닌, '대통령'이 지도자로 있는 나라의 '서민'들부터 모든 계급의 인민들이 즐길 수 있게 된 오늘날의 떡볶이는 기름과 고춧가루를 거쳐 이제는 크림이 섞인 '로제'라는 형태로까지 변모를 하며 대한민국의 식문화 속에 자리 잡았다.


그 커다란 변화의 흐름 속에서 물가와 화폐가치의 변화에 따라서 나 어렸을 적에는 단돈 500원이면 초등학생도 가볍게 즐길 수 있었던 간식이었던 떡볶이는 이제 배달비를 포함해 거금 만오천원 혹은 2만원까지 가격이 나가는 유사 서민음식의 대열에 오르려고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나는 떡볶이를 안 좋아한다. '나는 떡볶이를 싫어한다'라는 문장을 공개적으로 발표할 만큼 '반 떡볶이파'에 소속된 재미없는 인간은 아니지만, 떡볶이의 주재료는 떡이기 때문에 금방 배가 부르고, 쫄깃하고 질척거리는 식감은 금방 질려버리기에 단짠 매콤의 단순한 맛을 선사하는 이, 시간이 만들어낸 고오급 음식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나와는 대조적으로, 나의 이쁜 여자는 떡볶이를 좋아하는 편이다. 하루에 한 번이라도 떡볶이를 먹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고 둔부에서 털이 돋아나는 등의 이상반응을 몸속에 내재한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나와 결혼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도 혼자서 떡볶이를 해 먹거나 지금도 자신이 원하는 때에는 스스로 장을 봐서 떡볶이를 요리해 같이 나눠먹을 정도로 그녀는 떡볶이를 좋아한다.


우리가 만난 후 처음으로 공동적인 '맛있다'라는 합의에 이른 떡볶이가 있었으니 전국구에서 '맛'있다고 소문난 청주의 오송 신도시 지구에 있는 'ㅂ'떡볶이 집이었다. 작년 속리산 법주사에 있는 팔백 나한상도 보고 한국식 약선요리도 맛을 좀 볼 겸 들린 보은 근처 청주에 숙소를 잡았기에 '한 번 맛보러 가보자'라고 얘기할 수 있었던 집.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해당 떡볶이 집의 마감시간이 40분도 채 남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마침 방송에서는 올림픽 남자축구대표팀의 경기가 한창 진행 중이었기에 사장님께서는 매장에서 경기를 다 보고 마감을 하시겠다며 천천히 먹으라고 선심을 베풀어 주셔서 천천히 즐길 수 있었다. 중간부터 끝맛까지 은근하고 뭉근한, 익숙하고 친절한 마늘맛으로 깔끔하게 매운맛을 낸 떡볶이 소스가 맛있어서 집으로 돌아온 그 이후에도 몇 달간은 또 먹고 싶은 생각이 많이 들었고 이쁜 여자는 '내년에 또 먹으러 가자'라고 얘기했을 때 나도 '그러자!'라고 답했을 정도의 맛이었다.


떡볶이를 한 접시 먹으며 그 정도로 내가 맛있다며 감탄한 떡볶이는 오랜만이었다, 오늘 내가 얘기할 떡볶이 이후로.


속초에서 나고 자랐거나, 속초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분식을 좋아하는 사람 치고 이 분식집을 모른다면 간첩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어머니께서 속초에서 작게 시작한 즉석 떡볶이 집 'ㅈㄹㅂ'은 어머니께서 나이가 드시고 나서 그 딸에게 물려주신 덕분에 2대째로 영업을 지속하고 있는 명맥 있는 분식집이다. 속초초등학교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붉은 바탕에 짙은 초록색 글자로 간판을 내걸고 있는 이 집을 가기 위해, 이쁜 여자와 나는 속초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21세기 초반의 유행가들과 옛날 트롯들이 섞인 플레이리스트가 벽에 내걸린 기다란 스피커들을 통해서 나오고 천장에 십자형으로 매달린 형광등 아래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혼자, 둘, 혹은 삼삼오오 모여 이곳에서 시킬 수 있는 단일 메뉴인 즉석떡볶이를 즐기고 있었다. 사이드 메뉴인 야채빵과 삶은 달걀, 그리고 탄산음료를 마시고 있는 손님들을 보니 나 어릴 적 과자와 탄산음료를 들고 소풍을 가던 기억이 나서 반갑다.


