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왜 기독교 대안학교인가?

가장 선명한 VISION을 보여 주기에

by 자유인

미물이여도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은 각기의 남다른 존재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을 에워싸고 있는 많은 물건들도 그것이 만들어질 때는 만든 사람이 분명한 쓰임새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 심지어 같은 물건이 새롭고 현란한 디자인으로 만들어질 때도 그것을 만든 사람은 그 다자인이 인간의 어떤 욕망을 충족시킬지 짐작하며 만들었을 것이다.


사십 대 중반을 사는 나도 가끔씩 아주 생경한 마음으로 나에게 질문할 때가 있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지금 이 땅에서 존재의 의미를 발휘하며, 나의 길을 가고 있는가?'

무언가를 향해, 무엇인가를 위해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다가도 이런 질문들 앞에서 대개의 사람들은 멍해진다. 묵직하게 나의 삶을 움직였던 이유들이 새 삶 깃털보다 가벼워지고 먼지처럼 사라져 버리는 경험, 나만 하는 것은 아닐 테다. 그러다 스치는 생각은 내 삶이 마치 요란한 빈깡통처럼 무의미한 소리만 내며 사는 것은 아닌지 가끔 허무감에 빠지기도 한다.


나는 자녀 교육에서도 이런 질문을 던졌다. 무언가 열심히 하라고, 최선을 다하라고 가르치지만 무엇을 위한 최선인인, 가끔은 나 역시 교육자로 살지만 내 자식의 양육자로서는 할 말을 잃는다. 남을 교육할 때 내 안에 있던 당위적인 가치들은 자식 앞에서는 무너지는 경험을 한 두 번 하지 않았다.


주위를 돌아보면 어른으로서 미안할 정도로 폭력적인 경쟁이 난무한 세상을 아이들은 살아가고 있다. 그런 사회환경에 나 또한 무력하기에 냉혹한 현실을 이기는 경험도 필요하다고, 현실을 회피하며 살 수만은 없는 일이라며, 벽을 만나도 뚫어 내고 훌쩍 넘어서는 경험도 필요하다고 자녀들을 세뇌시키곤 했다. 거친 세상에서 배울 수 있는 건 지독한 인내와 어떤 상황에서도 통하는 탁월함이라는 것. 나도 한국 사회의 베이비붐세대가 낳은 자녀 세대로 엄청난 양적 경쟁을 지나온 세대라 익히 알고 있는 바이다. 그래서 가히 폭력적인 환경이지만 쉽게 그런 프레임을 씌우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루저들이나 하는 자기합리화의 방어기제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고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래, 백 번 양보해서 그런 세상에서 위너가 되어 좋은 직장을 갖고 안정적으로 살아간다고 치자. 그렇다고 삶이 완성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지나온 모든 시간이 덧없이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맹목적으로 주어진 경쟁적 세상에서 이기는 것만이 정답이라고 배웠기에 인생이 내게 진지한 질문으로 말을 걸어올 때면 짐짓 물러나 어떤 확실한 답을 하지 못하고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의 존재 이유와 의미를 알아차리고, 확신하여 힘 있게 살아가는 것은 정말이지 어른이 된 나에게도 여전히 쉽지 않으니, 우리 아이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얼마 전에 유튜브로 실리콘밸리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한국에서 창업을 한 어느 사업가의 인터뷰 동영상을 잠시 보았다.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젊은 창업자들이 절대 강조하는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Vision-driven' 경영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란다. 비전이란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고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실체로서 현재가 아닌 미래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 비전은 미래상이지만 그것을 품은 사람들에게는 현실이니 비전을 가진 사람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현실로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로 보인다. 실리콘밸리의 잘 나가는 기업들은 이미 완성체가 되어 확실한 연봉과 복리후생으로 똑똑한 청년들을 유인할 수 있는 요소를 이미 갖추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작은 스타트업들이 똑똑한 청년들의 선택을 받으려면 그 방법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로 가슴을 뛰게 하는 확실한 비전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완의 것을 완성시키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것만큼 가슴 뛰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이 말에 크게 동의한다. 좋은 비전은 강력한 동기를 만들고 뜨거운 열정으로 무언가에 매진할 수 있게 돕는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비전이 가진 힘이다.


아이들이 기독교 대안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지 꽉 찬 1년이 되었다.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아이들은 기독교의 가치를 탑재하기 시작했다. 기독교는 인간을 죄로 가득한 존재로 정의한다. 성어거스틴의 참회록을 보면 그는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유아기 때부터 자신에게 있었던 보편적인 죄성이 무엇인지를 똑똑히 주목하고 깊은 참회를 한다. 사실 죄라는 것은 어떤 상징이나 은유가 아니다. 인간 본성에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면모도 있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뼛속까지 서린 죄와 만난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은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내면이 깊이 침투하여 더 깊이 들여다보려는 비기독교인에게도 새로운 시선을 던진다. 이러한 시선이 아이들의 교육에 배어들게 되면 놀랍게도 겸손하고, 절제된 자유에 대해 자연스레 이해하고 그 가르침을 쉽게 받아들인다. 그러니 인간이 가진 내면의 깊은 죄성을 가르치는데, 아이들의 인성은 타인을 배려하고 기꺼이 자기 통제감을 탑재하게 된다.


