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머물면서 미식여행을 여기저기 다니기로 한 부산에서의 일정이지만, 5월 8일은 대한민국에서는 '어버이날'로 지정했기 때문에 미식을 사랑하는 나도 어버이날의 저녁에는 혼자서 미식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을 모시고 저녁 식사를 할 계획을 세웠다. 지난번 '보이후드'를 방문했었던 글에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명언을 마지막에 남겼지만 오늘은 애초에 그 명언을 다시 한번 새기고 미식일기를 시작하겠다.
"나는 전투를 준비하면서 계획은 무용하나 계획하는 것은 꼭 필요함을 항상 발견해왔다"
이 명언을 다시 한번 곱씹는 이유가 무엇인지 글을 다 읽고 나면 알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어버이날이기 때문에 육류보다는 신선한 해물과 채소가 가득한 요리들을 더 좋아하시는 어머님의 입맛을 따라 우리는 원래 해물찜을 함께 먹으러 가기로 했었다. 개인적으로 해물탕, 해물찜 등과 같이 해물이 많은 요리들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머님과 이쁜 여자가 좋아하는 음식들이기 때문에 나는 내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이라도 기꺼이 함께 따라가서 동석하고 식사를 하겠다는 굳은 마음을 품고 우리는 반여동의 어느 유명한 해물찜 체인점으로 향했는데,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오늘은 어버이날이었다. 그 말은 즉, 점심과 저녁식사 시간에는 도시의 어느 정도 규모가 있고 이름이 있는 음식점들은 부모님들과 그분들의 자녀들로 미어터질 것이라는 이야기였고 우리가 가려고 했던 예약을 받지 않는 그 해물찜 집도 같은 상황이었다. 해물찜 집 앞에 도착하니 다른 것을 먹으러 가자며 이야기하는 어르신들의 무리가 나오는 것이 보였고 그 앞에는 가족으로 보이는 한 무리가 망부석처럼 조용히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설마.... 이것은 식사 기다림의 줄인가?'
설마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리는 식당에 들어가서 자리가 있는지 문의하였고 식당의 직원은 친절하게 식당에서 식사를 하려면 매우 오래 기다려야 한다고 안내해주었다. 손님 응대가 좋은 직원이었다. 그렇다, 전골이나 탕, 찜 등의 사리와 볶음밥과 주류를 당기는 음식들의 특성상 식사시간은 어쩔 수 없이 굉장히 길기 때문에, 그것을 기다려서 식사를 할 때쯤이면 우리 가족은 이미 식사에 대한 마음을 접고 집에 가서 해물찜이나 치킨을 배달로 시켜먹으며 유튜브를 시청하며 식사를 하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우리는 깔끔하게 마음을 접고 그 식당의 입구에서 밖으로 나왔지만 조금 막막하기도 했다, 무엇을 선택하러 갈지. 그래도 희망은 움직이고 결단하는 자에게 있다고, 내가 말했다. 잽싸게 핸드폰의 지도 어플을 켜서 주변의 식당을 바로 탐색했고 바로 길 건너에 손님들의 후기가 좋은 경양식집을 발견했다. 저번에 버스를 타고 이 주변을 지나오면서 눈에 잠시 담아놨었던 분위기가 좋아 보이는 곳이었는데, 나는 좋은 느낌이 들어 바로 가족들을 이끌고 돌진했다.
초록색의 접이식 처마와 야외 테이블, 작은 전구들과 고전 가구들로 식당을 꾸며놓은 경양식당, '함박마을'에는 이미 가족 단위의 손님들이 여러 명 와 있었고 우리가 입장하자 테이블을 치울 여유도 없으셨던 사장님은 급하게 치워주시며 앞에 있는 주문이 많이 밀려있다고 말씀하셨다. 잠시 다른 곳으로 가서 식사를 할까 내적 갈등의 시간이 있었지만 나는 그래도 새롭게 방문한 기대되는 식당인 함박마을에서 식사하는 것을 고집하고 앉았다. 열려있는 공개된 주방을 보아하니 화구와 바테이블과 개수대와 재료 사이들을 오가시며 바쁘게 움직이시는 두 분이 보이고 배달을 나갔다가 오신 다른 한분이 합류하면서 세 분께서 배달, 포장 그리고 매장의 손님들을 응대하고 계셨다. 매우 바빴기에 우리에게 물이나 식기류도 늦게 지급이 되었지만 그런 것은 그리 개의치 않았다, 식당에서 그래도 제일 중요한 것은 음식의 맛이니까.
