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body’s ex
[만약 결혼을 한다면 29살 정도가 나는 결혼 하기에 적당한 나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더 어린 나이에 할 수도 있고, 더 늦은 나이에 할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나에게, 언제쯤 결혼하고 싶어요?라고 일반적으로 물으면,
음~ 뭐 한 29살쯤이 좋지 않을까요? 라고 대답했다.
왜 29살이냐고 물으면?
너무 아쉽 지도 그렇다고 너무 충분하지도 않지만,
어느 정도 사회생활은 한 직장 경력.
종족을 번식하기 위한 거라면, 서른을 넘지 않는 것이 나은 것 같고.
이전보다는 좀 더 개방적으로, 성적 욕구가 활발해질 것 같고.
물론 더 어릴 때부터 성적 욕구는 생겼겠지만,
29살은 하는 것보다는 안 하는 게 이상한, 뭐 그런.
그리고, 혼자가 아닌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안정감의 추구.
그리고 그렇게 돌아가는 주변의 상황들.]
현정이 계획 한대로, 그녀가 29살에 결혼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지숙도 현정에게 결혼 하라고 말하지 않았었다.
현정은 그렇게 회사 파티에서 토드를 보고,
그 후로, 우연히 혹은 그렇게 될 것처럼 그와 만나는 일이 생겼고, 막상 파티가 아닌 곳에서, 여럿이 혹은 대일로 만나보니, 그는 생각보다 세심하고 배려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가 여자들을 많이 만나,
여자들에 대해 많이 알아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런 것이 현정은 그가 알아서 해서 편안했다.
이제 필기 코스를 끝내고 막 실전 초보자 코스를 입문한 현정에게, 토드는 필기도 실기도 모두 고급 과정을 마친 전문가와 같았다.
적어도 연애나 관계에 관해서 말이다.
물론 그가 경험한 것, 만난 사람들도 현정에 비해
훨씬 많고, 다양해서, 사회적인 면도 월등하다.
미국에 와서 뭐든, 스스로 하던 현정에게,
전문가가 나타나 알아서 해주니,
현정은 그런 면에서 편안함을 느낀 것도 같다.
그렇다고 토드가 맘대로 하는 건 아니다.
그는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것도 없고,
이것이 훨씬 더 낫다고 제안하지도 않는다.
그냥 자연스럽게, 리드해 간다고 해야 할까.
그러면서 매번 현정에게 묻고, 그녀의 기분을 챙겼다.
유머도 많아서 현정은 주로 듣고 웃었다.
현정은 이야기 듣는 걸 좋아하고, 특히 재밌게 말하는 걸 듣는 걸 좋아한다.
아빠 재철은 유쾌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잘 듣는 사람이 된 것도 수다쟁이 아빠 덕분이었을 것이다.
토드가 밝고 긍정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는 사교적이어서, 굉장히 밝고, 사람을 좋아하고, 털털할 것 같지만,
매사가 깔끔하고,
때론 차갑기도 하고,
사업을 할 때는 냉철하고 비판적인 사람이다.
다만 현정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가져와 들려주고,
현정이 웃는 걸 보고 웃는 사람이 된 것이다.
적어도 현정을 만날 때는.
현정은, 이만 하면, 경제적으로도, 생활적인 면에서도
가정을 함께 만들기에 꽤 괜찮은 조건의 남자 같았다.
토드는, 현정의 적당한 바운더리와 거리에서 평안함을느꼈다.
또한, 그녀는 어수선하고,
들뜨고,
복잡하고,
붐비는 그의 주변의 사람들과 달리,
차분하고,
진실된 말과 행동에서
그는 신뢰감과 정서적 안정감이 들었다.
평안함과, 안정감속에서
토드는 이것이 정말, 진정한 사랑일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토드는 현정과 함께 자주, 오래 있고 싶었고,
그것이 꼭 결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부모님이 기대하는 것처럼,
가정을 만들어야 한다면,
현정과 함께 하고 싶었다.
