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Seoul, Soul 13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ye Jang Oct 29. 2024

열세 번째 이야기

고백? Go back?

아. 머리야.


얼마를 마셨을까.


현정은

마시고,

맥주 캔들을 테이블에 탑처럼 쌓고,

또 마시고,

세우기를

여러 번 한것 같다.


어제 밤에 한 행동과 말들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현정은 아직도 그녀의 몸과 정신 안에,

술을 먹고 취할 에너지가 남아 있는 것이 신기하다.


겨우 침대에서 일어나, 침대 앞 화장대의 거울로

얼굴을 보니,

부스스한 머리,

지우다 만 화장,

엇갈려 채워진 윗옷만 걸친 잠옷.

아마도 바지는 입다 말았는지 침대에 던져져 있다.


부얶으로 가,

케틀에 뜨거운 물을 데우며,  

꿀을  한 스푼 퍼서 입에 넣는다.   


그때 지숙에게 전화가 걸려 온다.

“네. 엄마.”

“언제 도착해? 오고 있지?”

“아. 아뇨.”


시계를 보니, 벌써 정오다.

이렇게 까지 늦잠을 자다니.


“엄마. 아직 출발 안 했어요.  곧 갈게요. 무슨 일 있으세요?”

“무슨 일은. 엘레나가 바다 가자고 해서, 너 오면 같이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직도 출발 안 했으면

언제 오니?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크게 일을 겪은 지숙과 현정은 시간이 지났어도,

늘 서로에 대한 걱정과 염려가 많다.


게다가 서로 의지 할 가족 이라고는 둘 밖에 없지

않은가.


별일 없지?

하고 묻는 것이 일상이다.


처음에는 이런 말과 행동에,  

서로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그럴 때마다 재철이 생각나 힘들었지만,

이제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일 만큼은 되었다.


“아니에요. 그냥 늦잠 잤어요. 알람도 해 놓는다는

걸 잊어버렸나 봐요. 빨리 준비해서 갈게요.”

“이왕 늦은 거 천천히 준비해서 와. 서두르지 말고.”

“네. 엄마 걱정 하지 마세요.”


현정은 전화를 끊고,

따뜻한 물 한잔을 마시고는,

서둘러 준비해 나간다.


지끈거리는 머리가 버스 안에서 잠을 좀 자면

나아지길 바란다.


버스에서,

잠시 눈이라도 붙이려고 하지만,

머리도 지끈거리는데,

마음까지 어수선 하고 복잡하다.


어제 뭐 했지?

무슨 말했지?


드문 드문 기억이 난다.


그가 집까지 바려다 주었다.

그래, 그가 바려다 준 이후로는 아무 일도 없었어.

현정은 지끈 거리는 머릿속으로 기억들을 쥐어 짜낸다.

집에 같이 들어왔고,

그 정신에, 그녀는 그에게 문 한잔을 준 것이 기억이

난다.

그리고 방으로 갔다.


그는 아마도 그 사이 갔겠지.


그리고,

그에게 무슨 짓이라도 안 한 자신이 대견하다.


그와 이야기하면서,

그를 보며,

간간히 그런 생각들을,

그의 동의 없이 했고,

행동으로 까지 옮겼다면,

짓 이 맞으니까.


술김에 저지른.


잘했어 현정아.

그럼. 그러면 안 되지.


다시 눈을 감는다.


그녀의 귓가에,

그에게

마구잡이로 내뿜던 말들이,

귀에 쏙쏙 받히듯이 들린다.


하.

이제는  정말 도망가야겠다

라고 현정은 생각한다.


이건 ‘Reset’  정도가 아닌,

‘Delete’를 눌러,

지워야 한다.


“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 깜짝 놀랄걸?”

“어떤 사람인데? 말해줘. 궁금해.”


그는 얼굴을 현정에게 바짝 들이대며,

30대의 남자 얼굴 답지 않게,

순수하고 맑은 미소를 지으며,

애교 석인 목소리로 말한다.


적어도 현정이 보고 듣기에는.


“궁금해?”

“궁금해.”


현정은 그의 매력적인 저 미소와 말투에 넘어간

것이라 생각한다.


그때 그 모습이나, 지금이나 왜 변함없이,

그는 왜 여전히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일까.


적어도 그녀의 눈에는.


게다가 그때 보다,

좀 더 남자답게 느껴지는 분위기까지.


보고만 있어도 참 즐겁게 만드는 그다.


