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살 된 초등 1학년부터 19살 고3까지 100명 남짓이 한 건물에서 교육을 받는 크리스천 대안학교.
어린아이부터 곧 성인이 될 친구들이 '학생'이라는 사회적 역할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 속의 다양함이 조화를 이루려면 어떤 노력이나 대가 없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남자아이들이 요즘 유독 좋아하게 된 운동이 축구이다. 점심시간이 기다려지는 이유도, 하교 때 엄마인 내가 10-20분 늦게 도착하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이유도 친구들, 형들과 축구를 하는 즐거움 덕분이다.
축구를 좋아해도 축구공을 잘 관리하며 챙기는 것은 사내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전혀 다른 뇌의 영역에서 다루어지는 게 아닌가 싶다. 그렇게 좋아하는 축구지만 걸핏하면 공은 어딘가에 사라졌다가 나타났다가를 반복하고 급기야는 새로 선물 받은 축구공을 며칠 차 보지도 못하고 잃어버린 일도 생겼다.
이런 일이 생기면 남편의 훈계 레퍼토리가 작동한다.
"귀한 것을 모른다. 부족함이 없으니 물건을 함부로 다룬다. 축구공을 관리할 능력이 없으면 축구할 권리도 없다 등등"
그래도 아들 녀석이 좋아한다고 하니 새로운 축구공을 구해 와서 슬쩍 내미는 건 역시 아들들이 축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아는 아빠의 몫이다.
한 번은 새 축구공 관리가 잘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지, 남편은 'FIFA 공인'이라며 헌 축구공을 당근해 와서 아들들에게 건넸다. 며칠을 축구공이 없어서 두 다리가 심심했던 탓인지 그조차도 반갑게 받아 들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서 작은 에피소드가 생겼다.
아이들이 헌 축구공을 갖고 간 탓인지 12학년(고3) 형들로부터 자기 공이 아니라는 오해를 사게 된 것이다. 형님들이 어떤 선생님으로부터 축구공을 하나 받아서 운동을 했는데, 그 공이 남편이 당근을 해서 가져다준 축구공이었고 선생님께서는 교내에 있는 공이니 잠시 공놀이를 하겠다던 고3 학생들에게 별생각 없이 갖고 가서 놀아도 된다고 한 아주 단순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형님들이 축구공을 다시 선생님들에게 되돌려주러 가던 차에 우리 아이들이 그 공이 자신들의 공이니 달라고 이야기를 했고, 형님들은 허락해 준 선생님께 일단을 돌려드려야 한다고 하니 막내는 공이 뺏긴 줄 알고 속상해서 울음보가 터져 버린 것이다.
고3 형들은 이미 학교에서 축구로 살아온 긴긴 인생사를 가진 선배들이다. 그들도 축구공을 수 없이 갖고 왔다가 잃어버리기를 반복해 왔고, 이름도 쓰여 있지 않은 그 학교에 새롭게 등장한 중고 축구공을 우리 아이들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거기다 평소 모범적인 형은 남의 물건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 거면 나중에 혼쭐을 낼 거라는 훈계의 말까지 덧붙였던 터였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막내는 덩치 큰 형이 무서웠고 하교 시간에 맞춰 등장한 엄마를 보자마자 억울함에 눈물을 흘리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 장면은 멀찍이서 바라보던 훈계했던 형이 나에게 드릴 말씀이 있다고 자신의 입장에서도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철이 든 동년배들 사이에서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그저 단순한 오해였다. 나는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막내 아이는 내가 달래면 된다고 웃으면서 아이를 돌려보냈다.
집으로 돌아오는 하굣길에 15분 동안 자기 물건을 소홀히 다루면 예상치 못한 이런 오해의 사건이 일어난다, 새로 생긴 중고 축구공에 크게 이름이라도 써 놓지 그랬냐, 앞으로는 축구공은 꼭 교실로 갖고 갖다가 놀 때 다시 갖고 나가라는 등 갖가지 훈계의 언어들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잠시 하나의 생각에 멈췄다. 나에게 자신의 상황을 잘 설명했던 훈계했던 형, 그의 이름은 광현이다. 이 학교가 정말 아이들의 성품을 잘 교육하고 훈련시킨 학교라면 광현이는 우리 아이들에게 자신의 오해에 대해서 사과를 하는 게 옳은 일이다 싶었다. 물론 나는 광현이에게 아이들에게 사과를 독려할 생각도 전혀 없었고 설사 사과를 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오해에 대해 아이들의 엄마이자 어른인 나에게 이해를 구했으니 그 또한 용기 있는 행동이었으니 참 괜찮은 어른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괜찮음'을 넘어선 '탁월함'으로 인성을 가꾸려면 자신의 작은 잘못도 인정하고 상대방에게 그 마음을 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있었다.
와우~!! 다음 날 귀가 때 막내 아이가 대뜸 하는 말이
"엄마! 오늘 광현이 형아가 저에게 어제 미안했다고 제게 사과를 했어요."
내 자식도 아닌 광현이가 그 순간 얼마나 기특하고 자랑스럽게 느껴졌던지.
상상컨대, 광현이 형은 130 정도 되는 막내의 키에 맞추어 자신의 몸을 낮추고 다정한 목소리로 "시온아, 미안해."라는 말을 했을 것 같다. 그렇게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낮추고, 내면의 움직임에 따라 때로는 몸을 낮추어 상대의 마음에 진심이 전해지도록 시도하고 애써보는 것. 나는 이것이 좋은 교육을 받은 교양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수 십 년 우리 사회는 도약과 성장을 향해 달려왔다. 가난한 대한민국에서 세계 각국에서 K열풍이 불고 국가의 위상과 함께 국민의 위상도 높아진 게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면면을 돌아보면 모두가 너무 대단하고, 너무 많이 가져서 오히려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 남에게 침해당하지 않을 권리는 인간이 침해할 수 없는 인간 본성의 강력한 존재의 가치임을 부인할 수 없지만 '나'의 권리를 주장하다 '남'이 어떤 고통 중에 아파하고 있는지는 돌아보지 않는 새로운 결핍을 갖게 되었다. 나는 이런 시대에 무엇이 필요한가를 생각하면 존귀한 존재로서의 한 인간으로서 갖고 있는 양심에 부끄러움의 더듬이를 더욱 예민하게 작동시켜 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겸손한 사람들이 사랑과 배려로 상대를 존중하는 사회, 살고 싶은 사회가 되지 않을까 싶다.
나는 19살 광현이가 7살 시온이게 몸을 살짝 굽혀 마음을 전하는 것은 높은 품격의 인격은 가졌을 때 나오는 행동이라 생각한다. 역시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크리스천 대안학교는 작지만 강한 학교가 맞았다. '괜찮음'을 넘어선 '탁월함'의 인성을 가꾸는 교육을 하는 곳이 맞았다. 교육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역시 참 교육은 실패하지 않는다. 그곳에 있는 아이들의 인격이 그간의 교육이 어떠하였음을 입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