원래는 3500원이었던 즉석떡볶이는 가파르게 상승하는 물가의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4500원이 되었지만 그 마저도 이미 갓성비를 자랑하는 음식임을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듯이 손님들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즉석떡볶이에는 이미 쫄면 사리가 들어있기에 나는 라면사리를 추가했고, 거기에 야채빵과 삶은 달걀을 곁들였다. 케첩과 마요네즈, 채 썬 야채들이 모닝빵 안에 들어간 야채빵과 삶은 달걀을, 나와 아내는 각각의 손에 들고 떡볶이가 한 소금 끓어오를 때까지 기다린다.



이곳만의 비법 육수와 고운 고춧가루, 그리고 마법의 조미료 가루가 까치둥지처럼 쌓아 올려진 쫄면, 라면, 어묵, 채 썰어진 양배추 위로 곱게 모여있다. 이곳의 떡볶이 맛을 가장 정확히 설명하는 말은 '옛날 떡볶이'. 적당히 달착지근하지만 끈적이거나 질척이지 않고, 살짝 매콤하려다가 말아버린 소스에서는 익숙한 짭짤함과 감칠맛이 연이어 따라온다. 그 두 가지 스타일의 맛이 번갈아가며 입안에 따라 들어오고 부드럽고 소스를 잘 머금은 삼각 어묵과 아삭 거리는 양배추가 입을 즐겁게 한다.


재미있는 점은 이곳의 떡볶이에는 떡이 많이 들어있지 않다, 오히려 면사리와 어묵과 양배추가 훨씬 더 많이 들었다. 숟가락으로 국물떡볶이의 원형과도 같은 이 옛날 떡볶이를 해치우다 보면 가게 메뉴판에 적혀있는 '볶음밥'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 적은 떡볶이의 양으로 부족한 당신의 탄수화물은 떡볶이 국물에 적셔서 볶아먹는 볶음밥으로 보충할 수 있다는 주인장의 배려. 볶은 김치, 조미김과 날치알로 떡볶이 전골냄비 바닥에 꾹꾹 눌러 볶아주는 짭짤하고 바스락거리는 볶음밥을 먹다 보면 이렇게 나트륨과 설탕을 몸에다 때려 부어도 되는 건가 나도 모르게 죄책감이 들기도 하지만 입안의 혀가 '내가 맛있는데 뭔 상관이야'라며 이리저리 구르기 시작하면 이내 그런 죄책감 따위 무의식의 저편으로 사라지기 마련이다.


나와 이쁜 여자가 신나게 즉석 떡볶이를 향해 숟가락과 젓가락을 휘두르는 와중에도 다양한 부류의 손님들이 들어왔다. 초등학생 고학년으로 보이는 소녀들 3명, 근처 은행의 직원으로 보이는 4인의 남녀혼성그룹, 간단한 점심을 먹으러 나온 것으로 보이는 두 분의 중년의 여성분들, 혼자서 만찬을 즐기시려고 하는 듯한 나이 지긋한 어르신 등등... 이 떡볶이 집이 속초에서 얼마나 오래되었고, 대중성을 확보한 집인지 두 눈으로 똑똑이 볼 수 있었다.


단골손님들도 많이 오는지 사장님께서는 가게에 오는 이런저런 손님들과 정겹게 얘기를 나누시기도 했고, 그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맛있는 떡볶이를 가져다주셨다. 이 동네의 비공식적인 사랑방과 같은 느낌, 휴게소 같은 그런 느낌. 나는 이런 장소들을 좋아한다. 사장님이 판매하는 것은 단순한 즉석 떡볶이이지만 이곳에 오는 손님들에게는 떡볶이 이상의 것, 어느 누군가에게는 옛 떡볶이의 추억을, 새로 오는 손님들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그 정겨운 맛과 기억을, 사장님은 지켜주고 있었다. 이곳의 즉석 떡볶이를 '와 엄청 맛있다!'라고 얘기하며 누군가에게 떡볶이의 맛을 적극적으로 추천하지는 못하겠지만, 떡볶이를 좋아하는 누군가가 속초에 간다고 하면 '한번 가봐, 괜찮아'라고 얘기할 수 있는 집이라고 나는 소개하겠다. 다른 곳에서 먹을 수 있는 옛날 떡볶이에 비교했을 때 다를 것이 없지만, 이곳은 낯선이가 방문해도 맛볼 수 있는 정겨움이 있기에.



맛있는 추억, 잘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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