“난 널 이용한 거야.”

“이용? 어떻게? 내가 이용할 게 있나?”


현정은 셔츠 사이로 보이는  제이슨의 가슴과 넓은

어깨를 바라본다.  


그때처럼 지금도 탄탄한 가슴을 가지고 있을까?


현정은 상상하며,

그녀의 시선을 가슴에서 복근,

그리고 좀 더 아래로 내려 보다,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든다.


도대체 넌 날 왜 자꾸 이런 사람으로 만드는 거니.


“너, 운동도  하지 마, 너 그런 몸으로 사람 그렇게 유혹하는 거 아니다.”

“유혹? 내가? 아. 그런 거라면 이용이나 유혹이 아니라반했다라고 하는 거야. 나 아직도 꽤 괜찮은데.”


제이슨은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쓸어내리며,

또 환하게 웃으며 말한다.


“됐어. 너 그런 어깨, 그런 가슴으로 여자 앞에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리고 너 그렇게도 웃지 마. 넌 왜

그렇게 잘 웃어?”

“웃는 게 문제야?”

“그러니까 내가 너의 그 웃음과, 그 몸, 그 젊음을 이용한 거라고.”

“이용이 아니라 반한 거라니까.”


현정이 맥주를 들이 킨다.

정신이 몽롱 해진다.


“이혼했어. 이혼하고, 널 만난 거야. 아니지, 널 만난 게 아니라, 'Coastal Trails hiking'  클럽에 간 거지.”

“클럽에서 나도 만난 거지.”

“그래. 맞네. 역시 스마트해.”


현정이 취해서 웃는다.

재욱은 현정이 여전히 궁금하고,

그리고 그전에 보지 못한 그녀의 모습들이 귀엽기까지하다.


재욱은 그가,

여전히 그녀에게 빠진,

사랑에 눈먼 미친놈이라고 생각한다.


빠진 것도 좋고,

눈이 먼 것도 좋고,

미친 것도 좋다.


지금 그녀와 함께 이렇게 있는 것만도 충분하다.


“이혼했어. 이혼했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혼하고 나서, 나는 다른 사람처럼 살고 싶었어. 맨날 나는

나를 막 몰아붙였거든. 열심히 살려고 잘 살려고 반듯하게 살려고. 도대체 그게 무슨 기준이었는지 몰라.

그냥 내가 정해놓고 그 틀에 맞게 살려고 했어.”


재욱은 아무 말 없이 현정을 바라보고,

현정은 말을 잇는다.


“이혼했어. 이혼 하고 나니까. 아니야. 그 전 부터 그랬는지도 모르지. 그냥 갑자기 내가 너무 답답하게 산 거 같은 거야.  그래서, 뭐 할까 하다가, 클럽에도 참여한 것도, 널 만난 것도. 그래 널 만날 수 있지. 하지만 너한테 했던 나의 모든 행동과 말은 내가 아니었어. 그건 내가 아니었다고.”

.

현정은 왜 이혼했으며, 전남편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이혼 사유는 본인들에게나 중요하지 남들에게는 그저 대화의 소재거리 밖에 안된다.

그리고 토드에 대해서도, 물론 그가 생존해 있다 해도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사망한 전 남편에 대해선 더더욱 말할 필요가 없다.


현정의 입장에서,

그녀는

이혼녀,

싱글맘,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현정은 이혼했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한다

재욱은 이혼이 그녀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그것이 나쁜 영향인지, 좋은 영향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마음을 알고 싶다.


“뭐가 다른데? 난 네가 뭐가, 어떤 것이 다른지 모르겠는데.”

“달라. 나라면 그럴 수 없어.”

“뭐가?”


현정이 말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본다.


재욱도 까맣지만,불빛에 환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재욱은, 그녀가 말하는 다르다는 것이 뭐가 다르다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감정적으로는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변화된 삶에서의,

감정과, 생각의 변화 아닐까?

그리고 충분히 그럴수 있고.


“널 속인 건 아니지만, 말하지 않은 건 맞아. 말하고

싶지 않았어. 내 주변의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 다 아니까. 클럽에서는 아무도 나에

대해 묻지 않더라. 그게 좋았어. 나를 전혀 모르는 새로운 사람들. 그래서 너한테도 말하고 싶지 않았어. 이혼녀, 한 아이의 엄마, 그런 거 자체를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라, 그냥 나는.”


현정이 잠시 말을 멈춘다.

재욱은 아무런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가만히 있는다.


