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한테 전화 좀 드리면 안 돼?
친밀한 고부관계를 바라는 남편의 소망은 여전히 꺼지지 않았고 종종 나에게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라며 부추겼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만든 방패막이인데 이걸 또 부수려고 해? 당신은 날 지켜주지도 못하면서 또 나 혼자 다치게 내버려 두겠다는 거야? 계속 이런 식으로 하면 당신이랑 정말로 이혼할 거야. 자기 와이프 하나 못 지키는 남편은 필요 없어. "
끝을 보고 싸우는 사람을 이길 수는 없다고 했던가. 그렇게 나는 내가 만든 선을 지켜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명절과 생신에 다시 방문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쭈뼛쭈뼛 방문한 며느리를 시부모님은 다정하게 반겨주셨다. 몇 달 만에 갔으니 한 소리 하시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부정적인 말씀은 일절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의 누그러진 태도를 보니, 미움으로 가득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렇게 우리는 서서히 다시 보통의 고부관계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단, 1대 1 연락과 만남 금지 원칙은 여전히 지키면서 말이다.
시어머니는 내가 만든 규칙을 존중해 주셨고, 그 이후로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잘 지켜주고 계신다. 덕분에 나는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뜬금없이 걸려와 내 기분을 요동치게 만드는 전화통화로부터의 자유, 예고 없이는 아무도 들이닥칠 일 없는 내 공간에서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자유.
며느리의 도리 중 하나인 안부전화(남편 말에 따르면 그렇다. )를 하지 않고 있기에 만남을 가졌을 때는 최선을 다 하려고 한다. 식사를 대접해 드리기도 하고, 함께 여행을 가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시부모님도 항상 솔선수범 나서서 일하시고, 먼저 베풀어주신다. 지금의 시어머니와 과거의 시어머니가 동일인물이라는 것이 때로는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렇게 매섭고, 감정적이었던 분이 지금은 너그럽고 인자한 분이 되셨다.
변화된 시어머니의 모습은 나 스스로도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과거의 내 행동이 정말로 부족하진 않았나, 내 입장만 생각하진 않았나,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반성할 부분은 반성한다. 자식을 낳고 키우다 보니 시어머니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도 한다. 어머니 역시 이 시대가 만들어 낸 피해자라는 생각에까지 미처 안쓰러운 마음마저 든다.
남편도 더 이상 나에게 안부전화 따위로 닦달하지 않는다. 며느리로서의 나를 못마땅해하지도 않는다. "다음에 시부모님 모시고 이거 먹으러 갈까? 어머니 생신 때 다 같이 여기로 놀러 가자! "라고 말하면 얼떨떨한 미소를 짓는다.
물론 갈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어쩌다 한 번씩 작은 갈등들이 생기긴 하지만, 사람 사이에 갈등이 아예 없을 수는 없는 거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있는 정도다. 게다가 요즘은 갈등이 생기더라도 그 뒤로 연락이나 만남을 가질 수 없어 더 크게 번지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역시 내가 만든 규칙은 유용했다.
이제는 더 이상 우울하지도, 위축되지도 않는 삶을 살고 있다. 신기하게도 오히려 자존감이 올라갔다. 자존감이 바닥을 친 이후로 주저앉지 않고 어떻게든 다시 올라오려고 노력한 결과, 예전보다도 더 높은 자존감을 갖게 된 것이다. 어쩌면 이게 다 시어머니 덕분이다.
지금의 나는 있는 그대로 완벽하고, 훌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