토드의 부모님 또한 현정을 신뢰하고 좋아했으며,
아들이 현정을 만나, 좀 더 안정되고, 성숙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 믿었다.
그렇게 둘은 2년 정도 연애를 했고,
2015년 8월 27일
많은 사람들의 축복, 관심,
어떤 이들의 질투와 아쉬움, 놀라움을 받으며,
성대하고 시끄럽게 결혼식을 했다.
가을이 되면, 함께 같은 집에서 살고 싶어서 8월 말에 결혼식을 한 것이고,
또 다른 이유는, 샌프란시스코의 여름은 안개가 많이 끼는데,
8월 말부터는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어서 이다.
낮 동안에 유람선에서, 피로연을 먼저 하고,
오후에 결혼식을 하면서,
석양이 질 때, 반지를 서로 주고받아야 하는 것이
토드의 결혼 계획이었다.
밤에는 불꽃놀이도 준비했다.
현정은 토드의 계획을 대부분 수락했지만,
단 하나,
그는 원했지만 현정은 한국에서의 결혼식이나 피로연은 거절했다.
대신, 엄마 지숙과, 할머니, 가까운 친척 그리고, 지숙이 모시고 오고 싶은 분들을 초청했다.
토드는 현정과 함께 살 집을 ‘Tiburon’에 이미 구했고, 지숙과 그의 하객들을 그곳에 머물게 했다.
원하는 분들을 위해 고급 호텔도 예약했다.
“머물고 싶은 신 만큼 충분히 머무르시고, 모든 것을 다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라는 스위트하고,
배려 깊은 말까지 전하면서.
그렇게 토드의 삶처럼,
화려하고 고급스럽고 분주하고,
많은 사람들 속에 둘러싸인 결혼식을 올리고,
사람들의 기대 이상의 허니문을 다녀오고,
‘Tiburon’ 집에서 신혼을 시작했다
결혼 후, 현정은 회사를 다녔지만,
토드와, 토드의 부모님은 현정이 회사를 그만두기 바랐다.
토드의 부모님은 옛날 분들 답게,
이제 막 결혼한 현정이 손주 라도 안겨 주면,
가정이 더 안정이 되어 갈 것이라며,
현정에게 넌지시 자주 이야기를 했다.
부담을 가지라는 듯.
토드는 그의 부모님의 바람처럼 아이를 갖고 싶어서,
그녀가 회사를 그만 두기를 바란 것이 아니다.
그냥, 현정과 자유롭게 시간을 좀 더 많이 가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현정도 회사에서 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이전과는 좀 달라, 어색하기도 했다.
직원인데, 최고 투자자의 부인이, 회사에 출근해서,
오히려 그들을 더 불편하게 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아이를 빨리 갖고 싶지는 않았다.
둘 다 생명을 한 명, 키우기에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고,
현정도 토드와 둘 만의 시간을 좀 더 가지고 싶었다.
토드는 현정에게 박사 공부를 하면 어떠냐고 제안을 했고,
현정은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그녀가 하지 않아도 늘 깨끗한 집에 살면서,
해주는 밥을 먹으며,
인턴쉽, 학업, 발룬티어 이런 거에 쫓기지 않고,
온전히 공부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현정은 수업을 가고,
토드는, 투자나 건물 관리를 하느라,
여기저기 미팅을 하거나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고,
그리고 오후에, 토드가 가는 파티에 그의 손을 잡고,
부인이라는 호칭으로 함께 참석했다.
그런 날도 없는 날은, 그녀는 정원을 걷거나,
소파에 앉아,
그녀를 늘 세심히 챙기는 아줌마들이 가져다주는 차를 한 잔 마시거나,
그동안 바빠서 읽지 못한 책을 읽고,
박사 공부에 필요한 전공 서적도 누구의 방해와 시간의 구애 없이 읽었다.
때로는, 토드와 함께 여행을 다녔다.