“그냥 나는, 그때 그 순간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었어. 누구의 부인 이라서, 이혼녀라서, 엄마라서 처음엔, 외국인 유학생이라서, 직장인이라서, 누군가의 딸이라

그런 나 말고, 그냥, 나. 말이야. 그런 거 알아?”


그녀가 그를  바라보자 그가 말한다.

“예뻤어. 지금도 그렇고.”


현정은 순간,

어디서 많이 듣던 노래인데

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그녀가 즐겨 듣는 밴드의 노래 가사 아닌가.


예뻤어


“뭐라고?”

“다 너잖아. 역할과 호칭만 다를 뿐 다 너잖아. 그리고 너란 사람, 내가 보는 너는 그때도 지금도 예쁘다고.

지금 이 순간, 너로 있는 네가 나는 이쁘다고.”


재욱은 그녀의 외모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존재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다.


재욱의 말이 마치 노랫말 가사 같다.

현정은 재욱이 컴퓨터를 하지 않았다면,

작사가가 돼도, 괜찮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역할과 호칭은 달라.

그래도 다 너잖아.

나는 그냥 너를

바라보는 거야.

그런 너는


그리고 마지막은,

지금 최애 밴드의 노래 가사.


예뻤어.


현정은 할 말을 잃고 두 눈을 깜박이며,

그를 잠시 바라본다.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왜?”

“넌 그런 말을 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해?”

“어때서? 예쁘다, 사랑한다, 귀엽다. 좋아한다, 기쁘다,슬프다는 다 감정 표현이야. 내가 내 감정에 솔직하게 말하는 게 어때서?”


그의  말이 맞다.

그의 감정 표현이다.

그는 그의 감정 표현에 솔직 한 것이다.

그녀가 그의 감정 표현을 제한할 이유는 없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그녀의 몫이고,

그녀의 감정이다.


그리고 현정은 다시 생각한다.

그동안 그녀가 얼마나 그녀의 감정을 억제하고

제한하며 살았는지.


그때의 나는 내가 아니야


라는 말을 풀어 해석하면,

그동안 감정을 통제하고,

억제하고,

조정하며 살았던

그녀는

그에게

그녀의 감정을 표현 했었던 것이다.


그녀의 내면에 얼마나 많은 사랑과 따스함과 달콤함이 있는지,

그에게 표현했었다.


“아무튼, anyway,  너는 그때의 현정이나, 지금의

현정이나 나에겐 같아.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나에게 넌 예쁜 사람이고.“


현정의 마음이

몽글 몽글 해진다.

이 상황에서

그의 말이 너무 좋아

헤죽헤죽

웃음까지 나온다.


‘Anyway’ 예쁘다고 하지 않는가.


“아무튼, anyway,  나는 너보다 한참 나이가 많고,

이혼녀고, 아이가 있어. 그게 지금 나의 현실이야. 네가

만났던 현정은 그런 현실에서 잠깐 도망쳐 나왔던 사람이야. 네가 나에 대해 다 알고 만난 건 아니잖아.

그러니 그때의 우리의 만남은, 나에게는 꿈같은

거였어. 그리고 지금 나는 현실에 있고, 그 꿈을

다시 꿀 마음은 없어.”


그래, 서로의 감정은 그렇댜 쳐도

현실은?


현정은

현실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현실이 배제되었던 상황,

그때를

꿈이라 표현한다.


“내가 왜 꿈이야?”

“그럼 뭐야?”

“나도 너에게는 현실이야. 그때도 너란 사람을 만난

거고,  지금은 너에 대해, 조금 더 알고 만나는 사람이고.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꿈인적이 없어. 현실이지.”

“아니야. 아니야. 그런 말이 아니야. 넌 이해 못 해.”


현정은,

아니다.

이해 못 한다.

라고 말하지만,

그녀 조차도,

뭐가 아니고,

무엇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이제 그는,

프로그램 짜듯이,

떨어지게 정확한 말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말은 그녀의 마음을

또,

따스함과 사랑으로 채워줄 것이다.


이런.

그에게 또 말렸다.


“응. 이해 안 해. 한다고도 안 할게. 그런데, 현정.

나는 상관없어. It dose not mean, I don’t care.

I mean, no problem at all. 넌 너의 현실이 왜 너에게

문제라고 생각해? 게다가 나도 그리고, 남도 아무도

너의 현실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건 다 네가 생각하고, 마음먹기 나름 아닐까?”


