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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우 Oct 18. 2022

나만 몰랐던 이야기

1장. 3화.

"갑자기요? 집을 왜요? 아니, 잠시만요. 지금 저 나가라고요? "


그가 뱉은 말의 뜻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정확히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물었다. 돈이 없어진 날,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세고 또 세고 다시 세었던 것처럼 나는 이 상황을 바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한마디로 인지가 존나게 부조화했다는 말이다.


어떤 악인일지라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최소한의 변명 정도는 할 텐데… 사람이 어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단 말인가. 혹시라도 내가 그를 의심하고 있다는 걸 들킨 것은 아닐까? 빠르게 기억을 헤집어 찾아봤으나 이렇다 할 여지를 준 적도 딱히 없었다.


"아니, 형, 제가 뭐 잘못했어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아버지가 오신대요.”


재환이 당황해하는 나를 보고 태연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한국에 계신 아버지가 잠시 호주에서 머문다고 하셔서 방 하나를 비워야 해요. 히라는 상우 씨보다 먼저 들어왔고 학교도 다녀야 하니까 상우 씨가 이해 좀 해줘요. 2주 뒤에 아버지 오신다니까 그전까지 집 알아보셔야 할 것 같아요.”


확실하게 못을 박는 재환의 말에 눈앞이 깜깜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만에 하나, 말 그대로, 만 가지 경우의 수 중 딱 하나, 아버지가 오신 다는 말이 사실일지라도 내 사정을 뻔히 알면서 히라를 남겨둔 재환의 결정이 참 야속했다.


“형, 근데 아버지께서 오신다는 전화를 언제 받으셨어요?”


“아… 그게… 사실 좀 되기는 했어요. 바로 얘기 못해줘서 미안해요.”


“아이, 그건 아니죠. 그런 상황이었으면 바로 말씀을 해주셨어야죠. 2주 안에 집을 어떻게 구해요.”


“아니, 사실 제가 미안해할 일도 아니에요. 여기서는 다들 그렇게 해요. 2주 드린다니까요?”


맞는 말이다. 퇴실 통보를 하는 방식에 있어서 그가 잘못한 것은 딱히 없다. 호주에서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집을 비우라고 통보할 때 2주 정도 기간을 준다는 것은 한국을 떠나기 전, 사전조사를 할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는 내 돈을 훔치고 나를 내쫓았다. 먹을 만큼 먹었으면 눈 꼭 감고 돌아설 줄 알았는데 재환은 생각보다 더 잔인했다.


“아, 일단 알겠어요. 저 다 마셨어요. 가시죠.”


분을 도저히 삭일 수가 없어 티를 팍팍 내며 먼저 차에 올랐다. 차 안에서 기다리는 나를 두고 남은 음료를 끝까지 꾸역꾸역 마시던 재환도 차에 올랐다.


집 가는 길이 참 멀었다. 박힌 가시를 뽑아냈을 때처럼 후련해 보이는, 어쩌면 살짝 들뜬 것 같기도 한 재환을 보고 나는 확신했다. 이 새끼가 내 돈을 훔친 범인이다. 그는 운전하며 평소 좋아하던 삼국지 얘기를 떠들어댔다.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몸은 힘들고 머리는 복잡했다. 일단 집에 가서 샤워부터 하고 맑은 정신으로 계획을 세워보자.


