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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가는 길 - 향수 (1)

걷거나 타거나 (21)

by memory 최호인

1.


시골 마을은 대방동 거리에 비해서 자연 풍경만 다른 게 아니다.

집안 풍경도 큰 차이가 있었다.


그 당시 지경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으니, 밤이 되면 길가에 가로등은커녕 집에서 나오는 불빛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시골 초가집 방 안에는 윗목에 옷장 하나와 화로밖에 없었다. 밤에 어둠을 밝힐 수 있는 것이라곤 겨우 기름으로 태우는 희미한 호롱불 하나였다. 어린 내가 촛불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호롱불은 별로 밝지 않아서 밤에는 책도 읽을 수 없었으며, 어두침침한 방 안에 같이 앉아 있는 큰아버지의 얼굴마저 어슴프레 보일 뿐이었다.


서울에 있었다면 밤이 되어도 TV를 보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책을 보거나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혼자서 바둑알을 병정 삼아서라도 놀 수 있었겠지만, 시골에서는 그 가운데 가능한 게 하나도 없었다. 길고 고요한 겨울밤에 시골에서 할 일이라곤 기껏해야 화롯불에 감자를 구워 먹거나 귀신 이야기나 들으면서 시간을 죽이는 것밖에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나는 이른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 방바닥에 엎드려서 방학숙제를 한다고 책을 펴놓은 채 뒹굴거리기만 했다.


그 밤에 누군가 말을 하지 않으면 어두침침한 방안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그 고요함을 달래는 것은 문밖을 휘젓는 겨울바람 소리와 큰아버지가 이따금 화로에 곰방대 재를 떨거나 화로에 담긴 숯과 재를 들쑤시는 소리였다. 외양간에 있는 소가 움직여서 그런지 이따금 소 목에 달린 방울이 딸랑거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눈 내리는 밤에 시골은 더욱 적막했고, 초가집 지붕과 마당에는 소리도 없이 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화로에 있는 숯들의 표면은 모두 잿빛으로 변하여 마치 불이 죽은 듯 보였다. 그러나 집게로 그 안을 쑤셔 보면 숨어 있던 뜨거운 불의 기운이 본연의 붉은 색깔을 어김없이 드러냈다. 그것은 죽음 같은 적막 속에서 거의 재로 변한 숯불이 자신이 아직 살아있음을 나타내는 표시와 같았다. 그것은 오늘날 전원주택의 벽난로에서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과는 전혀 비교할 형편이 아니지만, 그 겨울 웃풍마저 심했던 시골 방에 화롯불이라도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다행이었던가.




그러던 어느 날, 밤늦게 밖으로 나가야 할 때가 있었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누군가 막대기에 달린 유리 상자 안에 호롱불을 담고 나갔다. 호롱불은 유리상자 안에 있었는데, 걸을 때마다 막대 끝에 달린 호롱불이 춤을 추는 듯했다. 나는 혹시라도 바람이 세게 불어서 호롱불이 꺼질까 봐 걱정했다. 걷느라 그런 건지 바람이 불어서 그런 건지 호롱불이 계속 흔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어둠 속에서 호롱불은 빛을 잃지 않았다.


서울이라면 어둠을 밝히는 가로등이 있었을 테고, 그렇지 않다 해도 우리는 건전지를 넣은 랜턴을 사용했을 것이다. 지경에서는 그런 랜턴을 보지도 못했지만, 그런 것이 있다 해도 건전지를 사는 것이 어려워서 사용할 수 없을 터였다. 호롱불을 단 막대기를 들고나가면 그것으로는 겨우 발을 딛는 길바닥만 비추면서 걸을 수 있었을 뿐, 그 빛으로는 멀리 내다볼 수는 없었다.