예약할 필요도, 그곳의 정보를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현정이 ‘어디 가 볼까?’
라고 말만 하면 됐고,
토드가, ‘우리 여기 가자’
라고 현정에게 알려 만 주면 되었다.
현정은 여유롭고, 평온하고 편안했다.
토드는 현정의 평온하고 평안한 존재에서
사랑을 느꼈다.
현정이 박사 코스를 막 마치고, 논문을 쓰려고 시작한
2017년 가을, 첫아이를 낳았다.
현정은 새 생명이 다소 어색하고, 좋은 엄마,
아이를 잘 키우는 일 등으로 걱정이 한 아름 인 반면,
토드는 그저 신비하고, 신기하고, 경이로웠다.
처음으로 가장 순수하고, 평화 로운 생명체를 마주
한 것 같았다.
작고,
보드랍고,
부서질 거 같은 아이를 그는 경건한 마음으로 안았고,
말로 할 수 없는 가슴이 충만한 행복을 느꼈다.
Elena Chen
토드가 가슴에 새기고,
그의 머릿속에 단 한순간도 담지 않은 적이 없는,
심장이 뛴다면,
엘레나 때문에 뛰고,
그를 숨 쉬게 만드는,
그의 가장 귀하고, 소중한 생명체.
토드는 마지막 순간, 심장이 돌로 누르는 듯 압박감이 올 때,
더 이상 숨을 쉴 수가 없을 때,
엘레나의 목소리,
채취,
모습을 떠올렸다.
그를 늘 미소 짓게 하던 아이.
존재 만으로도 그를 숨 쉬게 한 아이.
처음으로 그가 한 일 중에 제일 잘한 것 같았던 아이.
그리고 그를 후회와 눈물로 가슴을 치게 만든 아이.
이만큼,
이만큼,
이만큼,
셀 수 없을 만큼 해도 모자를 만큼,
담을 수 없을 만큼 ,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를 느끼게 한 그 아이를 생각하며,
그리고, 아빠가 미안해
라고 숨이 멎을 때까지 생각했다.
[6년이라는 세월 동안, 연애, 결혼, 출산, 이혼까지 종합 세트로 했다.
여기도 6이라는 숫자가 들어가네.
6시.
6년.
나의 지금의 6시.
그리고 언제부터 언제까지 기간은 알 수 없지만,
또 6년이라는 종합세트가 있다면,
그 세월 안에는 무슨 아이템이 들어 있을까?]
현정은 지하철 역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간다.
여름이 지났다 싶더니, 그 새 늦가을이 되었다.
집에 들어가는 길에 저녁을 먹고 들어가려고,
가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하며, 호수 쪽으로 걷는다.
조금 걸으니, 일본식처럼 생긴 식당이 있다.
사케를 한 잔 마시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어,
식당으로 들어가,
우동이랑 따스한 사케를 하나 주문한다.
그 뒤로 현정은, 달리기를 그만뒀다.
올림픽 공원은 가지도 않는다.
피해 다녔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를 피한 것도 맞긴 하다.
그렇다고 이사를 갈 수는 없으니까.
“Hey, 주. Just like I always eat.”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Hey 라니.
주? 저 보이는 셰프가 주 씨인가?
아님, 이름이 주인가?
늘 먹던 거?
꽤 자주 오나보네.
어.
그런데 왜 목소리가 익숙하지?
설마.
말도 안 되지.
현정은 궁금해서 얼굴을 돌려 볼까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그러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또 벌어지면.
현정은 조용히 남은 음식을 먹고,
술도 따라서 벌컥벌컥 들이킨다.
주라는 사람이 현정에게 와서,
한 병 더 하겠냐는 몸짓을 하고,
현정은 대답 대신,
아니라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게다가 테이블도 몇 개 없는 작은 식당에,
현정은, 주라는 사람이 보이는 바에 혼자 앉아 있다.
남은 술을 따라 다시 들이붓고 잔을 내려놓자,
목소리가 들린다.
