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 책상

인생 전쟁터에서의 기지와 같은 곳

by 자유인

삶의 공간이 주는 풍요는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나와 어울리지 않게 너무 넓어도 안되고, 너무 좁은 것도 내키지 않습니다. 나의 필요를 부족함 없이 다 채워주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공간에서는 어떤 활동을 해도, 어떤 활동을 하지 않아도 공간에서 느껴지는 안정감만으로도 정서적인 평안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생활의 공간에서 내가 독점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공간이 어디인가를 생각해 보면 책상입니다. 주부로 엄마로 살다 보니 싱크대도 실생활에서는 원하지 않지만 독점하며 지내는 공간이기도 하네요. 책상과 싱크대 모두 고도의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공통점이 있지요. 음식을 만드는 일도 귀하고 즐거운 일입니다. 하지만 노동으로 느껴질 때도 있어서 책상이 주는 편안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저는 요리를 취미로 하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요리는 그저 생명을 위한 양식을 만드는 공간일 뿐이지요.


책상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떠올리기 위해서는 내 삶에서 책상이 없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아마도 지금의 나라는 존재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책상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하고, 만들어왔던 것 같아요.


책상과의 첫 인연은 공부하는 공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내 책상이 처음 생긴 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였던 것 같아요. 책상이 없었던 어린 시절에는 바닥에 엎드려서 한글 공부를 했던 기억도 있고요. 밥상을 책상 대용으로 사용했던 기억도 납니다. 처음 책상이 집에 들어올 때는 여동생과 함께 사용하라고 하셔서 책상 하나를 두고 서로 쓰겠다고 다투었던 기억도 있어요. 뭐 대단히 열심히 공부를 할 것도 아니지만 하나이기에 경쟁적으로 탐을 냈던 공간이었지요.


책상은 생각을 정리하고 의사결정을 내리는 공간입니다. 생각이 복잡할 때면 책상 앞에서 노트를 펴서 머릿속에 있는 정리되지 않은 것들을 쏟아내곤 합니다. 고등학생이었을 때 문과와 이과를 놓고 진로설정을 해야 할 때가 있었거든요. 친구 따라 강남 가듯 결정할 수도 없고, 부모님께서 결정해 줄 사안도 아니었기에 저는 연습장 한 권을 펴서 내 속의 두 마음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는 것을 그대로 써 내려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족히 두어 시간을 써 내려갔고, 어느새 노트 한 권을 모두 채웠습니다. 집중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인 책상이 없었다면 그렇게 집중해서 나를 위한 치열한 고민을 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법을 배울 수 없었을 겁니다. 요즘도 책상 앞에서 앉아서 어떤 결심 같은 것을 할 때가 참 많습니다.


직업인으로서의 작업의 대부분도 물론 책상에서 이루어집니다. 월급을 받기 위한 일하는 공간은 연구실의 또 다른 나의 책상이지만 그곳을 떠나와서 집에 마련해 둔 나의 책상은 오롯이 사적인 공간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묵상일기를 쓰는 것, 좋아하는 주제의 연구를 위해 읽고 생각하고 쓰는 것. 주로는 이렇게 두 가지를 주로 합니다. 책상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나의 사명이라 생각하는 일을 바로 이 책상에서 하는 겁니다. 책상 위의 모든 물건들은 나의 필요와 편리에 따라 배치되어 있고, 거기에는 나의 습관이 묻어있습니다. 약간 어수선해 보여도 그것 자체가 나름의 질서랍니다. 그래서 이 배열에서 작은 물건 하나만 없어져도 저는 바로 알아차립니다. 다 제자리에서 제 몫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수년 전에 대학을 옮겨 오면서 총장님께 다른 대학으로 옮기겠노라 마지막 인사를 드렸던 날이 기억납니다. 떠나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의 만남은 언제나 어색한 법이지요. 비서에게 따뜻한 차를 내오게 하시고는 총장님께서는 덕담을 해주셨습니다.

"인생은 땅따먹기 같기도 한데 말이오. 김교수는 자기 땅을 잘 찾아서 영역을 잘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네. 앞으로도 어디서든 자기 영역을 잘 찾아서 살 거라 생각하오."


어린 시절 돌을 주워다 바닥에 자기 땅 영역을 표시하며 놀았던 바로 그 놀이가 떠올랐습니다. 게임을 하다 보면 잘 되는 날도 있고 생각만큼 안 되는 날도 있었지요. 인생이 땅따먹기라는 말에 완전히 공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일정한 분량의 땅. 다른 말로는 공간이나 영역이 필요한 건 맞습니다. 제가 총장님께서 보시기에 자기 땅의 영역을 잘 구축하고 땅따먹기에 소질이 있어 보였던 이유는 아마도 제 삶의 기지가 되는 책상에서 보낸 시간들을 알차게 살아냈기 때문일 거란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전쟁 같은 인생여정을 땅따먹기 하듯 고군분투하기 위해서든, 여유와 휴식으로 사용하든 저는 나의 집에는 나만을 위한 책상 하나를 들이는 호사를 어떤 상황에도 지켜내려 합니다. 엄마이다 보니 아이들 공부 공간으로 책상을 들이지만 나를 위한 책상은 식탁이 대신하기도 하죠? 하지만 아이들의 학업 공간으로는 오히려 주방의 식탁이나 거실의 넓은 테이블인 경우가 훨씬 좋더라고요. 대신, 정말 조용한 공간에 자리하고 있는 책상을 점하는 것이 그 가정에서 엄마일 때, 저는 그 가정이 더 새롭고 더 가치 있는 것들을 찾아 빛나는 여정을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숙제나 공부를 할 때 저도 옆에 앉아서 뭔가를 함께 할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때 나의 온 신경과 더듬이는 아이들이 잘하고 있는지 넌지시 감독하는 목적이 강해서 깊이 있는 정신적인 활동으로 들어가기는 어렵더라고요.


맞아요. 엄마에게 책상은 일상에서 벗어난 굉장히 특별한 사유의 공간이 되는 것이죠. 저는 연구실의 작업 공간이 아닌 이 책상 공간을 참 사랑합니다. 그래서 인생이 정말 땅따먹기와 같다면 저는 그 게임에서도 제 책상을 둘 이 작은 공간은 절대 뺏기지 않을 겁니다. 이곳을 잃으면 다음을 기약할 수 없거든요. 하지만 이곳을 지켜내면 저는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 책상은 많은 것은 가능하게 하는 희망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내 삶의 희망? 마음속에도 있지만 책상에도 있어요. 그래서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 필수 아이템으로 책상을 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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