주위는 온통 캄캄해서 낮에는 잘 보였던 길 옆 초가들과 시냇물과 집 뒤에 있는 산들이 형체를 전혀 알 수 없는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주변이 모두 캄캄한 가운데 졸졸 물 흐르는 소리만 들려서 어둠 저편에 시냇물이 흐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늘에는 어슴프레 달빛과 별빛이 흐르고 있어서 산과 하늘의 경계선만 흐리게 보였다. 그래도 겨울에는 눈이라도 내려서 대지가 하얗게 뒤덮이면 그나마 밤길을 잘 구별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맑은 밤 먼 하늘에 성긴 별들은 깜빡거리면서 빛났지만, 어두운 시골길을 밝히기에는 너무나 희미했다.

나는 두고두고 떠올리곤 했다.


시골 사람들은 그 긴긴 겨울밤을 어떻게 보낼까.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겨울마다 내가 그렇게 한 달씩 살다 왔는데도 나는 그 시절 시골의 적막강산에 대한 낯섦과 궁금함을 지울 수 없다. 자연과 대지가 모두 느릿하고 느긋하니 그곳에 있는 사람들도 느릿하고 느긋했다. 대도시에서 바쁘고 빠르게 지내던 사람이 그곳에 간다면, 누구라도 그 느릿하고 느긋한 적막강산에 적응하기 위해 필연코 먼저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이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텔레비전을 볼 일도, 라디오를 들을 일도 없었다. 방안에 하나뿐인 호롱불은 너무 어두워서 책을 읽을 수도 없었다. 겨울밤, 산골에 있는 마을에는 밤이 무척 일찍 찾아왔다. 마을을 둘러싼 산 뒤로 해가 지기 전에 사람들은 모두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희미한 호롱불 아래서 이른 저녁을 먹고 길고 긴 밤을 보내야 했으므로 사람들은 구들장이 뜨거울 때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것이 그들이 일찍 일어나는 이유이기도 했다.




2.


지경 마을에는 먹을 음식도 변변치 않았다.


아마 겨울이고 충청북도라서 더 그랬을 것이다. 바다를 접하지 않는 지역이라 생선을 먹는 것은 아주 귀한 일이었다. 그들은 주로 산과 밭에서 채취할 수 있는 나물을 먹었다. 그러나 그것도 봄과 여름에 하는 말이지, 겨울에는 나물도 없었다.


내가 그 겨울에 주로 먹은 것은 가마솥으로 지은 보리밥과 화롯불에 데워서 먹는 된장찌개였다. 어제 먹다 남은 된장찌개에다 새로 감자와 된장을 집어넣어서 오늘 다시 데워 먹었고, 또 남은 것은 내일 데워 먹을 것이었다. 먹을 것이 변변치 않다고 투정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었다. 생명을 잃은 듯 어두운 회색으로 변한 재를 뒤집으면 숨어있던 붉은 불이 다시 보이곤 했던 화롯불에, 사기로 만든 갈색 된장 그릇을 올려놓고 데우는 풍경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고모 집에서 내가 맛있게 먹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조청에 찍어 먹은 가래떡 또는 인절미였다. 그때는 조청이 귀하고 매우 달아서 나는 꿀과 같다고 생각하고 먹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꿀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조청은 액체로 된 엿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엿과 같은 달콤한 맛을 냈다.


“이거 달고 맛있는 거여.’

“이게 꿀이에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모 옆에 바짝 붙어 앉아서 고모가 조청이 담긴 그릇을 덮은 천을 들어냈을 때 그 안을 보면서 물었다. 끈적거리는 갈빛 조청을 종지에 뜨면서 고모는 대답했다.


“아니. 이건 조청이라는 거여. 이것으로 달콤한 엿을 만드는 거여.”

“끈적끈적한 게 풀 같은데 이게 엿이 돼요?”

“그럼. 이게 굳으면 맛있는 엿이 되는 거여.”