우리는 이 식당의 주 음식인 함박스테이크와 샐러드 파스타, 토마토미트소스파스타를 주문했고 약 30분 정도 후에 수프와 식전 빵을 시작으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식전에 나온 수프는 어느 경양식집에서 먹을 수 있는 루와 크림이 알맞게 들어간 고소하고 부드러운 수프, 한 대접으로 잔뜩 먹을 수만 있다면 더 먹고 싶어 지는 그런 수프. 토핑으로 올려진 바싹 익은 마늘 조각들이 풍미를 더해줘서 더 맛이 좋았다. 후추성애자가 아니시라면 굳이 후추를 뿌리실 필요는 없다.
함박마을 샐러드파스타
샐러드파스타: 육고기를 기피하시는 어머니께서 유일하게 주문하실 수 있었던 파스타. 일반 스파게티면에 가든 샐러드 채소, 토마토, 잘 구워진 목살 베이컨에 파마산 가루가 토핑이 되었다. 상큼하고 약간의 달콤함과 신맛, 거기에 채소들의 씹는 맛과 베이컨의 고소함이 어우러져 맛의 균형이 잘 어우러진다. 특히나 상큼 달큼하고 새콤한 이 샐러드의 드레싱이 맛이 좋아서 질리지 않고 계속 먹을 수 있고 스파게티도 서늘하게 잘 헹궈져 나오기 때문에 부담스럽지 않고 가벼운 식감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채소의 아삭함에 상큼한 드레싱의 맛이 들어오고 든든하고 시원한 면으로 마무리하는 파스타.
함박마을 토마토미트소스파스타
토마토미트소스파스타: 음식의 겉만 보고 이건 '기성품 토마토미트소스 통조림 쓴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지 말지어다. 나도 처음에 보기에는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대형마트 푸드코트에서 먹을 수 있는 별거 없는 파스타의 외모를 가졌다고 생각했으나 소스를 한입 먹고는 생각이 바뀌어 버렸다. 고소하고, 고소하고 또 고소하다. 유지방의 맛이 가득히 느껴지는 고소한 첫 입에 토마토와 채소들에서 우러나오는 뭉근한 단맛과 새콤한 감칠맛, 그리고 치아 사이로 잘근잘근 씹히는 진한 갈린 쇠고기의 맛. 그렇다, 간 고기를 사용하는 함박스테이크를 주 메뉴로 하는 식당인데 갈려진 고기가 들어간 파스타의 소스가 맛이 없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 식재료가 이렇게도 이어질 수가 있는 것이구나. 처음에는 굉장히 단순해 보이던 소스가 엄청난 맛을 뿜어내자, 나는 한 숟갈의 소스를 더 떠먹었다(원래 식전 수프를 먹고서 그 수프 그릇들과 함께 주방으로 설거지를 보내려고 했는데 포크로 살짝 소스를 떠먹고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수프 그릇 사이에 있던 숟가락을 재빨리 빼서 사용했다). 와, 소프리또(다진 야채)를 어떤 버터나 우유를 넣고 볶으면 이런 무지막지하게 고소한 맛이 나는 걸까. 이건 짠맛의 고소함이 아니라 입안 가득히 진득하게 느껴지는 유지방의 고소함이다. 일생에 고소를 당할 일이 있다면, 이 함박마을의 토마토미트소스파스타의 소스에 고소당하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 고소한 소스의 맛에 약간의 달콤함과 감칠맛 터지는 토마토의 새콤함, 거기에 따라오는 진한 쇠고기의 맛. 음식을 하나 더 먹을 수 있었다면 나는 분명 이 파스타를 하나 더 주문했을 것이다. 5시간 이상을 뭉근하게 끓여낸 토마토와 고기의 맛이란. 이 집에서 파스타를 먹어야 한다면 토마토미트소스파스타를 주문하도록 하자.
