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부맥가이버 Oct 17. 2023

[시] 그런 날에


종일 잰걸음으로 집안일을 하다가


애가 벽에 낙서한 것을 지우다가


널브러진 물건들을 이삭줍기하다가


애가 바닥이며 티브이며 붙여놓은 세기의 발명품 투명 스카치테이프에 매달려, 


나도 벽에 붙는다 




나는 팽목항에 가본 적도 없고


광화문에 가본 일도 없다


그곳에 간다는 것은 자신의 욕구와 싸우고


의식을 세우는 일임을 알고 있다


살을 에는 추위와 맞짱 뜨고


살을 익히는 더위와 친구 먹는 일이다


자신에게만 매몰된 정신에 맹물을 끼얹는 일이다




 부인께서 12시에 만나요 부라보콘 노래를 흥얼거리며 한창 신나하였다


나는 내 입에 들어갈 수박을 마트에서 둘러보다 삼만 구천팔백 원 가격표를 보며 슬며시 내려놓았다


고위 관직은 마다해도 강남땅은 포기할 수 없다는 이쪽 저쪽도 아닌 분들이 장사치도 아닌데 숱한 이문을 남기었다 


나는 인터넷 최저가에 목숨을 걸고 검색을 하다 월화수목금토일 빨주노초파남보 믹스 매치로 몸을 고이 단장하였다 




세상에서 법을 가장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사람은 아이들 볼까 두려워 무단횡단 한번을 하지 않고


세금 체납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낼 일 없는 사람은 그 법 앞에 자신이 평등할 줄로 믿고 산다




무임 노동자로서의 집안일과


휑뎅그렁한 수박값과 


깔별맞춤의 허접한 만족감과


은장도 같은 준법정신과


발등을 찍는 평등함과 함께 


오늘을 살아간다




대의와 명분과


정의와 의식과


금은과 보화와는 동떨어진 


지금을 살아간다




바늘구멍처럼 작아지는 날이다


실가락처럼 가벼워지는 날이다









김수영 시인의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읽다가 

분명 마음에서 말들은 쏟아지는데

뭔가 나도 쓰고 싶어서 

부족한 나를 끄적여 본다종일 써내려간 시


이전 12화 [시] 나는 약하기로 하였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