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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Seoul, Soul 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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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 Jang Oct 31. 2024

열다섯 번째 이야기

2023년, 일상으로 채워지는 가을

재욱은,

월요일 수업은 회사에서 미팅이 길어질 때가 있어

빠질 때도 있지만,

수요일 수업은 꿋꿋이 참석해,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수업을 듣고,

수업이 끝나면,

눈치껏,

현정의 뒷정리를 돕고,

자연스럽게 학원을 같이 나와,

지하철을 탄다.


같은 동네 주민이니까.


재욱은 역시 누나 둘 사이에서,

눈치와 자연스러움을 잘 배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군대 갔다 오면, 이전 것은 그렇게 다

잊어버려?”

“응?”


아.

재욱은 학원 수강에 대해 현정과 이야기할 때,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목적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군대 이야기를 했던 것이 생각난다.


“그럼. 내가 말했잖아. 생존, 훈련 이런 거.”

“그래서 그렇게 다 잊어버려서, 영어 공부도 다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

“응? 응.”

“무슨 군대를 다녀왔길래 다 잊어버렸어?"

“카투사.”


현정이 아무 말 없이 재욱을 바라보자,

그는 현정이 ‘카투사’를 모르나

라고  생각하며 묻는다.


“카투사가 뭔지는 알지?”

“음. 글쎄.”


카투사를 모르는 사람도 있구나 생각하면서,

재욱은 그녀가 대학교를 1학년 다니고, 미국에 갔으니,

모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군대를 갈 때, 해군, 육군, 공군, 해병대 등등을 지원해서 가는데, 특징을 보면.”


군대 이야기에 신나 하는 재욱을 보며,

현정은 고개를 좌우로 설레 설레 흔들며 말한다.


“아니. 그렇게 까지 설명하진 않아도 되고.”    

“아. 그렇지. 그러면 내가 다녀온 카투사는 쉽게

말하면, 미 8군 한국군 지원단이야.”

“그럼 넌 군대를 미국으로 간 거야?”

“응?”


재욱은 순간 이게 이렇게 못 알아들을 말인가

생각한다.

현정과 대화가 늘 잘 되는 것만은 아니구나

라고 생각한 건 처음이다.


“미군 이라며?”

“아니. 그게 아니라. 미군인데, 한국에 미군이 있잖아. 그건 알지?”

“아 맞다. 알아. 알아.”          


현정은 알고 있는 게 나와서 기쁜지,

안다고 여러 번 말한다.  


“맞아. 맞아. 나는 군대를 거기로 다녀온 거야.”

“응. 그러니까 군대를 한국에 있는 미군 부대로

다녀왔고, 그게 카투사라는 거지?”

“응. 맞아. 정확해.  ‘Korean Augmentation to the

United States Army’ 그래서 KATUS.”

“잠깐. 그럼 영어를 잊어버린 것보다 영어를 더 많이 쓴 거 아니야?”

“어?”

“미군부대 라며? 영어로 말하지 않아?”


아.

예상치 못한 질문이다.


“군대 영어는 좀 달라. 주로 명령이라, 쓰는 말 만해.

그래서 알던 영어도 다 잊어 먹은 거야.”


현정이 의아해하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재욱은 현정의 손에 들린 이어폰을 잡아,

귀에 꽂으며 말을 돌린다.


“무슨 음악 들어? 같이 들을까?”


현정은 요 몇 년,

푹 빠진 그룹의 노래를,

그와 같이 듣는다.


같이 탄 교통수단,

중요하지는 않지만,

서로를 알아가는 시시콜콜한 대화,

이어폰으로 함께 듣는 음악.

멜로드라마에도 꼭 나오는,

시작하는 연인들의 필수 코스 중의 하나 아닌가.

물론 승용차를 타기도 하지만,

지하철이나 버스가 주는 감성이 있지.


그렇게 그들에게 함께 하는 시간들이 흐르고,

오늘도, 재욱은 주 네 가서 간단하게 뭘 먹자고 한다.

매주 그는 묻는 말이다.

지치지도 않고,

꾸준하게.


재욱과 들어오는 현정을 주 가 반갑게, 눈인사를 한다.


“나는 네가, 우동이랑  사케를 좋아하는지 몰랐어.”

“면을 좋아하는 편이야. 특히 우동.”

“사케도 좋아하고?”

“소주나 와인보다는.”


현정은 재욱과 있으면,

늘 그의 눈을 피하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그가  여전히 매력적이라,

한번 쳐다 보면,

눈을 뗄수 없기 때문에.

적어도 현정에게는.


