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çon 10 : 1976년 4월 13일 (2) : Q&A
질문 I
“정신분석이 하나의 증상(symptôme)이라면, 당신이 그 매듭과 ‘마통(mathomes)’으로… [라캉의 말실수(lapsus)] …아니, 마텡(mathèmes)으로 [웃음] …하고 있는 작업은 결국 그것을 해독함으로써 그 의미를 소멸시키는 행위가 아닌가요?’”
A.
저는 정신분석이 하나의 증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신분석은, 그 효과가 실질적으로 드러나긴 하는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실천은, 제가 ‘내 매듭(mon nœud)’이라 부르는—즉 세 겹의 매듭—을 구성하게끔 합니다. 바로 그것이 저에게는 요구됩니다. 이로써 저는 ‘현실(réalité)’과는 구별되는 제3의 차원에 접근하는 일을 유보하게 되며, 이 차원을 저는 ‘실재(le Réel)’라고 부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건 여전히 완전히 닫혀 있는 사고이고, 아직까지는 완전히 해명되지 않은 마지막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실재’라는 말이 지닌 고유한 가치와, 그것이 현실과 구분된다는 점이 서로 일치한다고 저는 확신하지 않습니다. 실재는 의미(sens)를 갖지 않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저는 실재라는 것이 오히려 ‘증환’이라는 아무것도 아닌 것—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것—으로 이해될 때, 그 의미가 비로소 드러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제가 그 질문에 대해 드리는 답입니다.
저는 다소 조야한 위상학을 통해서라도 실재가 문제되는 그 기능을 지탱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바로 그 실재는, 제가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확신 있게 붙들고 있다고 믿는 ‘무의식(l'inconscient)’과는 구별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무의식을 실천적으로 다루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의식은, 분명히, 육체(corps)에 대한 어떤 참조 없이는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실재의 기능은 무의식의 기능과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질문 II
“창세기에 따르면—이는 앙드레 슈라키(André Chouraqui)의 번역을 인용합니다—하나님은 인간에게 ‘그에 맞서는 돕는 자’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정신분석가는 ‘그에 맞서는 도움(aide contre)’이 되는 존재입니까?”
저는 실제로 정신분석가는, ‘증환’ 이외의 어떤 방식으로도 개념화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증환은 정신분석 자체가 아니라, 정신분석가에 해당합니다. 아까 어떤 분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도 바로 이 점입니다. 정신분석가는 창세기의 표현을 빌리자면, 결국 일종의 ‘전도(retournement)’로서의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타자의 타자(Autre de l’Autre)’는, 제가 방금 전에 말한 ‘작은 구멍(petit trou)’으로 형상화되기 때문입니다.
이 작은 구멍 자체가 하나의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바로 여기에 무의식이라는 가설이 근거를 둡니다. 프로이트는 이를 강조합니다. 무의식의 가설은 ‘아버지의 이름(Nom-du-Père)’이라는 전제를 필연적으로 요구합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이름’을 전제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신분석이—만약 성공한다면—증명하는 것은 바로 이겁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 없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으며,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질문 III
“각각의 발화 행위(acte de parole)가 개별 무의식의 일종의 폭력적 돌파(coup de force)라면, 그것은 무의식의 집단화(collectivisation) 아닌가요?”
만약 각각의 발화 행위가 특정 무의식의 돌파라면, 이는 매우 명확해집니다. 우리가 이론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각 발화 행위는 하나의 ‘말하기(dire)’로 귀결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하기는—그 자체로—하나의 이론적 구조로 귀속되며, 바로 그 구조는 어떤 종류의 ‘혁명’을 지탱하는 기반이 되기도 합니다. 즉, 이는 일종의 ‘모순의 이론(théorie de la contradiction)’인 셈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매우 다른 것들을 말할 수 있으며, 그 말들이 때로는 서로 모순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모순으로부터 어떤 ‘현실(réalité)’이 생성될 수 있다고들 기대합니다. 즉, 그 현실은 ‘혁명적’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실제로 입증된 적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모순적인 소란(remue-ménage)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으로부터 실질적인 현실이 생성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로부터 현실이 나오기를 바라지만, 그런 현실이 실제로 생겨난 적은 없습니다.