그의 말이 맞다.

그녀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문제가 아니다.


남들은 그것이 문제다 아니다 생각하지 않는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사는 것은,

본인이 의식해서 그런 거지,

사실 사람들은 남에게 그렇게 관심이 있지 않다.


그러니, 현정이 계속 문제라고 생각하면 문제고,

괜찮다 생각하면 괜찮은 것이다.


재욱은, 그와 그녀의 관계에서,

문제가 되는지 안 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신,

현정의 마음과 생각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노래 가사 같다.


남의 생각이나 시선이 아니라,

너의 마음은 어떤데?

정말 문제라고 생각해?

문제가 될 게 있어?

No problem at all.


재욱은 타고난 작사가 일 것이다.

이 참에 직업을 바꿔도 성공하지 않을까?


이때부터 현정은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고,

들어부어 마신 거 같다.


집에는 걸어온 것일까?

기어 온 것일까?


주말을 지숙과 엘레나와  보내는 동안,

현정은 계속 머리가 아팠고,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그녀의 현실과 삶이 문제라고 생각했고,

그는 그 모든 것들이,

생각하기에 따라 마음먹기에 따라,

문제가 아니라고 제기했다.


그렇다면 현정이 문제라고 고민하는 것은 무엇일까?

왜 그에게서 도망치려 했던 것일까?
무슨 현실에서 도망쳤으며,  
무슨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며,  

지금은 현실인가?

또 다시 꾸는 꿈인가?


그리고, 틈틈이 그를 생각했다.

대놓고.

생각나는 대로.


집에는 잘 갔을까?

출근은 잘했나?

주 네 가게에 또 갔을까?

주말에는 뭐 하고 있을까?


대체 그의 존재가 무엇 이길래,

만났을 때나,

잊으려 할 때나,

그리고 만나지 못했을 때,

그리고 지금 이렇게 우연히 다시 만난 이 모든

시간 속에서,

그녀의 마음을 흔들고,

생각하게 만드는 지,

그의 존재가

그녀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제는 심각하게 고민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재욱은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그동안 어떻게 참았는지,

길고,

시끄럽게 떠들던 그녀는 집에 오자,

조용해지더니 방으로 들어간다.

열린 문 틈으로 보니,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온 그녀는,

옷을 갈아입는가 싶더니,

그대로 침대에 눕는다.

방으로 들어가, 잠옷으로 갈아입혀 주고

이불이라도 덮어 줄까 생각하지만,

그녀 허락 없이 방에 들어가는 건 아니다 싶다.


지금은 또, 조심스러운 사이니까.


나가려는데 식탁 위에 현정의 사진이 있는 팸플릿이 놓여 있는 것이 보인다.

그는, 호기심에 팸플릿을 하나 챙기고, 문 틈으로

현정의 상태를  다시 학인 한  후,  현관문이 잘

잠겼는지, 점검 또 점검하고 그녀의  집을 나선다.


새벽 3시다.


택시를 불러 타기도 그렇고,  

버스는 아마 운행하지 않을 것이다.


재욱은 걷기 시작한다.

서울의 새벽 거리,

차가운 공기,

밝게 켜진 가로등 불 들,

걸어서,

그녀의  집에서 그의  집까지 얼마쯤 걸리는지,

재 본다.

가까운 거리만큼이나 재욱의 마음은 그녀와 이 전보다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지만,

그녀의 마음은 모르겠다.


이젠 다 털어놓고,

완전히 떠나려 하는 건지,

아니면,

멀어져야 했던 마음을 가까이하려고 털어놓은 건지.


제니퍼가, 새 수강자가 왔다며, 등록서를 내민다.

현정은 학생이 꽤 된다

일단,  영어로 수업하지만, 학생이 이해하지 못할 경우 한국말로도 설명을 들을 수 있어,

학생들의 만족도가 좋고, 지역 위치상, ‘IT’ 회사가

많아,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쪽 업게 에서 일하는 이들이 대부분인데,  컴퓨터 사이언스를 전공하고,

그 분야에서 박사까지 공부한 현정은,

아카데믹 쪽으로도 뛰어나고,

또한, 비록 몇 년 전 일이지만,

그녀는 ‘IT’ 회사 프러덕트 매니저로 일한 경력도 있어,

그녀의 경험들도 수강 자들에게는 유용한 배움이 되기때문이다.


매일매일 수강자가 하나둘씩 늘어나는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Thank you.”


