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6. (1) 아이가 성장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 부모
이 책은 저자의 실제 삶에서 비롯된 기억과 감정,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심리적 통찰을 바탕으로 구성된 에세이입니다.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처리되었으며, 실제 인물과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이 글을 통해 과거를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건네고자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저자의 주관적 시각에 따른 해석이며, 법적 사실을 단정하거나 특정 인물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이 책은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비방하거나 공격하려는 목적이 아닌, 개인의 성장과 회복의 여정을 기록하고, 유사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위로와 통찰을 제공하기 위한 진솔한 성찰의 기록입니다.
이 기록이 비슷한 경험을 가진 누군가에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이가 성장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 부모들
단돈 천원도 못 벌어오는 너는 불필요한 존재야
나중에 나랑 시골에 집 지어서 같이 살자
여행이 싫은 이유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아
하늘이 매우 높고,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여름날이었다. 맑고 하얀 아이가 교실 앞에 들어왔다. 선생님은 그 아이를 소개하며 내 뒤편 자리에 앉으라고 하셨다. 그 아이가 얼마나 곱던지, 그날 봤던 하얗고 고운 피부가 지금도 기억난다. 여자아이들은 하나같이 고운 그 남자아이를 보며 설레는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나 역시 남모르게, 혹은 티가 날 정도로 고운 그 아이를 몰래 쳐다보곤 했다. 전학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 아이에게 선생님은 학교 전반에 대해 소개하는 역할을 내게 맡게 하셨다. 말하는 것이 쑥스러울 정도로 그 아이에게선 싱그러운 여름 향기가 났다. 그리고 그 향기가 살포시 코 안으로 들어올 때면 나도 모르게 마음에 간지러운 느낌이 났다.
어느 날부터 고운 아이는 아침 일찍 산꼭대기 즈음에 자리 잡은 우리 집 대문 앞에 서있기 시작했다. 등교를 같이 하고 싶다며 매일 같이 걸어온 그 아이의 집과 우리 집의 거리는 보통 걸음으로 1시간 30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내가 항상 대문을 나서는 시간에 맞춰 대문 앞에 서 있던 아이는 앞서 걷는 내 뒤에 서서 걸으며 함께 30분 정도 거리를 함께 걸었다. 그렇게 내게 사춘기의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그 아이는 내게 고운 관심들을 보이며 작고 예쁜 선물들을 가져다주곤 했다. 그럴수록 이상하리만큼 그 아이의 눈을 피하고 싶고, 말을 거는 일이 무서워서 쉬는 시간이면 화장실에 가서 숨곤 했다. 그 당시 나는 회피형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 아이가 나에게 관심을 가질수록, 그 아이가 미워지고, 멀어지고 싶어 하는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회피형 애착은 부모의 일관되지 않은 감정적 반응이나 무반응에서 비롯되며, 그로 인해 아동은 가까운 관계를 두려워하고, 타인의 애정 표현을 거부하는 경향을 보인다. 나는 스스로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두려웠고,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 불편했다. 그렇게 아이는 일주일 넘게 꾸준하게 내가 등교하는 시간에 맞춰 먼 거리를 걷고 걸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그날 밤 나를 불러 호되게 혼을 내셨다.