음식을 거의 다 먹어 갈 즈음,

현정은 그를 마주 보며, 묻는다.


“이젠 짧은 머리네? 머리색도 바꾸고."

“아. 지금 본거야?”

“아니. 지금 물어보는 거야?”

“군대 간다고 일단 잘랐고, 머리가 자라면서, 원래

머리색이 나왔고.”

“귀걸이는 이제 안해?”

“IT회사여도, 한국회사는 깔끔하고 단정한 걸 선호해서, 귀걸이도 빼고, 목걸이도 빼고, 지금은 이거 팔찌

하나, 시계하나. 나 악세사리 좋아 하는데, 안하니까

허전해. 그런데 나 어때? 그때보다 별로야?”

“지금도 좋아.”

“응?”

“뭐가?”

“다시 말해봐.”

“뭘?”

“좋다고 한 거 같은데?”

“아니. 네가  별로야?라고 물으니까. 별로지 않다는

뜻으로 말한 거야. 좋다는 게 아니라.”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속으로만 생각했던 말이 툭 튀어나와

당황스럽다.


그런 현정을 재욱이 웃으며 바라본다.

그녀가 뭐라고 말한 들,

그녀와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것 만도

충분하다.


“내 말은 듣고 있는 거지? 그렇다고 말한 거야.”

“알았어. 나야 뭐, 어떤 스타일이든 다 괜찮지 않아?”


재욱이 그의 얼굴을 좌 우로 현정에게 보여 주며 묻자,

현정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그만 가자. 너 한국에 오더니, 좀 변 한 거 같아. 이

정도로 자기애가 넘치진 않았는데.”

“그래서 나 별로야? 여전히 괜찮지 않아?”


그는 이번에는 얼굴을 현정 쪽으로 더 바짝 들이대며 묻는다.      

현정은 재욱을 살짝 밀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자,

재욱은 현정의 손을 잡고 일어나며,

그녀를 그쪽으로 당긴다.

현정의 손이 재욱의 손에 있고, 서로의 가슴이 마주

닿을 만큼 가깝다.

현정의 심장이 주책맞게,

이 순간에,

콩닥

거린다.


현정은 다른 손으로 재욱을 밀어내며 말한다.

“그래. 너 괜찮아. 짧은 머리 긴 머리 다 잘 어울려.

됐지?”

“나 잡아 달라고 잡은 건데, 나도 일어나려고.”

“이게 정말.”

“무슨 다른 생각이라도 한 거야?”

“너 왜 이렇게 사람이 능글맞아졌어? 그래도 예전엔

상큼하고 신선한 느낌이었는데.”

“그러니까. 나 네가 생각하는 어린 남자 아니라고. 그때도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야. 나는 남자야. 네가

그렇게 바라보는.”


현정은 재욱이 그녀의 마음을 들었다 났다,

심쿵하게 했다,

설레게 했다,

다가왔다

잠시 뒤로 한 발짝 뺏다

정신이 없다.


“알았어. 네가 하고 싶은 거, 하고 싶은 말 다해. 뭐

자기애를 맘껏 표출하던, 남자애든 남자 어른이든,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재욱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짓는다.

현정은 예전에, 모나리자 미소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저 웃음의 의미를 모르겠다.


재욱은 현정과 조금은 더 가까워진 거 같아 기쁘다.

원래 더 가까웠었지만.

요즘 다시, 떨어져 있던 시간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까워지고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너무 기쁘지만,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속마음을 숨겨 보지만,

입가에 저절로 지어지는 미소를 참기는 힘들어,

겨우 옅은 미소로 표현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 잡고 있는 손을 놓지 않고,

이대로 잡고 걷고 싶다.

하지만 현정은 재욱의 손을 놨고,

주 네 가게를 나와 앞서 걷기 시작한다.

재욱은 그녀의 뒤를 쫓아, 그녀 옆에서 나란히 걷는다.

재욱은 이 정도도 충분하다 생각한다.


어느 순간 현정은,

그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같은 정거장에 내리고,

저녁식사를 같이 한다.

주네 말고도, 둘은 어떤 날은,

2호선 안에 있는 역에 내려,

맛집을 찾아가기도 한다.

라이언이 알려준 곳도 가봤다.


어느 날부터,

재욱이 수업에 오지 않는 날에도,

현정이 일찍 끝나는 날은  

근처에서 서점을 가거나,

쇼핑을 하며 그를 기다리고,

그녀가  늦게 끝나는 날은,

그가 학원 앞 카페에서

컴퓨터를 하며 그녀를  기다린다.


