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 진짜 교육인가?

시골 크리스천 대안학교에서 희망을 보다

by 자유인

몇 해전 슈밥이 다보스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과 기술에 대해 언급한 후, 한 동안 교육계도 요동을 쳤다. 교육 관련 행정 문서 어디서나 쉽게 '4차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한 변화의 방향과 길 찾기에 대한 논의가 한창 진행되었다. 그러다 코로나 팬데믹을 맞이했고 오프라인의 대면교육과 온라인의 비대면교육 체계를 동시에 모든 교육 주체가 탑재해야만 살아낼 수 있는 대혼돈이나 대변혁의 시간을 보냈다.


해외에서부터 국내에 이르기까지 코로나 엔데믹으로 가는 길 끝자락에 또 한 번 교육계를 뒤흔드는 새로운 기술이 등장했다. open AI가 만들어낸 Chat GPT가 그것이다. 요즘은 AI 기술을 적용한 다양한 애플리케이션들이 나와서 강의 준비에도 변화가 생겼다. 지난 학기에 노인복지론을 강의하기 위해 학생들에게 수업 개요를 담은 동영상 보여 주었는데, 그 영상을 만드는 데 내가 소요한 시간은 15분 남짓이다. 가르치는 것도 배우는 것도 그냥 쉬워진 것이 아니라 무지하게 쉬워진 것 같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자주 들어본 말은 고릿적 이야기가 됐고, AI의 진화는 1년 전에 비하면 천지가 개벽한 수준 같다. 실시간으로 인류의 지식네트워킹이 만들어내는 총량과 그것의 영향력은 한 개인이 따라갈 엄두조차도 낼 수 없다.


한편에서는 이렇듯 엄청난 기술이 산업의 흐름을 바꾸고 사회변화를 견인하는데, 정작 가정, 학교, 사회 전반의 삶의 현장의 속 교육의 모습은 질서가 깨어진 혼돈이 여전해 보인다. 가정에서 아이들의 부모의 사랑과 관심보다 스마트폰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집 앞에 초등학교가 있어서 등하교하는 아이들을 보면 어린아이들을 보면 오직 스마트폰의 세상에만 집중한다.


가끔 고등학교를 방문할 때가 있는데, 갈 때마다 수업을 듣는 학생들보다 엎드려 있는 아이들의 수가 더 많다. 학교는 본질적으로 사람을 키우는 교육의 기능도 중요하지만 숨어있는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돌봄 기능이다. 부모가 일하는 동안 자녀들은 학교라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있어서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가까운 지인들의 자녀 양육으로 속상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충분히 이해하고 양보하며 넘어갔던 일들이 '폭력'이라는 언어에 갇혀서 시시비비의 객관적 사실보다 '폭력'이라는 언어의 위력은 모든 상황을 삼켜 버리는 것 같다. 결국, 폭력의 행위자나 희생자도 상처와 절망, 때로는 자살로 이어지는 일을 미디어를 통해 쉽게 접할 지경이 되었다. 존대하는 의미의 '님'을 붙여서 칭하던 교육자는 '선생님'에서 '선생' 정도로 전락하여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한다.


대학에 몸 담고 있는 나 역시 상아탑의 위상이 무너지는 것을 실감하며 비통함을 느꼈던 시간도 이미 수년 전에 지나갔고, 어느 초등교사의 죽음을 보며 대학교수라는 위치도 사회적 권위가 추락하여 급박한 위기 가운데 처해질 것이라는 생생한 예감을 갖게 된다. 실제로 다소 무례한 학생은 기본이고, 무례한 학부모와의 실랑이로 속상했던 일화를 갖고 있는 동료 교수들도 종종 보게 된다. 이것은 누구도 탓할 수 없는 현실이다. 지식과 정보가 누군가의 고유한 전문성을 드러내던 시대는 이제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교육자도 예전 방식의 권위의식을 유지한 채 학생들을 바라봐서도 안 된다.