"벌써부터 남자애나 불러들이고 말이야. 너 저 아이랑 뭐라도 있다고 들리기만 하면 니 책들 전부 불태워 버리고, 학교도 안 보내줄 거야. 그리 알어."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고, 내가 보고 있던 책들을 태워버리고 학교에도 보내지 않겠다는 그의 말에 덜컥 겁을 먹었다. 사실 내가 보고 있던 책들도 아버지가 사준 것들이 아니었다. 그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동네 언니가 있었는데, 언니를 공부시키고 싶었던 그녀의 아버지가 억지로 8종 문제집을 40여 권을 사줬다고 했다. 시중에 나온 문제집들을 몽땅 사서 방에 두기만 하면 딸이 알아서 풀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언니는 문제집들을 보며 한참 웃었다. 자기는 도통 공부에 관심이 없고, 싫어서 한 번도 펼쳐본 적이 없다며 문제집들을 보여줬다. 그리고 일찌감치 아버지의 기대를 없애야 한다며 온 김에 전부 가져다 달라 부탁했다. 덕분에 교과서밖에 없던 내가 8종 교과서 문제집을 모두 갖게 됐고, 때마침 1학년 공백을 메워야 했기 때문에 언니가 준 문제집들을 보면서 놓쳐버린 공부 공백을 모두 채울 수 있었다. 아버지가 태워버리겠다고 엄포를 놨던 문제집은 내가 보고 또 보던 아주 소중한 책들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협박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지금도 그때가 생각날 때면 자기가 사준 것도 아닌 문제집들을 태워버리겠다고 말한 아버지가 참 당황스럽다.
그 다음 날도 어김없이 고운 아이가 녹이 군데군데 슬어있는 녹색 대문 앞에 서 있었다. 곱다 못해 하얗던 아이는 녹슨 녹색 대문과 대조를 이뤄 아름답다 못해 눈이 부셨다. 군데군데 녹이 슨 대문 옆에는 어머니께서 심어놓은 붉은 장미가 있었는데, 막 만개한 장미들 옆에 서 있던 아이가 장미와 함께 베르샤유의 장미를 찍을 판이었다. 집을 나서는 내 뒤편에는 감시자 역할로 일찍부터 마당을 쓸겠다며 나와 대나무 빗자루를 들고 있던 할아버지가 멀찌감치 서 있었다. 그의 따가운 눈총을 뒤로 하고 마당을 사분사분 걸어 대문을 나섰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 고운 아이가 따라나섰다. 나는 그때 고운 아이가 따라오지 못할 만큼 뛰겠다며 뛰어 학교에 갔다. 하지만, 고운 아이는 다리가 매우 길어 내 짧은 다리로 거리를 벌리지 못했다. 그때 느꼈던 부끄러움과 수치심, 당혹감 등 다양한 감정들이 불쑥 튀어나오려고 할 때마다 나는 감정을 깊은 곳에 묻고 무감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리고 학교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고운 아이에게 목소리에 잔뜩 힘을 줘서 다시는 집에 오지 말라고 했다. 반짝이는 아이의 눈빛이 지금도 마음을 누르고 또 누른다.
사춘기의 자연스러운 감정조차 조종과 통제의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부모 밑에 자란 나는 고운 아이처럼 사랑이 가득한 손길마저 뿌리치고, 아이에게 깊은 상처를 줬다. 그때 나는 감정을 억압하고, 이야기하지 않고 시간을 견디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그 아이에게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고, 못했다. 그 아이가 공부에 열을 올리는 나와 같은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공부를 놓았을 때조차 나는 아이를 돕지 못했다. 선생님들은 공부를 전혀 하지 않는 고운 아이를 내가 조금만 도와주면 안 되겠냐며, 그 아이의 아이큐가 너무 높아 아깝다고 내게 도움을 요청하셨다. 그러나 나는 그 요청을 무시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당시 같은 학교, 같은 반에 있던 친척 아이 때문이었다. 그 친척 아이는 아버지의 감시자 역할을 했고, 고운 아이와 꽤 친분을 가지고 있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친척 아이는 아버지께서 내 공부를 도와주신다는 명목으로 매일 영어 단어를 외우지 않으면 손바닥을 때리는 학대를 알고 있었고, 일부러 내가 단어를 외우지 않았다고 일러 손바닥을 더 많이 맞게 했다. 때로는 아버지 앞에서 영어 단어를 읊어 아버지가 내 숙제를 확인하도록 유도했다. 심지어 삼촌이 나를 하도 때려서(눈 주변이 퍼래질 정도로 때렸다.) 뒤에서 욕했다가 친척 아이가 일러 파이프로 맞기도 했다. 삼촌은 나 같은 말을 듣지 않는 아이는 개처럼 때려야 한다며 폭력을 정당화했다. 덕분에 나는 집이든, 학교에서든 감시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내가 또래 친척들보다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친척 아이가 부모에게 비교당하고 정서적 학대를 겪었다는 것이다. 