“천천히 마셔.”
현정은 입에 담은 술을 참았지만, 뿜고 말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급하게 피해, 다행히 그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튀지는 않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냅킨을 현정에게 건네고,
주 도 달려와, 테이블을 닦아준다.
“Thank you. 주. Could you please give me a bottle of sake?.”
목소리의 주인공과, 주라는 사람이 서로 눈웃음을
건넨다.
브로맨스 마냥.
“나 여기 단골이거든. 여기서 혼자, 셰프도 하고, 서빙도 하는 저 친구는 이름이 주 성주인데, 앞으로 불러도 주성주, 뒤로 불러도 주성주라 내가 그냥 주라고 불러. 나랑 동갑 이더라고. 그거 알아?
동갑 만나기 되게 힘든 거.”
그는 그동안 만나지 않은 사람 같지 않게,
‘잘 지냈냐’ 묻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 반가워’ 도 없이,
아무 일도 없는 듯,
어제도 보고 오늘도 본 듯,
옆에 앉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한다.
“그럼 넌 먹고 가.”
현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려 하자, 재욱이 말한다.
“이쯤 되면 우연을 넘어 인연 아니야.”
그가 팔을 잡은 것도 아닌데,
현정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인연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다시 만나고야 마는 거,
그 인연?
그는, 지금 그런 뜻으로 말하는 건가?
아님,
인연이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나?
그런데 현정은 제이슨과 인연인가 싶다.
인연이라 해도 인연이 라고하고 싶지 않다.
그런 인연도,
우연도 하지 않으려고,
밀어내고,
끊어 내고,
도망까지 갔고,
이제는 피해 다니기까지 하는데,
상대방은 인연이라는 단어를 저렇게 쉽게 내뱉는다.
악연은 아니다. 서로 해를 주진 않았으니.
외나무다리의 원수도 아니다. 원할질 만한 일도 하지 않았으니.
빚쟁이. 물질적 빚쟁이는 아니지만, 굳이 말하자면 마음의 빚쟁이?
하지만 이것도 맞지 않다. 성인대 성인이 자기들 마음 가는 대로 만났으니.
그럼 뭐란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우연이 겹쳐,
상대방이 인연이라고 까지 말하는 이 사이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한단 말인가?
깔끔하게
전 여자 친구,
전 남자 친구,
그래 그렇게 부르는 게 좋을 거 같다.
엑스를 보통 인연이라고 하진 않으니까.
“전 남자 친구.”
“응?”
“인연 아니고, 너랑 나랑은 서로에게 엑스. 그게 맞지.”
“우리가 서로 사귀었다고 인정은 하는 거네.”
“응.”
“이제 와서. 전 여자 친구 전 남자 친구라 부르기 위해서, 과거에 사귀었다고 인정하는 거야?”
“우리가 친구 관계를 넘어 만난 건 사실이고, 기간과는상관없으니, 그 당시 우리의 관계는 너 말대로 여자
친구 남자친구가 맞았어.”
“그리고 지금은 서로에게 엑스고?”
“응. 일방적 이어도, 헤어진 거니까.”
“원래, 그렇게 관계를 확정하고 명확하게 하는 타입이었어?”
현정은 그의 말에 할 말이 없다.
그때는 모호하게 넘어가려던 관계를
지금의 관계를 확정하기 위해 과거의 관계를 확정 짓는 것이나 다름없고,
그는 그녀가 말하려는 의도를 정확히 알고 말하기 때문이다.
주 가 사케를 가져온다.
제이슨은 그의 잔에 한 잔, 따르고 현정의 잔에도 한 잔따라 준다.
현정이 마시는 것과 상관없이 그는 한 잔 마시고는
다시 한 잔 더 부어 마신다.
그때도 술은 잘 마시지 않던 그이다.
한 잔 더 따라 마신 그가 입을 연다.
“왜 그렇게 복잡하고 어렵게 살아?”
“응?”