현정은 등록서를 들고, 강사 룸으로 간다.

여러 명이 공용으로 쓰는 룸으로,

책상이 벽에 길게 나란히 붙어 있고 그 앞에 컴퓨터와 의자가 듬성듬성 놓여 있다.

몇 시간씩 그리고 며칠씩 일 하는 곳이 아니라서, 지정된 책상이 없다.

오는 대로 앉아서 공용 컴퓨터와 프린터를 쓰던가,

개인 컴퓨터를 가져와 가운데 놓인 소파에 앉아 작업을 해도 된다.  

방 한쪽에 다른 작은 공간이 하나 있는데,

간단한 스낵을 할 수 있는 작은 싱크대와 냉장고,

커피 메이커와, 전기 포트가 있고, 그리고 작은 테이블까지 있는 부엌이 있다.


현정은 창문이 보이는 책상에 앉아, 가방에서 개인

랩탑을 꺼낸다.

어제 작업한, 새로운 자료가 있어, 수업 전에 한번 더 검토하고, 출력을 하려는 것이다.


수업 시간이 다가오자, 부얶에 가서, 커피를 내려 텀블러에 담아 강의실로 간다.


오늘은 수요일, 오전에 시작해, 늦게 까지 있는,

수업이 가장 많은 날이다.

오전과 오후 수업을 마치고,  간단하게 저녁을 해결하고, 6시부터 8시까지 할 수업 준비를 한다.


새 수강자 등록서를 받은 것이 생각나고,

또 새 수강자는 아직 안 온 것도 같아,

파일 안에 넣어 둔 등록서를 꺼내  본다.


제이슨 재욱 정.


현정은 등록서를 보고 놀란다.

설마 이렇게 똑같은 이름을 가진 이가 또 있을까.


재욱은 7시 수업에 왔다.  

그날 그렇게 술을 마신 후,

2 주만에 만나는 것이다.


현정은 재욱의 연락이 없자,  

이제는 그도 그녀에게 질렸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녀여도, 그런 날의 모습은 질릴 것이다.

조절 없이 들이부은 술.

두서없이 마구잡이로 쏟아 내던 말.

생각만 해도 창피해서,

이제는 진짜 도망가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그에게도 연락이 없다.

그의 연락처를 지우고, 새로 받은 번호도 차단했다는 것을 나중에 기억했다.

재욱이 차단된 것도 모르고, 계속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보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

그런 술주정은 한번만 봐도 질리지.


재욱은 새 프로젝트가 바로 생겨, 팀을 꾸리고 하느라 바빴다.

바쁘다고, 현정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전화 번호는  그녀가 지웠는지, 차단했는지, 음성 사서함으로 계속 넘어가고.

그렇다고 집 앞에,


짜잔


하고 나타나는 건,

그녀의 마음이 어떤지 모르니,

그녀를 언짢게 할지도 모른다.


퇴근하는 길에, 지난번처럼 인연이라고 우겼던 우연에기대,  길거리를 서성였지만 이번에는 성사가 잘 되지 않았다.


현정의 집에서, 가져온 팸플릿을 보며, 며칠 망설이면서,  시작한 프로젝트를 어느 정도, 계획을 짜 놓고,

수강 신청을 한 것이다.


뭐. 될 대로 돼라

라는 마음으로.

사실은 치밀하게, 마음의 준비도 했지만.


수업이 끝나자, 현정은 그에게  잠시 이야기를 해도

되냐고 묻는다.


재욱은 그녀의 말이 반가우면서도 긴장이 됐고,  

학원 앞 카페에서 기다리겠다고 한다.


현정은 수업 후, 정리를 하고, 재욱이 기다리는 카페로 간다.


“뭐 마실래?”

“난 괜찮아. 잠깐 이야기하면 돼.”

“그래도 뭐 좀 마셔. 내가 알아서 시킨다.”


재욱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하고는, 현정에게 따뜻한카모마일 차에 꿀을 넣은 것을 주문해 가져 온다.


“커피는 하루종일 많이 마셨을 것 같아서.”


재욱이 자리에 앉자 현정은 재빠르게 말을 꺼낸다.

“네가 왜 수업을 들어?”


역시 예상했던 여러 말 중에 하나다.

대답은 이미 준비했으니, 간단히 풀면 되는 문제다.


“수업 듣는 게 어때서? 나 공부해야 돼.”

“너한테 필요한 수업이라 생각해?”


이것도 예상한 말이었다

역시.