기독교 대안학교의 교육 가치를 통해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학습한다. 아이들은 역사책을 읽어도, 과학책을 읽어도 그 안에서 섭리하는 하나님의 속성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이해되지 않지만 존재하는 실체들이 있고 그 거대한 현실을 만들고 운영하는 어떤 힘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것이 아이들에게는 엄청난 뒷배가 되는 것 같다. 아이의 교육이 성공하려면 조부모의 경제력과 엄마의 정보력, 그리고 아빠의 무관심이 있어야 된다는 농담이 있다. 어찌 됐건 아이들은 자신보다 힘이 세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 의해 자신의 삶이 변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기독교의 교육은 사람보다 강력한 하나님, 끝없는 우주를 만드시고 통치하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삶의 본질이라는 것을 안내하기에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는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물론 대학 진학을 앞둔 학생들과 짧은 대화를 나누다 보면 가고 싶은 대학과 갈 수 있는 대학이 가정 형편에 따라 갈리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스무 살 아이들은 자신의 가정 형편에 맞추어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어찌보면 마음 아픈 장면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상황에 처한 아이들의 표정에는 어떤 결정은 모두 '한걸음'을 어떻게 뗄 지에 대한 고민일 뿐 자신의 인생여정의 긴 선을 인도하는 분은 하나님임을 믿고 기대감도 함께 있음을 본다. 실패하고 실수할 수 있지만 '그뿐'이며 그것의 '의미'를 더 넓은 관점에서 해석하고 제 갈길을 담담히 걷는 담대함을 배우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기독교 대안교육은 예수 그리스도를 롤모델로 한다. 우리가 읽는 성경에는 위인으로 보이는 대단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있다. 하지만 어떤 누구도 완벽한 인물은 없는데, 그것 자체로도 위안이 되기도 한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배우며 그 방식을 배우려는 노력을 하도록 가르친다. 예수님은 고통 중에도 하나님께 끝까지 순종하셨으며, 죄로 가득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분의 면모를 기억하면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원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또, 예수님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셨을지 생각하는 것은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미약한 인간인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하다는 것도 배운다. 끊임없이 나를 포기하는 내려놓음을 연습하되, 그 모든 나를 대체하는 자리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한다는 겸손을 배우게 된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는 이와 관련된 실제적인 교육을 '효'에 대한 강조로 구체화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학생들의 인삿말은 "안녕하세요?"가 아니다. "효도하겠습니다!"가 이 학교의 인삿말이다. 특정학교들마다 일상화된 인삿말 대신 사랑합니다, 반갑습니다, 행복하세요 등을 사용하는 예를 본 적이 있다. "효도하겠습니다!"는 처음에는 참 낯설었다. 하지만 늘 언어는 가치를 형성하고 생각의 프레임을 만들어 내는 묘한 기능을 한다.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진부한 유교적 사상을 아이들에게 주입시키는 것 같아서 효에 대해 강조하기 보다 '사랑'이라는 대체 언어를 사용해 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효도는 아이들은 부모에게 어떤 언행을 보이는 것이 바람직하며, 부모와의 관계에서 자녀로서의 태도와 역할에 대해 더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효도의 모본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분은 죄가 없으나 대속제물로 이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효가 무엇인지 보여주셨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효를 강조하는 교육은 '예수님처럼' 사는 것의 가장 구체적인 생활양식을 안내하는 것 같다. 물론, 우리집 아이들도 때로는 부모의 부당함을 트집잡아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한다. 하지만 잠시 지나서 '효도'의 의미가 무엇인지만 알려줘도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잘못을 쉽게 뉘우친다. 부모를 향한 앙금이 남을리 없다. 어떤 설명보다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면 아이들은 스스로 '효도'의 의미를 분별의 기준으로 삼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스스로 가려낼 수 있다.


이렇듯, 기독교 대안교육은 끊임없이 나(죄성)를 내려놓고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떠올리게 하는 교육으로 연결되어 존재의 이유와 삶의 방식을 가장 확실하게 설명하기에 이른다. 더욱이 사회에서 원하는 Vision을 선명하게 그리게 되는 것은 그저 덤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것이 아이들을 1년 동안 기독교 대안학교에 보내면서 내가 내린 소결이다.


오늘 G8에 재학 중인 첫째 아이는 캄보디아로 선교 여행을 떠났다. 아이는 여러 여행을 해봤지만 '선교여행'은 처음이라며 이 여행이 자신의 인생에 뜻깊은 경험이 될 것이라 기대하며 떠났다. 아이는 부모를 떠나는 첫 해외여행에 복음을 품고 간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나 할까? 그러나 믿음은 보이지 않지만 선명하게 보는 것에 있다. 아이는 이렇게 서서히 부모의 품을 떠나 자신이 품어야 할 비전을 찾아 나서는 길 위로 첫발을 내디딘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의 비전 찾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나의 자녀들이 따뜻한 나의 품을 떠나 복음을 들고 세상 속으로 더 깊이, 더 넓게 침투하기 바란다. 세상은 굉장히 위험하지만 복음에는 능력이 있기에 우리 아이들은 나의 품보다 안전하리라 믿는다.

keyword
이전 15화포기할 수 없는 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