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막내아들과 손을 잡고 즐거운 산책을 나섰다. 너무 더운 날에는 귀여운 아들이지만 그의 손이 너무 뜨거워 멀찍이 거리를 두고 걷자고 했는데, 어제는 날이 좀 식은 탓인지 손을 잡고 정다운 이야기를 걸으며 걸었다.
막내는 참 수다쟁이다. 한 시간 남짓 산책을 하는 동안에도 수백 개의 질문과 이야기를 쏟아낸다. 옹알이부터 남달랐고 말이 빨라서, 엄마인 나는 입으로는 세상을 구할 녀석이라며 장난스러운 핀잔을 쏘아댈 때가 종종 있다.
오전에 엄마 연구실에 따라가서 엄마가 일하는 동안 어떤 공상을 했었는지 그 공상 속으로 나를 초대하며 셀 수 없는 질문을 쏟아냈다. 나는 아들이 이야기하면 가끔은 대충 흘려듣는다. 저녁 산책은 나에게도 하루의 고뇌를 비워내는 나를 위한 시간이기에 사랑하는 아들에게 온마음을 내어주기가 쉽지 않다. 잠시 상념에 빠지려는 순간 아이가 질문을 시작했다.
"엄마! 엄마가 알고 있는 퀴즈가 있어요?"
"엄마? 생각나는 게 없는데... 아~ 있지!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아들은 누구지?"
"저요!!"
"그럼, 세상에서 제일 멋진 아들은?"
"형이요!!"
"역시 잘 아네!!!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제일 이쁜 딸은?"
"아! 하하!! 그건 엄마요!!! 엄마도 엄마가 되기 전에는 딸이었잖아요!"
나의 세 가지 질문의 정답을 우리 가족들은 모두 알고 있다.
연년생인 첫째와 둘째, 터울이 좀 있는 막내까지 아이 셋을 키우다 보니 셋에게 수식어를 하나씩 붙여주었다. 엄마가 셋을 모두 사랑하지만 각자 그 누구도 범할 수 없는 최고의 영역이 필요해 보여서 붙여준 수식어였다.
누가 뭐라 해도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건 막내이고
누가 뭐라 해도 세상에서 가장 멋진 건 둘째 아들이고
누가 뭐라 해도 세상에서 가장 이쁜 건 첫째 딸인 것이다.
그러니 나의 세번째 퀴즈의 정답은 "누나"였다.
막내아들에게 수천번 건네었을 퀴즈를 나는 오늘도 냈는데, 오늘은 너무나 의외의 답을 하나 한 것이다.
"엄마도 엄마가 되기 전에는 딸이었잖아요!"
지금도 여전히 딸이지만 엄마가 된 후로는 엄마라는 역할에 더욱 매진하며 살아온 것 같다. 고 녀석 참 밉상스럽게도 맞는 말은 한다 싶어 얼굴을 쳐다보며 서로 환한 미소를 주고받고 있었다. 나는 나의 역할을 생각하며 웃었고, 아들은 아마도 무수히 반복했던 질문의 정답을 정확하게 깨어버린 것에 통쾌해하며 웃음을 지었던 듯하다.
바로 그 순간, 앞서 맨발 걷기를 하시던 어르신 한 분이 몸을 돌려 아들에게 인사를 건네셨다.
"내가 너를 저~기서부터 보면서 왔는데, 너 참! 똑똑하다! 우리 집 아들이 서울대를 다녀서 서울대 필통이 하나 있는데, 내일 우리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자. 너는 서울대는 꼭 갈 수 있을 것 같다."
아들은 어르신과의 약속을 너무나 기뻐했다.
"엄마, 7시 약속이니까 제가 6시 40분으로 알람을 맞춰 놓을 거예요."
나는 아들에게 내일 선물을 받게 될 테니, 감사의 인사카드를 쓰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지금 가서 바로 쓸게요!"
역시 신이 난 모양이었다.
집을 나서기 전에 아들은 어르신께 감사의 인사로 쓴 카드를 갖고 와서 읽어주었다. 한쪽에 여백이 있길래 다른 글로 좀 채우라고 했더니, 암송하고 있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영어로 써 내려갔다.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어느 날부터인가 아이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그 분을 소개할 때 가장 좋은 말씀이라며 암송해 둔 말씀이다.
우연한 기회에 새 필통을 선물 받게 된 아들은 설렘이 가득한 걸음으로 약속 장소로 발길을 옮겼다. 약속한 시각에 어르신을 만났고 잠시 담화를 나누었다.
아이가 쓰레기를 버리러 휴지통을 찾아 거슬러 가서 쓰레기를 버린 일
산책 길에 해외 출장 중인 남편과 영상통화를 하며 일상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목격한 일
이렇게 자라는 10살짜리 사내아이라면 서울대는 거뜬할 거라는 지혜 속에서 전해주신 칭찬의 말씀까지.
우리 모자를 주의 깊게 살피셨던 것 같다.
아이에게도 너무나 특별한 사건이 되었을 것이다. 어르신의 말씀에서 '서울대'는 단순히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대학의 대명사 이상이었다. 어린아이가 가질 수 있는 빛나고 아름다운 꿈과 희망을 전해 주셨다.
짧은 담소를 나누며 아이와 다시 둘만의 대화를 시작했다.
"어제 엄마가 주머니에 있던 쓰레기를 휴지통에 버리고 오라고 했었던 일, 그때 시온이는 잠시 싫은 기색이었지만 누군가는 가던 길을 되돌아 휴지통에 쓰레기를 버리는 일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지?"
"네! 좀 싫은 일이라도 참고하면 더 좋은 행운이 기다릴 수 있어요!"
"엄마! 베리타스는 하버드대학교에 나오는 거 아니에요? 서울대가 하버드 따라한 거예요?"
"아니, 베리타스는 진리라는 뜻이니까, 어느 대학이든 어느 학문이든 진리가 중요하니 사용할 수 있지."
"엄마! 룩스 메아는요? 이건 무슨 뜻이에요?'
"모르겠네. AI한테 물어보자. 베리타스 룩스 메아가 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뜻이네. 멋지다!"
"엄마! 저는 필통이 쓰던 것일까? 완전히 새것일까? 궁금했거든요. 그런데 비닐까지 입혀진 완전 새것이었어요!"
"온이는 헌 것이었으면 어땠을 것 같아?"
"그래도 엄청 좋았겠죠! 그런데 새것이라서 너무 놀랍게 좋았지요!"
아이는 새로 받아 든 필통을 하늘에 비추어 사진을 찍자고도 하고 자신은 서울대가 아니라 하버드를 갈지도 모른다며, 이런 특별한 필통을, 새 필통이 필요한 순간에 생긴 건 엄청난 사건이라며 산책길 내내 기쁨을 표현했다.
막내 시온이가 받아 든 우연한 선물에 관한 에피소드를 남편과 나누었더니, 시온이에게도 기쁨이지만 우리 부부에게도 감사한 일이라며 흐뭇한 마음을 전했다. 부모로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우연한 선물들로 자녀들은 부모의 인생을 다채롭게 만들어 준다.
아주 가끔은 하늘을 보며 '하나님! 제 마음 아시지요?'라고 묻곤 했는데, 어제오늘은 우연한 만남과 귀한 선물 덕분에 내 마음에 화답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만난 것 같다. 그러니 오늘의 결론도 역시나 자녀를 키우는 건 귀한 축복이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