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일 Oct 06. 2022

교육


*이 글은 2021년 5월에 썼던 일기를 바탕으로 썼습니다.



추운 겨울이 지나 분홍빛 벚꽃이 필 때 즈음, 작년 11월부터 돈가스 집에서 일하며 손가락에 잔뜩 생긴 습진 때문에 망가진 내 손을 핑계로 앞으로는 경제적인 것보다 교육적으로 생산적인 일을 하리라 다짐을 하며 퇴직서를 내고 영어 학원에 일자리를 구했다. 아름답게 핀 꽃과 새로 시작한 일이 무슨 관련이 있겠냐 묻는다면 되려 할 말은 없지만 나보다 한참 젊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모습이야말로 이제 막 핀 꽃과 닮았다고 할 수 있겠다. 




중학생부터 올해 수능을 보는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까지 공부하는 이 학원에서 나는 학생들에게 독해를 가르치면서, 수업 이후 자습시간에는 문제 풀이와 단어 시험을 봐주는 일을 하고 있다. 정규 수업이 끝나고 피곤한 눈을 겨우 뜨며 자습실로 들어오는 학생들은 언제나 봐도 귀엽고 아련해 재워주고 싶지만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정신 차리고 공부할 수 있도록 독려해야 하는 것이 22살 어른이자 선생님의 사명임을 자각하며 무거운 마음으로 졸지 않도록 사탕을 주고는 한다. 




수업을 가르칠 때나 자습시간에 감독을 하다 보면 아무래도 마음이 더 가고 챙겨주고 싶은 학생들이 생기는데, 요새는 나에게 자기들 얘기를 정말 많이 하는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이 내 눈에 유독 띈다. 다섯 명이서 항상 같이 다니는 이 무리는 남자아이 한 명과 여자아이들 네 명으로 이루어져 있어 남자아이 한 명이 여자아이들 네 명에게 가끔씩 집중 공격(?) 받는 모습이 꽤나 콩트를 보는 것 같아 가끔은 나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에 껴들고는 한다. 그러다 저번 주 즈음에, 날이 풀리면서 보이지 않던 날벌레들이 날아다니기 시작한 화창한 날에 아주 작은 나방 한 마리가 창문을 통해 교실로 날아들어왔다. 




경험상 교실에 벌레가 날아들어오면 벌떡 일어나 문밖으로 뛰쳐나가거나 소리를 지르는 학생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해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귀를 막았다. 그러나 예상외로 학생들은 덤덤하게 벌레가 눈앞을 지나가도 무시하며 하던 대화를 마저 이어 나갔다. 마침 나중에 이루고 싶은 꿈 얘기를 하며 한창 다들 생각에 빠져 있던 터라 나방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 한 여학생이 날아가는 나방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나중에 유기견과 유기묘를 돌보는 일을 하고 싶어.” 그리고 나서는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 “선생님 저는 꿈은 아니지만 아픈 동물들을 돌보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순간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아픈 동물들을 돌보는 사람이 되는 것만큼 꿈같이 아름다운 일이 없지 않나?’, ‘꿈이라는 단어가 아이들에게 어떻게 다가와지는 것일까?’. 나의 생각을 뒤로 한 채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왜 꿈이 아닌지 되묻자 그 학생은 직업으로 가지고 싶지 않다고 답변을 했다. 




대개 꿈이라는 단어는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하고 싶은 일을 말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업이라는 단어를 대신해서 꿈이라고 말한다. 그 암묵적인 규칙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뚜렷해지고 나이가 어느 정도 들고나면 꿈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생각나지도 않는다. 멀게만 느껴지는 꿈을 꾸기 보다 마주하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급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유치원을 다녔을 때가 기억이 난다. 반에서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나중에 뭐가 되고 싶은지 물으면 정말 다양한 직업을 아이들은 손을 들며 외친다. 그리고 꿈이 무엇인지 이어서 아이들에게 물으면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거나,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오목조목 설명한다. 아이들에게 꿈은 명사형이 아니라 동사형이다. 직업은 직업일 뿐, 꿈을 이루기 위한 도구는 될 수 있지만 자신들의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감성, 소망 등을 내포한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결과물만 요구하는 현대 사회를 경험하며 나이가 들수록 어쩌면 삶의 기쁨이 되고 원동력이 되는 꿈과 같은 장치 들은 점차 멀어져만 간다. 




영어교육과를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최근 들어 교육사회라는 교직 수업을 수강하고 있다. 교육학을 연구한 선대 학자들의 주장을 공부하면서 어느 학자가 주장한 내용이 기억이 난다. “사회는 교육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다.” 이 주장에 반대하는 학자도 여럿 있었지만, 학자는 아니어도 학도생은 되는 나로서 그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결과를 중요시하는 사회의 현상은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너무 방대한 양의 이야기들을 이어가야 하기에 생략하고 학도생의 명분으로 현대 사회가 중요시하는 바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그래서 그게 밥 먹여주니?” 인 것 같다. 희망, 꿈, 사명과 같은 단어들은 분명 좋은 말이다. 하지만, 그런 표현들이 이성적으로 여겨지지 않고 낭만적으로 들리는 이유는 세상과 사회는 앞서 말했듯이 결과 중심적이다. 그리고 나 중심적이다. 반대로 그런 낭만적인 표현들은 대체로 남 우선적인 경우가 많다. “배고프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옷을 지어주고 싶어요.” 등 분명 같은 직업, 혹은 꿈이더라도 남에게 초점을 맞추는 일들은 대개 부와 명예를 얻기 쉽지 않다. 재정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이 자선단체를 세우거나 기부활동을 이어가는 것 또한 귀한 일이지만, 평생을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것과 같다. 현대 사회를 보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먼저 자신들의 필요를 채운 뒤에 남의 필요를 돌볼지 말지 결정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자신의 상황이 여의치 않더라도 남을 돕는 사람들은 안타까운 시선을 받거나 반대로 매우 훌륭한 사람으로 보이며 다소 상반된 반응을 얻게 된다. 




앞서 언급했던 학자의 주장을 내 방식대로 응용해 보았을 때, 사회의 현상이 교육에 영향을 주지만 가장 이상적인 순서는 교육이 사회의 현상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세상은 공동체 생활이다. 다시 말해 나 혼자 잘 산다고 해서 세상은 풍성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의 본연은 혼자 있기 보다 같이 있는 것을 추구한다. 결국 희생과 헌신은 이 세상에 필연적인 요소인 것 같다. 분명 현실적으로 바라보았을 때, 마냥 낭만에 속하는 일들로만 세상이 굴러가지는 않는다. 경제가 돌아가고 세계의 나라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때론 스스로를 돌보아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어느 한 축이 필수적이면 다른 한 축은 부가적인 요소라고 받아들이기보다 세상은 낭만과 현실이 균형을 이룰 때 가장 아름다움을 우리는 아기 때부터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교육은 지식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길을 걸어간 선생 된 도리로써 내가 걸어간 가시밭길을 따라오지 않도록 발에 피가 나더라도 가시를 눌러주어 평평하게 길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변화가 변화를 낳는다는 말이 있듯이, 어른들이 만들어준 평평한 길을 걷다 보면 그 길 끝에서 어른들이 보지 못한 새로운 가시밭길을 향해 걸어갈 수 있다. 그렇지만 만일 참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발걸음이라면, 새로운 가시밭길을 밟을 즈음에는 그들도 발에 힘을 주고 가시를 누르며 그 길을 걸어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누구보다 순수한 마음을 지닌 30살의 Joey. 출처:Pinterest




이전 06화 숨김_카멜레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