라고 마음먹었지만 지칠 대로 지친 약 141근의 몸뚱아리는 의지와는 다르게 침대에 파묻혔고 잠에 드는 것을 자각할 틈도 없이 의식이 끊겼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했다. 고된 일에 지친 신체에는 지친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일요일, 잠에서 깬 채로 몸을 일으키지 않고 누워만 있었다. 어제 그의 통보는 나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될 놈은 길에서 똥을 지려도 된다는데 안될 놈은 뭘 해도 안된다.’는 말이 떠올랐다. 악재에 악재가 겹친 것으로 보면 나는 후자에 가깝다. 어차피 뭘 해도 안될 것이라는 생각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괜히 방 밖으로 나가 재환의 쌍판때기를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른 오후, 모두 나간 듯 기척 없이 고요했다. 처한 상황이 똥보다 못한데 그럼에도 몸은 정직해 배가 고팠다. 어기적 어기적 주방으로 향해 베이컨을 구워 요기를 하고 집 밖으로 나가 미리 말아두었던 담배를 태웠다. 어젯밤 잠들기 전에 태운 담배가 마지막이었으니 꽤 오랜만에 태우는 담배인데도 맛이 없었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 세입자를 구한다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게시글을 잠깐 훑었다. 역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루 종일 들여다본 핸드폰에 충전기를 연결하길 벌써 세 번째. 핸드폰 뒷면이 뜨거웠다. 방문을 살짝 열어 모두가 잠들었음을 확인하고 조용히 움직여 화장실로 향했다. 양치만 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와 잠을 청했으나 마음이 심란해 쉽게 잠들 수 없었다. 뜬 눈으로 사건을 복기했다.


재환은 내 돈을 훔친 범인이 밖에서 들어왔을 것이라 말했다. 외부인이 침입해 잠겨있던 방 문을 생채기 하나 없이 아주 깔끔하게 열고 역시 아주 깔끔하게 침대 밑을 뒤져 내 돈만 쏙 빼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재환이 나를 내 쫒은 이유도 그가 범인이기 때문이리라. 같이 사는 사람의 돈을 훔치고 매일 뻔뻔하게 피해자를 마주할 수 있는 사이코패스들은 세상에 아니, 적어도 나의 짧은 인생사에서는 흔하지 않았다.


나이 서른넷 먹고 한참 어린 동생의 돈이나 훔치는 그에게, 탐욕에 눈멀어 일단 저질러 놓고는 매일 마주하기가 불편해 나를 내쫓은 그에게, 내쫓는 이유랍시고 한국에 계신 자기 아버지나 팔아 대는 덜떨어진 그에게 나는 당했다.


죽이고 싶었다. 어련히 잘 생활하고 있던 내 신상에 위해를 가한 재환도, 어설프고 멍청한 그에게 당한 멍청한 나도. 둘 다 죽이고 죽고 싶었다. 그러면 다 해결이 될 것 같았다. 내일 아침,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해야 하는 출근도. 재환이 훔쳐간 내 돈도. 이 주 안에 구해야 하는 집도 모든 것들이.




어려서부터 나는 절대자의 존재를 믿었다. 그것이 신이든, 하늘이든.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늘 그를 탓했다.

 

‘호주에도 신이란 존재가 있다면, 그 고귀하시다는 분께서 나를 고양이 쥐 몰듯이 내쫓는데… 그래, 씨바꺼. 끝내자. 1년 못 채웠다고 주변에서 비웃든 욕을 하든 나도 이제는 모르겠다.’


월요일 아침, 카페로 향하는 전철 안에서 나는 귀국을 결심했다.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오픈 업무도 시작하기 전에 아밋을 붙잡고 돈을 도둑맞은 것부터 집에서 쫓겨나게 된 것까지. 그간의 일들을 얘기했다.


“What the Fuck. Ass hole.”


아밋은 내 이야기를 듣고 욕지기를 내뱉었다. 그 욕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는 참 고맙게도 내가 다른 집을 구할 때까지 자신의 집, 방 한 칸을 내어 줄 테니 들어와 살라고 말했지만 이미 호주에 오만 정이 다 떨어진 나는 그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카페는 금요일까지만 출근하기로 했고 주중에 근무하며 마지막으로 일을 함께하는 직원들과 인사를 나눴다.

근무 마지막 날 촬영한 아밋과 나.


한국에 돌아가기로 마음먹자 시간이 멈춘듯했다. 가족들을 볼 생각에, 친구들을 볼 생각에 돈일 잃은 상실감과 워킹홀리데이에 실패했다는 패배감, 절망감이 조금은 사그라들었다. 돌아갈 내 고향 병천을 생각하면 설레기까지 했다. 초등학교 시절, 소풍 전날 느끼던 감정을 정말 오랜만에 느꼈다.