“나 같은 사람이랑은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면, 보지 않아도 돼. 오늘 같이 또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서로 못 본 듯, 모르는 듯 지나칠게. 아니면 서로 다시는 우연이라도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도 좋고.”
그의 말에 그녀는 할 말을 더 잃는다.
이런 이유들로 그를 떠난 건 아니지만,
그의 입으로 이런 말을 들으니
마음에 쐐 하니 바람이 분다.
그가 말을 잇는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뭐 사정이 있어서 그럴 만해서그렇고 그런 이유들, 너 혼자 생각하고 결론 내린 일들그런 걸 왜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고, 어렵게 살아? 우리가, 길 가다 만나면 안녕하고, 이런 선술집에서 만나면 합석해서 술 한 잔 정도는 마실 수 있지 않아? 친구니, 연인이니, 떠났니 마니, 엑스니 뭐니 왜 그렇게 관계를 확정하고, 선을 그어? 그럴 필요가 있어?”
현정은 그의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두 번 다시는 우연이라도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고, 마주칠 때마다 매번, 반가워할 사이도 아니다.
적어도 현정에게는.
“그럼?”
“친구 해.”
그는 아무렇지 않게,
담백하게,
가볍게
친구
를 하자고 제안한다.
코딩이 복잡한 거 같아도, 단순한데.
그의 머리와 마음도, 복잡한 것 같은데, 단순한 것 같기도 하다.
“난 너보다 나이가 많아.”
단순하고 담백한 그의 말을,
현정은 올드하게 대답한다.
나이 공개하면 끝 아닌가?
“알아.”
그는 또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한다.
“미국에선 어떨지 몰라도, 한국에서는 나이 많은 여자와 나이 어린 남자는 친구 안 해. 적어도 내 세대는
그래.”
현정은 세대, 나이, 문화까지 들먹이며, 올드하게 말한다.
명우랑은 친구 하면서.
“나도 이제 30이라 어린 남자는 아니고, 너랑 나랑 그렇게 나이차가 많이 나진 않을 걸? 그래도, 너보다 내가 어린 게 문제라면, 누나라고 부를게. 어차피 누나도 둘이나 있는데, 동네 누나 하나 더 있는 거 괜찮아.”
“그렇게 라도 날 만나야 해?”
“아니.”
아니라니?
그럼 뭐 하자는 거야?
현정은 순간,
그럼 날 안 만난다는 거야?
라고 물을 뻔했다.
“그럼 뭐야?”
“피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누나도 이 동네 사는 것 같은데, 나도 이 근처 살아. 게다가 이 집은 내가 일주일에 서너 번은 오는 단골집이야. 게다가 검색하면 다 아는 맛집이고. 누나도 검색해서 온 거 아니야? 같은 동네에 검색하면 다 아는 맛집에서, 안 마주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그런데 그때 마다 나 보면 피할 거야?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그럴 필요 없다고. 우리가 서로 뭐 그렇게 큰 일들을 내면서 만나고, 헤어졌다고, 안 그래? 누나.”
그는
누나
라는 소리도 금세 잘한다.
도망가려는,
피하려는 현정에게 왜 그렇게 까지 하냐며,
묻는 대신,
그럴 필요 없다고 한다.
게다가 둘의 만남이
그렇게 큰 일도
그리고 헤어진 일도
그렇게 큰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역시, 그는 예나 지금이나,
‘So cool.’ 이다.
현정은 마음과 머리가 ‘Reset’ 된 거 같다.
‘Reset’ 은 다시 설정하거나 다르게 설정하는 것이다.
혹은 자주 읽은 값을 0으로 변경하는 것이다.
데이터가 있었는데, ‘Reset’ 버튼을 눌러서,
다시
혹은
다르게 설정,
아니면
‘0’ 이 된 것 같다.
현정은 그를 처음 만난 듯,
안녕
하면서 자기소개부터 해야 하나 생각한다.
