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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처럼 좋은 시어머니가 어디 있니?

by 미나리



너는 정말 결혼 잘했다.




시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너는 무슨 복이 많아서 우리 아들이랑 결혼했는지 모르겠다. 인물 좋지, 직업 좋지, 집 있지, 빠지는 게 없잖니. "

"다른 사람들이 집안 차이 나는 결혼은 시키는 거 아니라더라. 그래도 아들이 좋다니까 별 수 있니? 우리는 너 하나만 보고 그냥 결혼시킨 거야. 그러니까 네가 우리한테 잘해야지. "

"너한테 가르칠 게 너무 많아서 걱정이야. 내가 널 낳았다고 생각하고 처음부터 새로 키워야지 어쩌겠어. 너 똑똑하잖아. 잘 배울 수 있지? "

"내 친구 아들이 이번에 장가갔는데, 며느리 집안이 그렇게 부자라더라. 우리 아들도 부잣집 딸들이 얼마나 넘봤는 줄 아니? "

"너희 친정어머니는 반찬 한 번 안 해 나르시더라? 자식 걱정도 안 되시나 봐. 하긴 나처럼 이렇게 잘 챙겨주는 엄마가 또 어디 있겠니. "

"다른 집 시어머니들은 얼마나 며느리를 못살게 구는 줄 아니? 내가 너 고생시키는 게 뭐가 있니. 넌 정말 좋은 시어머니 만난 거야. "

"결혼하고 나서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부족하다. 며느리가 말도 예쁘게 하고, 싹싹하게 시키지 않아도 할 일 하고 해야지. "



명백한 가스라이팅이었다. 며느리와 며느리의 친정을 낮추고, 남편과 시댁은 높이는 말들로 나의 죄책감을 유발하고 시댁에 복종하게끔 조종하는 말들이었다. 하지만 저런 말들을 하실 때의 시어머니 얼굴은 웃고 있었고 말투는 친절했다. 겉으로는 별 뜻 없어 보이거나, 나를 위하는 것처럼 교묘하게 포장된 말들이었다. 게다가 대부분 사실이기도 했다. 그래서 당시에는 악의가 담긴 말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냥 묘하게 기분이 나빴을 뿐이었다. 하지만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눈치를 채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시어머니께서 원래 별 뜻 없이 아무 말이나 하시는 분인가, 사소한 말 따위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분이신가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나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절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으셨다. 한 번은 어마어마한 부잣집에 시집간 내 친구 이야기를 했다가 '네가 감히 우리 집안을 비교하는 거냐. '며 한바탕 난리가 나기도 했다.



나는 점점 작아졌다. 시어머니에게 들은 상처되는 말들은 표면적인 갈등보다도 더 오래, 깊게 가슴에 박혔다. 받아치지도 못하고 같이 웃었던 나 자신이 바보 같단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자꾸만 자책하며 더 깊은 구덩이 속으로 들어갔다.


남편에게 어머니가 이런 말씀들을 하셔서 속상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냥 엄마가 옛날 사람이라 말을 예쁘게 못 해서 그래. 행동으로는 안 그러시잖아.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어른들 잘 안 바뀌는 거 알잖아. "

남편은 그저 말 뿐이라고, 별 일 아니라고 말했다. 그래, 말 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너무 아팠다. 차라리 대놓고 날 구박하거나 때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남편도, 시댁 식구들도 내 말을 들어줄까. 내 상처를 알아봐 줄까.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나를 지켜주지 않았다. 누구도 나를 지켜줄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더 이상 시어머니의 사소한 말과 행동에 상처받으며 우울한 나날들을 이어나갈 수는 없었다. 스스로 일어서야 했다.


일기를 쓰고 책을 읽고 공부를 했다. 인간관계, 자존감, 상처 등 관련분야를 섭렵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나는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바뀌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힘든 관계를 억지로 이어나갈 필요도 없고, 반대로 거리를 둬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제야 좀 길이 보이는 듯했다. 나는 다짐했다. 더 이상 참지 않겠다고, 휘둘리지 않겠다고. 물론 쉬운 길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해보겠다고.





이제부터 내가 나를 지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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