질문 IV
“은유의 장(champ de la métaphore)에 당신은 어떤 한계를 설정하십니까?”
이건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직선(la droite)은 무한하다고 해서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라는 방식으로 질문이 이어집니다. 즉, “은유의 장은—직선처럼—무한한가?”라는 물음입니다. 직선의 위상은 확실히 사유해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잘라낸 직선이라면 분명히 유한한 것이고, 경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한한 직선이 한계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유한한 것에 한계가 있다고 해서, 직선이 무한해질 때—그 직선이 ‘무한에 있는 점(point à l’infini)’을 가진다고 가정할 수 있다면, 결국 그것은 일종의 ‘원(circle)’을 이루게 되는 것인데—그렇다고 해서 직선이 무한을 은유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직선이라는 개념이 제기하는 핵심적인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직선은 사실 ‘직선’이 아닙니다. 빛의 광선(rayonnement lumineux)을 예외로 한다면 말이죠. 우리는 그 빛의 광선이 직선을 보여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보여주지 않습니다. 최근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따르면, 그 광선은 굽어진 것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즉, 광선 자체가 스스로 굴절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짧은 인지 범위에서는 그것이 직선처럼 보이더라도 말입니다. 즉, 직선처럼 보이는 그 광선은 실제로는 굽어 있는 것이며, 단지 겉보기에만 직선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때때로 굽는 직선”이라는 개념은 도대체 어떻게 사유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결국 제가 ‘실재’라는 개념을 통해 제기한 문제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이 개념은, 우리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게끔 만듭니다. 예컨대 레닌(Lénine)이 제기했던 바로 그 질문 말입니다. 즉, 직선이라는 것이, 표현 그대로, 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레닌은 이 생각을 그의 고유한 은유로 끌어들였고, 그 은유는 다음과 같은 기반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의 막대기조차도, 그리고 막대기는 대개 ‘직선’의 이미지로 간주되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막대기라는 이유만으로도 굽을 수 있으며, 동시에 그것은 다시 ‘펴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펴진다(redressé)”는 이 말의 의미는, 제가 이미 제시한 바 있는 보로메오 매듭 속에서, 두 개의 직선이 명확하게 개입되는 방식으로 구성된 구조에서, 어떤 쓰임새를 가질 수 있을까요? 바로 그것이 지금 우리가 던지고 있는 질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질문의 핵심입니다. 빛의 광선이라는 단거리 기준을 제외하고 나면, 직선을 정의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두 점 사이의 가장 짧은 거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습니다: 어떻게 두 점 사이의 가장 짧은 거리를 알 수 있단 말입니까?
질문 V
“저는 항상 당신이 말의 중의성(équivoque)을 활용할 거라 기대합니다. 당신은 ‘하나가 있다(Y a d’l’Un)’고 말하셨고, 실재(le Réel)를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당신은 Un-possible(하나-불가능)이라는 어휘에 힘을 실어주지는 않으셨습니다. 조이스에 대해 말씀하실 때는 ‘강요된 말(paroles imposées)’에 대해 언급하셨고… 또한 당신은 ‘아버지의 이름(Nom-du-Père)’을 Un-posé(하나로서-주어진 것)으로 해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건 정말 ‘서명된 것’ 같은 질문이군요. 누가 그렇게 항상 제가 ‘신성한 중의성(équivoques saintes)’을 가지고 놀 것이라 기대한답니까? 저는 그런 신성한 중의성에 특별히 집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탈신비화한다고 생각합니다. Yad’l’Un—그 하나(Un)는 분명히 저를 곤란하게 만듭니다. 저는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잘 알려져 있듯이, 하나는 숫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저는 때때로 그 점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저는 실재를 ‘불가능한 것(l’impossible)’이라 부릅니다. 왜냐하면 실재란, 적어도 제게는—혹시 이것이 제 증환이라면 말씀해 주세요—법칙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실재는 법칙의 부재를 포함합니다. 실재에는 질서가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언젠가 제가 여러분 앞에서 명확히 풀어낼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제가 ‘실재의 조각(bout de Réel)’이라 부른 어떤 것에 관한 것일 것입니다.
