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창과 오케스트라
아이들이 대안학교를 다닌 지도 어느덧 1년을 채우고 있다. 어느 날, 남편과 함께 세 아이를 데리러 갔다. 세 아이가 교복을 입고 학교를 나서는 장면을 보더니 남편이 느닷없이 아이들 더러 도레미로 서보라고 하더니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그날 밤 남편은 침대에 누워서 낮에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들의 표정을 보니 대안학교에 보낸 걸 참 잘한 것 같단다. 얼마 전에 첫째 나빈이와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를 우연히 만났는데 밤 10시가 넘어서 학원에서 돌아오는 그 아이의 지친 표정과 사진 속 나빈이의 표정은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집 앞에 즐비한 학원가에서 밤 10시가 되면 셔틀버스가 줄지어 서 있고, 귀가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그래도 집 가까이 이렇게 다양하고 많은 학원이 있으니 참 다행이라며 안도했던 때가 불과 2년 전이었다. 집에서부터 학원까지의 거리는 자전거로 10분이면 충분했고 그 반경 안에 아이들의 학교가 몰려있어서 집, 학교, 학원은 아이들이 10대의 에너지를 쏟아내는 생활공간이었다. 매일 밤 아이들이 다니는 길을 우리 부부는 산책길로 삼으며 안전한 환경에 다행스러워했다. 다른 대안을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휘영청 밝은 학원가의 불빛만 따라가면 밝은 미래가 올 것만 같았으니까.
아이들의 표정이 좋다고 괜찮은 교육을 하고 있다고 장담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계속 변하고 변화무쌍한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조화와 부조화가 섞여서 부모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는 일들도 많다. 그러나 그런 일은 어디나, 언제나,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일들이다.
얼마 전에 성탄절을 맞아서 아이들이 마련한 공연에 초대되었다. 아이들의 합창과 오케스트라 공연, 워십 등 몇 가지 공연들이 펼쳐졌다. 아이들은 몇 주 동안 그 행사를 위해 모여서 연습하기를 반복한 것이다. 모든 공연이 끝나고 교장 선생님의 인사말씀이 있었다. 요지는 오케스트라와 합창 교육이 왜 중요한가로 정리된다. 그 해답은 하모니를 만들어내기까지의 성실과 인내, 겸손을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혼자만 잘한다고 하모니가 저절로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조화를 만들어 내기까지 자기 몫의 성실한 연습이 필요하고 타인의 실수와 부족함을 기다리고 응원하는 인내의 시간, 그 모든 여정을 겸손한 태도로 임하는 자세까지 합창과 오케스트라는 그야말로 인생 축소판을 음악으로 배우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교양 있는 부모의, 교양 있는 교육의 덕목으로 '악기 하나쯤은 하는 것'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는 사치처럼 보였던 적이 있다. 주요 과목들을 학원을 보낼라치면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칠 부모의 경제적인 여유도, 아이들의 시간적 여유나 체력도 여력이 없이 빠듯하게 돌아간다. '악기 하나쯤을 하는 교육'은 그래서 매우 특별한 교육의 영역에 속한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피아노를 기본으로 오케스트라를 위한 악기 하나씩은 바램과 상관없이 필수로 배우게 된다. 여름에는 야외 공연도 하고, 겨울에는 성탄절을 기념하여 공연이 이루어진다.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인식의 틀에서는 이런 교육은 선택은 될 수 있지만 필수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유독 무대에 서는 것에 대한 울렁증이 있는 둘째는 공연을 준비하면서 '굳이 이런 공연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둘째의 말을 듣고 보니, 볼멘소리가 나오게 하는 바로 이 교육이야 말로 둘째에게는 더없이 좋은 교육이 아닐까 싶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삶을 생각해 보면 원하는 것만 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다.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뜻대로 살아가라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지만 그 말이 힘을 발휘하려면 자아가 성숙한 사람들에게 성숙한 자유의지가 발휘될 때라야 용납될 수 있다. 성실과 인내, 겸손을 갖춘 사람의 거침없는 자유만이 자신과 타인에게 이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공연을 지켜보면서 나름대로의 하모니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 '참 수고했다, 기특하다'는 응원의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마침내 하나의 무대가 끝나면 관객들은 열화와 같은 박수를 보낸다. 설사 좀 부족한 공연이었다 하더라도 그 모습마저도 기분 좋은 웃음 포인트가 될 뿐이다. 과정의 지난함을 지나야만 환호의 달콤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진리이지만 지난한 과정에 발을 내딛는 시도는 소수만이 선택한다. 합창과 오케스트라는 바로 그 지점을 '함께' 배우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입시 교육의 현실에서 자신의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해 학업에 매진하는 모든 청소년들을 나는 응원한다. 그들의 성실과 인내는 결과와 상관없이 그 자체만으로 매우 값진 여정이다. 다만, 촘촘하게 줄지어 평가하도록 만들어 놓은 사회의 시스템에 지나치게 패배감을 경험하지도, 너무 분노하지도 않길 바란다. 그저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다. 옳은 방향을 잡았다면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가면 된다. 가다 보면 깨달아지고 성취하는 것은 반드시 있다. 자기 삶의 여정에 준비된 달콤한 열매를 한 입 베어 무는 그날까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자. 그것이 이 세상의 하모니를 만드는 가장 기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