함박마을 함박스테이크
함박스테이크: 적당히 그을려지게 구워진 식감이 아삭하게 살아있는 그린빈, 새송이, 토마토와 단호박. 반숙으로 익은 써니사이드업 달걀을 머리 위에 살포시 얹고 겸손하게 앉아있는 척하는 이 햄버거의 맛은 전혀 겸손하지 않다. 갈린 소고기가 뻑뻑하지 않고 육즙을 간직한 채 부드럽게 익어서 칼과 삼지창으로 살짝만 건드려도 두부처럼 썰린다. 입에서 씹으면 소고기의 촉촉하고 부드러운 식감과 고기의 육즙과 씹는 맛이 일품인데, 나는 수년 전에 인천을 가서 우연히 방문했던 경양식 집에서 먹었던 극강의 함박스테이크 맛이 떠올랐다. 인천의 함박스테이크는 여러 부위의 쇠고기를 썼는지 다양한 식감과 육즙이 느껴져 눈이 번쩍 뜨이는 맛이었는데, 함박마을의 함박스테이크는 인천의 그 함박스테이크가 생각이 날 정도로 쇠고기의 겉이 적절하게 단단하며 속은 부드럽고 촉촉했다. 굳이 데미그라스 소스가 없어도 맛있을 햄버거였지만 여기에 곁들여진 데미그라스 소스는 지금도 먹고 싶다. 사과와 양파를 베이스로 했다는 설명처럼 과일과 채소가 냄비 밑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듯한 단맛이 소스의 첫맛을 담당하는데 그 맛이 전혀 가볍지 않다, 포트와인의 묵직하고 중후한 향미가 달큰하고 감칠맛 넘치는 소스에 무거운 맛을 더해 자칫 지루할 수 있는 함박스테이크에 즐거움을 더해준다. 달달하고 독한 포트와인을 데미그라스 소스에 더해 과일, 채소와 함께 여러 가지 단맛을 끌어내고 무거움을 더한 것이 한입에 입을 매료시킨다. 물론, 함박스테이크에서는 함박스테이크를 먹는 거지 소스가 주메뉴는 아니지만, 소스를 따로 더 줬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가져보기도 했다, 아마 그랬으면 소스를 입에 들이붓듯이 마셨을 것이다. 그릇에서 벅벅 소리가 나도록 데미그라스 소스 한 방울마저 놓칠세라 끝까지 그릇을 놓지 않고 긁어먹었다.
함박마을의 사장님께서는 우리를 포함한 다른 테이블에도 음식의 제공이 늦어져 미안하다고 하시며 방울토마토를 매실과 리치에 절인, 메뉴판에 쓰여있는 그대로 '새콤달콤'한 꿀맛 나는 방울토마토와 콜라를 무료로 주셨는데 이 방울토마토가 또 시원하고 상큼하며 새콤달콤한 요물이다. 껍질을 벗긴 방울토마토가 그렇게 육질이 쫄깃하고 아삭할 수가, 이렇게 맛있는 줄 알았다면 무조건 처음부터 같이 시키는 건데... 너무 맛있고 적은 양이 무료로 나왔던 거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 먹어서 사진은 찍지 못했다.
전체적으로 모든 메뉴에서 함박마을 사장님 겸 셰프님의 내공이 느껴졌다. 그 어떤 메뉴를 시켜도 무조건 평범한 맛 이상의 맛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각각의 음식에 사용된 소스들은 정성과 노력, 시간이 느껴지는 맛이었고 다음에 부산에 오면 또 와야겠다고 다짐하는 맛들이었다. 게다가 요즘 경양식당으로서는 제법 가격이 높지 않고 가성비가 좋은 집이었기에 이런 경양식집을 발견했다는 것이 기뻤다. 나는 '음식 맛이 상당히 훌륭하네요'라는 칭찬밖에는 해드리지 못했지만, 제발 오래오래 장사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