카페에서 마지막 근무를 마친 금요일, 일식집에 출근하기 위해 링우드 역(일식집과 인접한 역.)에서 사장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은 여자 사장님이 나를 데리러 오셨다. 인사를 하며 차에 올라타는 내가 의자에 다 앉기도 전에 여자 사장님은 지난주 토요일, 평소보다 일렀던 재환의 방문 때문에 듣지 못한 얘기를 다시 물으셨다.


“상우, 무슨 일 있지?”


“아… 일이 있기는 한데 그전에 죄송한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응. 뭔데? 말해봐.”


“저 한국 가려고요. 너무 힘들기도 하고 가족들도 보고 싶어서 예정보다 조금 일찍 가게 됐어요. 그래서 이번 주까지만 근무해야 할 것 같아서요.”


“응. 그래요. 그렇게 해.”


여자 사장님은 갑작스럽게 그만두겠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별말씀 없으셨다. 관심이 없나 싶을 정도로 너무 태연하게 받아들여 되려 당황한 쪽은 나였다. 역에서 사장님을 기다리며 그만둔다는 얘기를 최대한 기분 상하지 않게 전할 여러 가지 계획을 준비했는데 흔쾌히 알았다고 하시니 맥이 빠졌다.


“근데 일 있다는 거는 뭐야?”


여자 사장님이 다시 물었다. 겪은 그대로 얘기해도 될까 망설여졌다. 나는 재환을 믿었었다. 그는 내게 일자리를 소개해줬고 교통편을 자처하는 등, 사소한 배려를 연속했었다. 그러나 그랬던 그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여자 사장님 역시 호주에 자리 잡은 한국인. 과연 이 사람은 믿을 수 있을까. 분명 내가 겪은 사건이 여자 사장님 귀에 들어간다면 남자 사장님은 물론이요, 셰프님, 나아가 몇 달 전 나를 바래다주던 길, 차 안에서 내가 재환에게 내는 집세가 얼만지로 실랑이했던 초밥 여사님까지 모두가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후폭풍은 없을까…


씨바꺼, 있으면 뭐! 이들이 내게 내미는 손길이 도움의 그것이 아니라도 괜찮다. 어차피 나는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미 돈 잃고 시간 잃고 잃을 거 다 잃고 좆됐으니 재환아, 우리 이왕 좆 되는 거 같이 한 번 좆 돼보자.


“저 사실… 집에 숨겨뒀던 돈을 도둑맞았어요. 그리고…”


잠시 머릿속으로 사건의 인과를 다시 정리한 내가 입을 열려던 찰나.


“어쩐지… 무슨 일 있는 것 같다고 초밥 여사님이 계속 말씀하시더라고. 그나저나 걔 진짜 어떡하니? 걔 왜 그러지?”


여자 사장님이 치고 들어왔다.


“걔요? 걔가 누군데요?”


“어휴… 누구긴 누구야. 재환이지, ”


나는 분명 언급한 적이 없는데 여자 사장님의 입에서 먼저 '그 이름'이 나왔다. 물증 없이 심증만 있으니 재환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아사 모사하게 사건을 서술해 여자 사장님이 그를 의심하게 만들려는 계획이었다.


내가 뱉은 말은 일식집 멤버들에게 전달될 것이고 그것은 물에 담근 건미역처럼 불고 불어 장차 소문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소문이 작디작은 멜버른 한인 사회에서 재환의 이미지와 신용을 완전히 망가뜨리길 바랐다.


“재환이 형이 왜요?”


“너 여기서 일하기 전에 초밥 여사님한테 들었는데 재환이가 예전에 일하던 곳에서 같이 일하던 직원 주급 봉투를 훔치던 게 cctv에 찍힌 적이 있대. 일하던 식당 식자재 창고에서 고기 빼돌려서 걸린 적도 있고. 이쪽 한인 사회에서 유명하더라고.”


아이유가 부릅니다. 나만 몰랐던 이야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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