그가 따라 준 술을 한 잔 마신다.
그는 그녀의 잔을 다시 채워 준다.
“이 근처 살아?”
현정이 묻는다.
“응. 일 시작하고 독립했어. 부모님은 분당에 사셔.“
“일은?”
지난번 그는 그가 K 직장인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나 ‘대 기 업’ 다니는 사람이야.”
재욱이 대기업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말한다.
스스로도 자랑스러운가?
K 직장인이데, 대기업까지 다녀서?
“Awesome 이네.”
둘이 서로 마주 보며, 가볍게 웃는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다닌 미국 회사를 듣고,
현정이 ‘Awesome’이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는 것이다.
“너는? 아니지. 누나는?”
“됐어. 뭐 지금 와서 누나야. 그냥 부르던 대로 해.”
“너, 현정 이렇게?”
“응. 그렇게.”
“넌 한국에 왜 왔어?”
“엄마가 한국에 계셔서.”
“어머니랑 같이 살아?”
“지금 사는 집은 어릴 때 부모님이랑 살았던 집이야. 엄마는 지금 평창에 내려가 계셔.”
“부모님들 은퇴하시고 나면 귀농 같은 거 하신 다던데,그런 거야?”
“아버지는 고등학교 때 돌아가셨어.”
그는 현정의 말을 잠자코 듣는다.
아버지 일은 안 됐다.
슬프겠다.
알지도 못하면서 괜한 소리를 해서 미안하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될 수 없고,
어떤 말을 해주지 않아도 위로가 되는,
가족의 슬픈 이야기는 그런 것이다.
그리고 현정이 처음으로,
그에게, 그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엄마랑 나랑 진짜 너무, 너무 힘들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뭐랄까, 지구가 폭발한 느낌, 그런데 엄마랑나만 살아남은 그런 기분. 그렇게 고등학교를 보내고, 대학교 1학년 마치고 미국으로 유학 간 거야. 그냥 있던 곳을 떠나고 싶더라. 그렇게 갔는데, 그렇게 오래 살게 될 줄 은 몰랐지.”
“어머니는 왜 평창에 가신 거야? 거기 다른 가족 분들이 계셔?”
재욱이 그녀의 가족에 대해 조금 더 가깝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어릴 때 부모님이랑 자주 가던 곳이야. 엄마가 할머니 모시고 가서 사시다가, 할머니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어. 엄마는 미국에도 오시고, 평창에도 계시고 그랬고.”
“그래서 지금도 평창에 계시는구나?”
“응. 난 주중에 여기 있다가 주말에 내려가.”
현정이 말을 마치고 실없이 웃는다.
그런 현정을 보며 재욱이 묻는다.
“왜? 왜 웃어?”
“그냥, 이런 이야기를 너한테 이러고 하는 게 웃겨서. 가족이야기, 내 기분 이야기 같은 거 말이야.”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
“고마워?”
“응. 넌 너 이야기를 잘 안 했잖아. 오늘 네 이야기를 해줘서 고마워.”
현정은 재욱을 가만히 응시한다.
사실 그녀의 이야기 중 반도 안 들려준 이야기인데,
현정은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까 생각해 본다.
재욱의 반응이 궁금하다.
어느덧 밤 10시가 되었다.
친절한 주는 웃으면서,
문 닫을 시간이니 이제 가라는 눈짓을 한다.
내일은 금요일이고, 현정은 평창에 내려간다.
재욱은 대기업에, 그가 대기업이라는 단어에 하도 힘을 주면서 말해서,
그는 내일 일 할 것이다.
대기업 K 직장인이니까.
현정에게는 재욱과 이야기를 더 나눌 시간이 있고,
재욱은 글쎄 모르겠다.
“그만 갈까?”
현정이 말하자, 그도 그래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현정은 재빨리 일어나 그가 붙잡을 새도 없이 계산대로 가, 계산한다.
“왜 네가 해?”
“저번에 네가 샀으니까. 오늘은 내가.”
