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천지

천지가 내게 건네준 위로

by 바람에 실린 편지


살다 보면 마음속에 오래 품어둔 소원이 있다.

누구에게는 작은 소망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이에게는 평생을 기다려야 하는 소망일 수도 있다. 나에게 그 소원은 바로 백두산 천지를 맑은 날에 직접 보는 것이었다.


어릴 적, 아버지 지인이 선물로 주고 간 칼라 사진 한 장이 있었다. 응접실 벽에 걸려 있던 그 사진 속 천지는 신비로운 푸른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 사진을 바라볼 때마다 ‘저곳은 정말 세상에 존재하는 걸까? 내가 언젠가는 저 풍경을 직접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자라났다. 시간이 흐르며 천지를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되었고, 그때마다 내 안의 꿈은 조금씩 커져만 갔다.


그러나 백두산은 아무에게나 속살을 내어주지 않았다.

몇 년 전 엄마와 함께 갔을 때도 그랬다. 하루 종일 날씨가 좋더니, 막상 정상에 오르자 갑작스럽게 눈이 내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기대와 설렘이 단숨에 무너져 내리는 경험이었다. 그때 나는 마음속으로 ‘이곳은 나를 쉽게 받아주지 않는구나. 어쩌면 평생 보지 못하고 돌아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기억이 있었기에, 다시 떠난 이번 여행에서도 마음을 다잡았다. ‘설령 보지 못하더라도,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여정일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길을 나섰다. 그런데 이른 새벽, 가이드의 입에서 “오늘은 날씨가 좋을 겁니다”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정말일까? 이번에는 가능할까?’

긴장과 기대가 뒤섞인 감정이 나를 붙잡았다.

여러 번의 셔틀을 갈아타며 정상으로 향하는 길,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점점 푸른빛을 드러냈다. 능선은 선명했고, 구름은 실처럼 흩어져 발아래를 스쳐 지나갔다. 해발 2700미터에 다다르자, 공기는 차갑게 가슴을 파고들었지만 하늘은 투명했다. 먼지 하나 없는 맑은 공기 속에서, 나는 비로소 알 수 없는 확신을 느꼈다.

‘오늘은 보여줄 거야. 천지가 나를 기다려주고 있을 거야.’


그리고 마침내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끝없이 고요한 호수가 푸른빛을 머금고 자리 잡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었고, 수면 위에는 뜨거운 햇살이 반사되어 또 하나의 세상이 비쳤다.

그 풍경은 현실이라기보다 오래된 신화 속 장면 같았다.

마치 오랜 세월 동안 숨겨져 있던 비밀을 잠시 허락받은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말을 잃었다.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고요가 마음을 감쌌다.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조차 멀리서 아득하게 들렸다. 그 순간은 오직 천지와 나, 둘만 존재하는 시간이 되었다. 나는 셔터를 몇 번 눌러보았지만, 곧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어떤 장비도, 어떤 사진도 이 깊이를 담아낼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내 안에서 아주 오래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줘서 고마워. 살아줘서, 고마워.”


나는 놀라 잠시 멈추었다. 그것은 마치 내가 스스로에게 건네는 위로 같았다.

늘 불안해했고, 기대를 감추려 했으며,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던 내 마음속 작은 소녀가 조용히 나를 바라보는 듯했다. 나는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천지를 보는 순간, 그 모든 불안과 두려움이 잠시나마 내려놓아졌다.

인생은 종종 날씨와 닮아 있었다. 예고 없이 다가오는 비와 눈, 하루에도 수없이 변덕을 부리는 하늘. 그러나 그 모든 기다림 끝에 찾아오는 맑음은 언제나 더 크게 다가온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천지를 마주한 것도, 사실은 오랜 시간 품어온 기다림이 있었기에 더 소중했다. 만약 언제든 쉽게 볼 수 있었다면, 아마 오늘의 감동은 이만큼 크지 않았을 것이다.

곧 천지는 다시 구름 속으로 숨어들었다. 단 몇 분 남짓의 만남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이 내 인생의 많은 순간을 위로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사가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이제 더는 예전의 내가 아니구나.’ 단순히 버킷리스트 하나를 지웠다는 만족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온전히 느끼는 감각이 내 안에 자리 잡았다.

내려오는 길에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다음에는, 어디서 너를 만나게 될까.”


이 속삭임은 단지 천지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의 삶에서 또다시 마주하게 될 벅찬 순간, 나를 위로하고 다시 일어서게 할 풍경을 향한 약속이었다.

백두산 천지는 내게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 삶에 쉼표와 느낌표를 동시에 남긴 존재였다. 그리고 나는 이제 믿는다. 때로는 운이 아닌, 간절한 마음이 하늘을 움직인다는 것을. 기다림 끝에 오는 한 장면이 인생 전체를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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