온라인에서 만난 유저들이 갖고 있던 지식의 조각들은 수십 년이 지나 인공지능을 탄생시켰고, 인공지능의 딥러닝의 속도와 그 양은 인간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러니 배워서 남 주자는 말도 통하지 않고, 나 혼자라도 잘 살자고 돈 많이 버는 직업을 보장하는 학과로 모두 내달리고 있다. 혹자는 학벌의 시대는 끝났다고 하지만, 또 누군가는 그런 인식의 틈을 노려서 공교육에서 자퇴해야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고도 한다. 결론짓기도 어려운 이런 혼란을 다양성으로 보면 희망이 될까 싶지만 어느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교육적 현실은 그런 미사여구로도 가려지지 않는 인간군상의 민낯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런 세상에서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 진짜 교육인가?


얼마 전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경북 경산시 소재의 크리스천 대안학교 : DICS)에서 학부모 간담회가 있다고 해서 다녀왔다. 회의 말미에 현재 12학년인 학생 한 명이 자신이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을 했다. 환경 문제에 따른 각종 재난 상황들이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는 이때, 그들을 돕기 위한 실시간 모금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고 있다는 프레젠테이션이었다. 발표한 학생은 자신이 왜 이런 프로젝트를 동료들과 기획했는지 그 동기를 설명하면서 자신들을 정성껏 교육하시는 선생님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놓치지 않고 담아냈다.


나는 이 학생의 프레젠테이션을 들으면서 진짜 교육은 이런 학생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다. 첫째, 소똥 냄새나는 경북 경산의 시골의 기숙학교에서 세계를 품는 것은 가능한 현실을 뛰어넘는 시선이다. 이것은 위기를 타개하고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과 연결된다. 둘째,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에서 동료들이 각자 어떤 역할에 독특한 재능을 갖고 있는지 발표자는 정확하게 설명하고 그것을 칭찬했다. 사람의 강점을 정확하게 알아보고 독려하는 것은 리더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자질이다. 셋째,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을 돕는 이 야심 찬 프로젝트가 단지 자신과 동료들의 성과가 아니라 그것을 가능케 한 선생님의 보이지 않는 영향력이 컸음을 이 학생은 잘 알고 있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실체로 가득하지만 그것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다. 이것은 한 발 앞서 세상의 변화를 예견하는 통찰력으로 자랄 수 있는 중요한 역량이 된다. 마지막으로, 진심 어린 감사를 표현하는 학생의 눈빛은 따뜻함이 묻어 있었다. 자신의 기여를 드러내내는 것을 넘어서서 감사할 줄 아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자아의 확장, 나아가 세상을 향한 선한 영향력으로 이 학생의 성장의 방향을 긍정적으로 조준하게 될 것이다.


교육의 열매로 학생들이 갖고 있어야 할 세계를 품는 시선, 리더로서의 자질,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 감사 등 이런 것들을 과연 지성으로 가르칠 수 있을까? 아마 가르칠 수 있으나 쉽게 휘발되고 체화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이 일이 쉬운 일이라면 적어도 한국이 입시지옥인 오명 속에 있진 않을 것이다.


대혼돈의 교육적 현실, 학생도 교사도 행복하지 않은 우리의 모습이 안타깝다. 내가 어렵게 선택한 대안학교에서의 자녀교육이 완벽한 해답이라고 선뜻 답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곳에서 만나는 학생들에게서 종종 나는 미래세대에 대한 밝은 희망의 빛은 보고 있다. 한국 사회 곳곳에, 세계 곳곳에 이런 숨은 역량을 키워낼 수 있는 대안학교들이 더 많이 생겨나기를 바란다. 세상은 이렇게 조금씩 힘든 시도를 한 누군가의 노력으로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변화될 것이라 믿는다.




keyword
이전 12화디지털미디어를 사용하지 않는 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