질문 VI
“최근 몇 년간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순적 소동(remue-ménage contradictoire)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웃음]
(역자주) 1976년 천안문 사건(중국어: 天安門事件) 또는 제2차 천안문 사태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 1976년 4월 5일에 있었던 군중 반란으로, 문화 대혁명 이래 마오쩌둥 사상의 극좌적 절대화 풍조와 마오쩌둥 식 가부장적 체제에 대한 중국 인민의 저항이 나타난 사건이었다. (출처 : 위키백과)
질문 VII
“점(point)은 세 평면의 교차로 정의됩니다. 그렇다면 점은 실재적인 것입니까? 점들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획의 글쓰기—즉 ‘획(le trait)’은 실재적인 것입니까? 제가 말하는 ‘실재적인 것’은, 물론, 당신이 이해하시는 의미에서입니다.”
여기 질문지에도 그렇게 적혀 있군요: “당신이 이해하는 의미에서.” [웃음]
“점이 세 평면의 교차로 정의된다”는 말, 그 자체로도 충분히 제기될 만한 가치가 있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던져진 질문—“그 점은 실재적인 것인가?”—은 매우 적절합니다.
제가 ‘보로메오 사슬’이라 부른 구조에서는, 그 안에서 ‘응집(consistance)’하는 모든 것들 사이에 어떤 공통된 점(point commun)도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필수입니다. 이 전제는, 점 자체를 실재로부터 배제합니다. 실재에 대한 형상화가 오직 이러한 가정—즉 어떤 교차점, 분기점(‘Y’자형 접속), 혹은 연결이 없다는 가정—을 통해서만 성립한다면, 그 실재에는 점이라는 요소가 포함되지 않습니다. 질문해 주신 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질문 VIII
“당신이 말씀하신 ‘상수(constante)로서의 수’는, 그것이 맞다면 [웃음], 남근(phallus) 혹은 남근적 기능(fonction phallique)과 관련이 있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해, 제 생각이 단지 하나의 증환에 그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근이 프로이트가 말했던 ‘에네르게틱(energetic)’의 기반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프로이트 본인조차 그것을 그렇게 동일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덧붙이자면) 누군가가 저에게 중국어로 무언가를 써주셨는데,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아니, 일본어였군요! 작은 문자들이 눈에 익습니다. 가능하다면 그걸 써주신 분이 번역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질문 IX
“당신은 아나키스트(anarchiste)입니까?”
절대 아닙니다!
질문 X
“어떤 응답이, 하나의 사유(elucubration)로부터 출발하여 그 응답 자체를 하나의 증환으로 정의하게 된다면, 그 응답의 지위는 무엇입니까?”
제가 조금 전에도 언급했던 바로 그 점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즉, 그것은 무의식의 사유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아마 눈치채셨겠지만, 저는 ‘증환’을 무의식의 사유와 동일한 수준에서 다루기 위해, 그 수준을 조금 낮추었습니다. 말하자면, 증환이 무의식과 하나의 매듭으로 형상화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제가 아까 전제했던 바로 그 내용이 이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증환’을 환원한 것은, 그것이 더 이상 무의식의 사유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 무의식의 현실(réalité) 자체에 대한 응답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이처럼 설정되었을 때도, 이는 '제3의 항(troisième terme)'을 전제로 합니다. 그 제3의 항은—두 개의 고리, 즉 이름 그대로의 ‘끈의 고리(ronds de ficelle)’—를 서로 분리된 채로 유지시켜주는 것입니다.
이 제3의 항은 어떤 것이든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증환이 실재의 등가물로 간주된다면, 그 상황에서 제3의 항은 상상계(Imaginaire)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프로이트의 이론 전체를, 이 상상계—즉 ‘신체’—가, 증환의 고리와 상징계의 고리를 분리시키는 작용을 한다는 이론으로 구성할 수도 있습니다. 즉, 제가 여기서 구성한 매듭, 곧 증상과 상징의 매듭 전체를 ‘신체’라는 상상계가 중재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 질문을 보내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그나저나, 질문 중에 이런 것도 있었군요:
질문 X (보충)
“당신의 ‘휘어진 시가(cigare tordu)’는 당신 실재의 증환입니까?” [웃음]
틀림없이 그렇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제 ‘휘어진 시가’는 제가 아까 질문했던 바로 그 ‘휘어진 직선(droite tordue)’과 가장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둘은 같은 이름을 공유하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