나는 챙챙 거리는 가위를 들고 리어카를 밀고 다니는 엿장수가 파는 엿판이 떠올랐다. 엿판에는 긴 가래떡처럼 생긴 엿가락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엿장수 아저씨가 리어카를 밀면서 대방동 우리 동네 골목 어귀에 나타나 커다란 가위로 챙챙 거리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면, 우리는 못 쓰는 고물을 찾으러 집으로 뛰어갔다. 삽이든 망치든 가위든 고물을 가지고 나와야 엿과 바꿔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엿을 먹기 위해 멀쩡한 가위며 철사며 삽까지 들고 오는 아이도 있었는데, 어른들은 멀쩡한 물건을 가지고 나간다고 그런 아이를 혼냈다.


고물이 없으면 할 수 없이 서랍에 숨겨두었던 동전이나 돼지 저금통을 털어서 동전을 가지고 갔다. 엿장수 아저씨는 우리가 가지고 온 고물을 보고, “이딴 걸 버리지, 뭐에다 쓰냐”고 핀잔을 주면서 머쓱해하는 아이에게 그야말로 엿장수 마음대로 엿가락 길이를 정하고 챙챙 거리던 가위로 탁 쳐서 잘라 주었다.


그 엿을 받은 아이들은 환한 얼굴이 되어 엿치기를 했다. 엿치기란, 엿가락을 잘랐을 때 보이는 공기구멍의 크기를 겨루는 게임이다. 구멍이 작은 아이가 엿 값을 대신 내기도 했고, 자기 엿을 조금 잘라 주기도 했으며, 꿀밤을 맞기도 했다. 이랬든 저랬든 결국 아이들은 모두 오랜만에 맛보는 엿을 손에 쥐어 들고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고모의 말을 듣고도, 나는 큰 그릇에 담긴 조청에서 마른 엿을 떠올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조청을 처음 보았기 때문에 그것이 그저 꿀과 같다고 생각했다. 참기름이나 꿀보다 끈기가 심한 그 갈빛 조청은 아마 시골에서 거의 유일하게 단 맛을 내는 먹거리였을지도 모른다.




밤새 방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면서 아궁이에 나무를 잔뜩 때야 한다. 그래야 구들장이 뜨거워진다. 고모는 그렇게 타고 남은 뜨거운 숯을 화로에 옮겨 담았다. 그 화로를 방안에 갖다 놓아야 차가운 방 안의 공기를 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웃풍이 심해서 그런지 아궁이에다 그렇게 나무를 땠는데도 아랫목만 뜨거웠지 윗목은 냉기가 가득했다. 그러나 그 뜨거운 아랫목도 새벽이 되면 거의 다 식어서 미지근한 기운만 남았다.


시골에서는 몸을 씻거나 세수하는 것도 큰 문제였다. 여름에는 시냇물에 가서 씻었는지 모르지만, 겨울에는 물이 차가워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서울 우리 집에는 수도가 아니더라도 우물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지경 큰아버지 집과 괴실 셋째 고모 집에는 우물도 없었다.


겨울 아침에 뜨거운 물로 세수하려면, 아마도 새벽에 아침밥을 하면서 다시 장작을 때서 가마솥에 물을 데워야 가능했다. 지저분한 부엌 한쪽에는 아궁이 불을 때기 위해 잘라 놓은 나무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부엌 천장과 벽은 아궁이에서 빠져나온 그을음으로 인해 거뭇거뭇해 보였다.


아침에 내가 일어나면 큰어머니나 고모는 부뚜막에 있는 큰 솥에서 데워진 물을 대야에 담아 주었다. 나는 냉기가 가득한 마당으로 나가서 그 물을 아껴 쓰면서 겨우 고양이 세수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나는 그 시골에서 사람들이 겨울에 어떻게 목욕을 하는지 의아할 뿐이었다.


어린 나는 저녁을 먹고 나서 아무것도 할 게 없어서 잠이 들 때까지 멍하니 화로를 들여다보거나 아랫목에 발을 들이밀고 누워서 호롱불을 보면서 뒹굴거렸다. 큰아버지는 연신 곰방대만 입에 물고 있었고 아무 말도 없이 화로에 눈길을 주었다. 낮에 뛰어노느라 힘들었는지, 나는 누워서 희미한 호롱불만 바라보다가 어느새 까무룩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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