그는 그가 과학고의 재원이었으며,

’MIT’ 학생인 수재였음을 상기하며,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그런 게 어딨어. 공부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MIT 졸업에, 스탠퍼드 대학원까지.”

“대학원은 일 년만 다녔어.”

“암튼, 미국에서 대학 졸업하고, 미국 회사에서 일까지 한  사람이 들을 만한 수준은 아니야. 미국으로

이제 막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듣는다고.”

“지금 선생님으로서 수업 방향에 대해 상담해주는

거야? 이렇게 개인 적으로? 학원 서비스 좋은데.”

“장난하지 말고. 네가 들을 수업은 아니야.”

“나 한국 오고 나서, 영어 감 많이 떨어졌어. 공부해야 돼. 그리고, 미국회사로 다시 지원할지도 모르고. 그래서 계속 영어 공부 해야 돼.”


이 말도 현정에게 막무가내로 우기는데 쓰기로

준비했던 것이다.


“그럼, 다른 반 수업 들어. 내 수업은 비기너야. 다른

클래스에 원어민이 하는 어드밴스 클래스도 있어.”


역시 예상문제.


“안 그래도, 테스트 봤는데, 나 비긴어야. 이미 상담실에서 정해준 거야.”

“거짓말하지 마.”

“진짜야. 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한국 남자들은

군대를 다녀오면, 이전에 했던 것들은 잊어버리고,

군대에서 새로 배운 것들을 습득하는 경향이 있거든.

훈련, 생존, 이런 것들 말이야.”


누가 들으면, 직업 군인에,

전쟁까지 참여 한 줄.


“여기서 왜 그런 말이 나와.”

“게다가 나 K 직장인이잖아. 영어 쓸 일이 많겠어?

컴퓨터 용어나 쓰지.”


누가 들으면,

되게 오래 K 직장을 다닌 줄.


“어쨌든 그렇다고 사실을 알려주는 거야. 나도 내 영어

수준에 실망스럽지만, 뭐 어떻게. 테스트 결과가

그런데.”


이 말은 준비된 말은 아니지만,

꽤 그럴싸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알았어. 그럼 다른 비기너 반으로 옮겨.”

“왜?”

“왜긴. 내가 너랑 안 마주쳤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그랬어?”

“뭘?”

“뭐가?”


현정은 잠시 말을 멈추고,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다.

그와 대화를 하려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그의 해맑은 웃음에 넘어가면 안 되고,

그의 말이 맞다고,
마음속으로 맞장구도 치면 안 된다.

반박 거리도 찾아서는 안된다.

그의 반격에 늘 패배하기 때문이다.


현정이 말을 꺼내려 하자, 그가  먼저 입을 연다.

“안 마주쳤으면 좋겠다는 말은 지금 들은 거야.”

“그래?”


여기서,

그래? 라니.  

현정은 속으로 이건 무슨 대답이지 생각한다.

그럼 지금이라도 알았으니까.

혹은 내가 매번 말했는데

라고 말해야 하지 않는가.


그래 기억난다.

현정이 안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은 했었다.

그리고, 그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었고,

현정은 이유대신,

오히려 그에게, 그녀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게 이유라면 이유고.


현정이 말을 하려 하자, 그가 먼저 말을 한다.

“너 만날 려고 일부러 공부하는 건 아니야. 영어 쓸

일이 자꾸 없어지고, 그래서 영어 학원을 다녀 볼까

생각은 하고 있었어. 너네 학원 우리 회사에도 광고

하는  회사고. 오늘 이 시간 대가 잘 맞아. 물론 나도

어드밴스 정도 기대 했는데, 비기너라 잖아. 원래 우리

나라가 영어가 제2 외국어 여도, 영어에 대한 기대치

좀 높아. 그건 알지?  그런 거야. 그렇게 등록하게 된

거라고. 그리고 너도 보면 좋고.”


현정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할 말을 잃는다.


그래도 안돼.

듣지 마.

옮겨.

그러면 내가 학원 그만둔다.


반박할 말 정도는 이뿐인데,

너무 유치하지 않은가.


“주 네 가서 뭐 좀 먹을래? 지금 가면, 9시 좀 넘겠다. 좀 늦게 왔다고 뭐라 하겠지만, 뭐 어때.”

“내일 아침에 수업 있어.”

“그래? 그럼 빨리 집에 가자.”


둘은 카페에서 나와,

함께,

지하철로 향한다.


같은 동네 주민 아닌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