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끄 라깡 세미나 XX Encore : 30
6-(1). 신과 여성(/)의 주이상스
오랜 시간 동안 저는 청중석을 거닐면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습니다. 사실 저는 학기 중 방학 덕분에 여러분의 참석이 줄어들기를 희망했었죠.
이제는 그 희망이 좌절되었으니 다시 지난번에 시작했던 주제, '다른 만족'이라고 부른 것을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다른 만족감'이란, 제가 간단히 '남자'와 '여자'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사이에서 성립되기 위해 필요한 주이상스에 대응하는 것입니다. 즉, '팔루스적 주이상스'에 대응하는 만족감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제가 사용하는 단어 '정확히(juste)'입니다. 이 '정확히'란 것은 '겨우 성공한 것(tout juste réussi)'을 의미하며 실패와 맞닿아 있는 성공입니다. 우리는 이미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정의'(justice)의 개념이 중간점을 지향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 중 일부는 제가 이 '겨우(tout)'라는 단어를 소개할 때, 'prosdiorisme'(역자주: 아리스토텔레스의 양화사 이론에 쓰이는 용어, 전체와 부분을 연결하는 개념으로 쓰임)라는 단어를 우회한 것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릅니다. 이 prosdiorisme이란 모든 언어에 있는 '전체'를 의미합니다. 어쨌든, prosdiorisme 또는 전체가 이 경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서 적절함, 즉 '겨우 성공한' 쪽으로 우리를 미끄러지게 한다는 것은, 처음에 아리스토텔레스를 소개한 제 정당성을 증명하는 것인데, 즉각적으로 이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해되기 어려운 이유는 그와 우리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읽기는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말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읽어야 합니다.
오늘날, 이것이 다소 역설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저는 여러분에게 한 책을 읽어보라고 권유하고자 합니다. 그 책은 나름 저와 관계가 있는 책인데요, <문자의 제목 Le Titre de la lettre>라는 제목으로 갈릴레 출판사에서 <A la lettre> 시리즈로 출판되었습니다. 저는 그 책의 저자에 대해서는 특별히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은 여기서 부차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의 노력을 깎아내리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 책을 매우 만족스럽게 읽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책이 그저 악의적인 의도로 쓰였다고 말할 수 있지만, 마지막 30페이지를 읽어보면 그 점이 분명해질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이 널리 읽히기를 권장합니다.
저는 어떤 면에서는, 누군가가 저를 이렇게까지 사랑으로써 읽어준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책의 마지막에 보면, 그들의 사랑은 분석 이론에서 자주 등장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너무 과장된 말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들을 '주체'로서 인정하는 것은 과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감정을 언급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좋은 독서의 모범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이 정도 수준의 읽기를 얻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저자들은 저의 <에크리 Écrits>에서 실린 <문자의 기능"L'Instance de la lettre>라는 글에 집중했는데, 이 선택을 칭찬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읽기란, 스스로에게 제한을 가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제가 소시르와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면서 저를 '탈선'시켰다고 말하며, 진리와 그 역설에 대한 분석적 담화에서 다루는 문제로 저를 이끌었습니다.
그들이 이 작업을 하면서 도달한 지점에서, 이 글의 종결부에서 저는 그들이 다소 난처해진 상태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그들의 결론은 매우 대담하고, 여러분도 직접 읽어보면 이 점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책을 읽어보길 권장하며, 여러분의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