그 시절 나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최근에 심리 공부를 하면서 그 아이의 시선과 고통을 깨닫게 되었다. 부모에게서 받은 억압과 정서적 학대가 내 인간관계 속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것도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안정적인 애착을 전혀 형성하지 못했다. 누군가 나를 좋아하거나 잘해줄 때면 거부하고 도망가곤 했다. 혼란형 애착은 회피형 애착과 불안형 애착이 혼합된 형태로, 부모의 일관되지 않은 반응으로 인해 아이가 애정에 대한 두려움과 갈망을 동시에 경험하는 유형이다. 나는 부모로부터 안정감을 느끼지 못해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에서 늘 깊은 불안을 느꼈다. 그래서 고운 아이가 보이는 관심에 간절한 욕구와 동시에 버림받을 것 같은 두려움이 교차했다. 성장하면서도 애착의 왜곡된 형태는 지속되었다. 부모의 통제 아래 내 감정은 점점 더 억압되었고, 이는 자아 방어 기제로 작용해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감정적 억제는 성인이 된 후에도 지속되었고, 나는 나르시시즘적 관계에 빠져들어 계속된 고통을 겪었다. 사랑이 아닌 지배와 통제 속에서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는 역설적 상황이 반복되었는데 이는 어린 시절 학대와 통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형성된 왜곡된 안전감이었다.
성인이 된 후, 나는 고통스러운 패턴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반복된 패턴을 인식하고 이를 끊기 위해 고통 속에서 스스로를 다시 찾아가는 과정을 반복해서 나를 치료하고자 했다. 그 중 하나가 반복강박이라고 생각한다. 무의식 역시 미해결된 과제를 치료하기 위해 비슷한 사람들을 선택해 비슷한 관계들을 반복하게 했다. 덕분에 오늘의 나는 더 이상 감정을 억압하지 않고 건강하게 표현하며, 진정한 애정을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자아를 인정하는 방법을 천천히 배웠고 여전히 배워가고 있다.
이후 성인이 된 나는 당시 고운 아이에게 연락해 뒤늦게 사정을 설명하고 사과했다. 이미 고운 아이는 좋은 사람과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고, 내게도 행복을 빌어줬다. 부족했던 그 시절의 나를 따뜻하게 품어준 그 아이에게 진심으로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한다.
1부. 6. 참고 자료
1. Ainsworth, Mary D., Patterns of Attachment: A Psychological Study of the Strange Situation, Lawrence Erlbaum Associates, 1978.
→ 사용된 개념: 낯선 상황 실험, 양가애착의 정의와 특성
2. Bowlby, John, Attachment and Loss: Volume 1. Attachment, Basic Books, 1969.
→ 사용된 개념: 애착의 안전기반(Secure base), 혼란형 애착(disorganized attachment)
3. Bowlby, John, A Secure Base: Parent-Child Attachment and Healthy Human Development, Basic Books, 1988.
→ 사용된 개념: 정서적 단절, 부모의 무반응성과 핵심 신념 형성
4. Branden, Nathaniel, The Six Pillars of Self-Esteem, Bantam, 1994.
→ 사용된 개념: 자기감정에 대한 인정, 자기애와 자아 존중의 중요성
5. Gergen, Kenneth J., The Saturated Self: Dilemmas of Identity in Contemporary Life, Basic Books, 1991.
→ 사용된 개념: 자아정체성의 혼란, 현대 사회에서의 자아와 관계
6. Kohut, Heinz, The Analysis of the Self: A Systematic Approach to the Psychoanalytic Treatment of 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s, International Universities Press, 1971.
→ 사용된 개념: 나르시시즘, 자기애의 분석
7. Meissner, William W., The Narcissistic Personality: A Psychoanalytic Perspective, Yale University Press, 1987.
→ 사용된 개념: 나르시시즘, 자아의 방어기제와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