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내게 가장 좋아하는 동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고등학교 때까지 나는 사자, 호랑이, 아니면 독수리와 같이 강하고 멋지며 남들에게 인정받는 그런 동물들을 열거해 나갔다.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선생님께서 학생들에게 각자 그리고 싶은 동물을 말해보라고 하셨던 순간이 기억에 남는다. 이름이 ‘장’씨라 교실 뒤쪽에 앉아있던 나는 친구들이 어떤 동물을 그리고 싶어 하는지 들어보며 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비, 강아지, 고양이, 사슴 등 다양한 동물들을 말하는 친구들을 보며 이미 사자로 정하고 사자 자체가 되어있던 나는 친구들을 군림하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상상을 하며 속으로 호탕하게 웃었던 적이 있었다. 자신이 그리고 싶은 동물이 곧 자기와 닮은, 혹은 되고 싶은 동물의 모습이라고 심리학적으로 분석을 마친 초등학생이었다. 정작 나의 그림 실력이야말로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교실 뒤편에 앉아 의자를 살짝 기울인 채 팔짱을 끼고 앞쪽에 앉은 친구들을 동정심을 가지고 바라보던 나의 눈빛은 내가 보진 못했지만 훤하다.
시간이 흘러 현재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물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되묻는다면 나는 카멜레온이라고 말할 것이다. 어렸을 때는 관심도 가지지 않고 긴 혀를 가지고 파리만 먹던 동물로 기억하는 카멜레온은 지금 보면 참으로 매력적이고 닮고 싶은 동물이다. 카멜레온의 특성은 어떤 자신의 본 모습을 숨기고 자유롭게 주변 환경에 맞춰 신체의 색깔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먹이를 사냥할 때나 혹은 반대로 자신을 먹이로 노리는 동물로부터 보호색을 띠며 유리한 고점(?)을 차지한다. 신체의 색깔이 변하는 이 특성은 어떻게 보면 특이하다 못해 이상하다고 생각이 든다. 사자의 갈퀴, 표범의 무늬, 원숭이의 긴 팔 등 모든 동물이 각자 가지고 있는 신체적인 특징은 있지만 카멜레온은 왠지 모르게 특징보다는 특성이라고 불러야 할 것만 같고 뭔가 동물 체계에 맞지 않는 외딴 생물체인 것 같다. 보면 볼수록 신기해서 오히려 유니콘이 더 존재할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동물이다.
카멜레온의 특성을 한 단어로 표현해 본다면 ‘숨김’이라고 할 것 같다. 자신의 본모습은 숨긴 채 어떤 목적을 가지고 피부색을 바꿔가며 숨는 모습이 멋지게도 보였지만 때로는 괜히 마음 아프기도 했다. 생명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아쉬울 것도 없지만, 인간이 침범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에서는 죽더라도 고유의 모습을 지닌 채 죽는 것이 아름답게 다가왔고 카멜레온은 그렇지 않고 굳이 표현하자면 다른 동물로 변하여 죽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미술 시간에 친구들이 그리고 싶은 동물이 곧 자기와 닮은 동물일 것이라는 명제를 내게 대입한다면, 상황에 맞게 다르게 대처하는 나의 모습이 내 스스로가 보기에 점차 내 모습은 사라져가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어서 어쩌면 현재 나는 카멜레온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기 연민일지도 모르는 나에 대한 성찰은 사실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카멜레온은 자신의 신체에 색의 변화를 주는 것을 스스로 결정한다. 어떤 물체에 닿기만 해도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특정 물체의 색으로 변하기를 자처한 것이다. 그 점이 나와 가장 닮았고, 앞으로도 닮고 싶은 부분이다. 나는 어렸을 적에 성격이나 성향이 확고했다. 어느 정도 고집이 있었다. 특히나 사람 관계에 있어서는 ‘나’ 중심으로 모든 상황이 돌아가듯이 여기며 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세상에는 ‘나’가 아닌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 시선을 나로부터 떨어진 무언가로 옮기며 살아가는 삶은 상당히 다른 색깔을 띤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로 매번 다른 색깔을 만나며 직접 만지기도 해보고 내 몸에 그 색깔을 묻히기도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내 본연의 색깔이 드러나지 않기 위해 때로는 색을 더 많이 덧칠해야 하기도 해야 했다. 부정적인 마음을 포함해 남들에게 들켰을 때 그다지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는 그런 모습을 가리기 위해 노력했다. 적지 않은 감정의 소비와 나의 의지적 결단이 모여 점차 다양한 색을 입는 나를 만들어 갔고, 현재도 전에는 보지 못한 색을 만나며 스스로 카멜레온이 되기를 자처하고 있다. 어느 날은 나의 이런 노력을 누가 알아주기를 바랐다. 고통의 시간은 결국 열매를 맺으며 힘들었던 그 시간들은 미화되어 추억으로 자리 잡을 것을 알았다. 단지 어려서부터 사자를 좋아했던 나로서는 이 바램이 나의 욕심이 되는 순간 입혀 놓았던 색은 다 사라지고 내 색깔이 다시 뚜렷하게 보일 것을 알았기 때문에 스쳐 지나가는 푸념 정도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느 색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매일 다른 색을 칠하기를 좋아하는 내가 되기를 기대한다. ‘이 정도면 됐지’ 라고 생각하며 칠하기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칠하기를 반복하며 붓질하는 실력도 늘려가고 사용하는 물감도 질을 높이며 한층 여유 있는 사람이 되는 나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