“알았어. 잘 먹었습니다. 누나.”
재욱이 고개까지 꾸벅이며, 인사를 한다.
“누나라고 부르는 게, 편한가 보다.”
“넌 편해?”
“뭐가?”
“나랑 이렇게 있는 거?”
현정은 대답 없이 식당을 나선다.
“Bye. 주. See you tomorrow. Good night.”
그가 주에게 인사를 하며 나온다.
“꽤 친한가 봐?”
“응. 주중에, 세 번 정도는 와서 먹어. 둘이 이야기할 때도 있고.”
“왜 영어로 말해?”
“내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왔다니까. 자기 영어 공부 해야 한다고, 자기한테 말할 때는 영어로 해 달라고 하더라.”
“그래서 하는 말이, hey, thank you, see you
tomorrow 이런 거야?”
“응. 영어로 말하라고 하니까 더 할 말 도 없더라고.”
그는 말해 놓고 재미있는지,
웃으며 앞서 걸어 나가다,
뒤돌아 보며 묻는다.
“근데 왜 그거 대답 안 해?”
“뭘?”
“나랑 있는 거 편안해?”
현정은, 현정이 아닌 사람으로 만났을 때도
그는 편했고.
지금 이렇게 도망치다 우연히 만나,
그녀에 대해 반의 반 정도 이야기를 해도 편하다.
현정은 그가 묻는 말 대신,
“내일 일해?”
라고 묻는다.
“응. 내일은, 오후에 팀 미팅이라 그것만 참석하면 돼. 이번주에, 하던 프로젝트가 다 끝나서, 좀 한가
해 졌어.”
“한 잔 더 할래?”
재욱도 현정과 좀 더 있고 싶어서,
한 잔 더 할래?
하려던 참이었다.
“응. 좋아. 어디 들어갈까? 여긴 밤새 하는 술집도 많더라고.”
“나 해보고 싶은 거 있긴 한데?”
“뭐?”
“편의점 앞에서 맥주 먹는 거. 드라마 보니까 편의점 앞에 앉아서 사람들 많이 하던데. 혼자 해보기는 좀 그랬거든.”
“그래? 나도 사실해보고 싶었어.”
둘은 걷다가,
편의점을 하나 발견하고는,
안으로 들어간다.
“내가 예전에 한말 기억나?”
“뭐?”
“나, 마트 플렉스 한다는 거.”
“아. 샌드위치 두 개?”
“맞아. 맞아. 오늘은 편의점 플렉스 좀 해볼까?”
둘은 그리 넓지 않은 편의점을 함께
이거 봐라,
이런 것도 판다.
이건 뭐지 하면서,
구석구석 둘러보며,
이것저것 가득, 바구니에 담는다.
여전히 배는 부르지만 편의점에서 파는 음식들도 사고맥주도 산다.
“우리 너무 많이 산 거 아니야?”
“괜찮아. 보관해도 되는 것들도 있는데 뭐, 나중에 먹으면 되지. 내가 산다.”
“반반 해.”
“됐어. 나 마트 플렉스 좋아한다니까.”
“그러게, 신나 보여.”
“의자에 가 앉아 있어. 계산하고 금방 나갈게.”
현정은 편의점에 나와, 의자에 앉는다.
피부에 닭살이 살짝 오를정도의
차가운 공기가,
북부 캘리포니아의 밤 날씨 느낌이 나서 좋다.
양손 가득 봉투를 들고 나온 그는 현정 앞에 앉아,
봉투에서 맥주를 꺼내 현정에게 건넨고는
편의점 안의 전자 레인지에 돌린 컵 볶기를 들고 나온다.
아직도 뱃속에 먹을 공간이 남았나 싶지만,
편의점,
편의점 앞 의자,
밤공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전자 레인지에 데운 플라스틱 용기 안의 음식,
그리고 차가운 맥주는
뱃속의 다른 부분을 채울
또 다른 특별한 음식이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