재욱이 회사가 늦게 끝나는 날은,

현정은 집에 먼저 오지만,

늦은 밤 그는 그녀의 아파트 앞에 와서,

잠깐 얼굴이라도 보고 간다.


함께 타는 지하철.

함께 내리는 같은 역.

자연스럽게 걷는 길.

집 앞.

잘 가.

잘 자.

라는 인사.


어느 날부터 서로에게 일상이 된 일이다.


현정은, 자연스럽게 그와 함께 하는

이 모든 시간들,

공간들이,

오래 한 것처럼,

익숙하고 편안하다.


현정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재욱을 돌아보며 그를 부른다.

“재욱아.”

현정이 처음 불러 보는 그의 한국 이름이다.

“아. 네가 부르는 내 이름 너무 좋다. 다시 불러봐.”

“재욱아.”

“응?”

“이러지 마.”

“응? 뭘?”

“정말, 내가 이 익숙함과 편안함을 놓치고 싶지 않으면 어떻하려고 그래?”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가 그에게서,

편안함과 익숙함을 느낀다고 한다.  

놓치고 싶지 않다고도 말한다.


“어떻게 되는지 한번 해봐.”


역시나 그의 대답은,

괜히 물어봤나 싶을 정도로,

맞는 말이다.


재욱은 현정에게 조금 더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따스하다.

현정은 속으로, 그가 잡아당겨 안는다면,

밀어내지 않고, 그의 품에 안길 것이라 생각한다.


재욱은, 어깨에  손을 얹는 대신, 그녀를 당겨, 안고

싶다고 생각한다.


“너무 많은 생각도, 깊은 생각도 하지 말고, 오늘은 자. 내일 일은 우리도 아직 모르잖아.”


현정은 그를 보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아쉬운 마음으로 아파트 안으로 들어간다.


재욱도 아쉬운 마음으로 그의 집으로 향한다.

그녀의 집에서 그 의 집까지 얼마큼 걸리는지,

늘  재며  걷는다.

오늘은 얼마큼 그녀와 가까워졌는지도  생각한다.

재욱은 현정을 다시 만나니,

마치 처음 관계를 시작하는 것처럼,

만날수록  새롭고 설렌다.

밀당에서,

거의 밀리기만 하는 상황이지만,

이렇게 만나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게 어딘가.

처음 만났을 때는 모든 것이 빠르고 깊게, 3개월이 마치 3년 치를 다 만난 것 같았다면,

지금은, 천천히, 조금씩 다가가는 것이 새롭고 좋다.

이 시간들이 좀 더 천천히 흘러가면 좋겠다고도

생각한다.


집에 올라온 현정은 술도 안 마셨는데,

마신 듯 몽롱하다.

술보다 더 위험한,

사람에 취했으니, 정신도, 기운도 없다.  

예전에 현정은 주중은 현실로 살고,

제이슨을 만나는 주말은 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꿈도 현실이 됐고,

더 이상 꿈을 꾸지 않아도 된다.

현실과 꿈같았던 상황이 서로 현실에서 일어나니,

정신이 없다.

그런데  낯설지 않고 거부감도 들지 않고 편안하다.

편안하기까지 하다니.

걷잡을 수 없는 단계다.


오늘도, 늘 그렇게 일상처럼,

아파트 앞에 다 왔는데, 재욱이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꼭 하라는 건 아닌데, 언제 한 번은 너네 집에 가

봐도 돼?”

“넥x렉스라도 보고가 라고 하라고?”

“어?”


한국에 라면 먹고 갈래가 있다면

그와 비슷한 버전으로,

미국에서는 넥x렉스 보고 갈래?

라는게 그런  뜻이라고,

한국 드라마와 문화에 폭 빠졌던,

라이언이 말해 준 것을 여기서 쓰게 될 줄이야.


그는 그녀의 말에 한참을 웃더니,

라면 먹고 갈래 아니야?

라고 말하고는 또 웃고는 말을 잇는다.

“라면 이든, 넥x렉스던, 넥x렉스를 보며 라면을 먹던”

재욱은 라면이든 넥x렉스든, 그다음은 더 좋고 라는

말은,  속으로 삼키며,

뭐가 더 좋은지는 상상만 한다.


“됐어. 뭘 집까지 오려고 그래.”

“알았어.”

재욱은 쿨 하게 알았다고 말하고는 다시 말을 잇는다

“그러면 네가 우리 집에 와도 돼. 내가 초대하는 거야. 다음에는 내가 저녁 해줄게.”

“라면?”

재욱은 또 웃음이 터진다.

“라면보다는  더 맛있는 거.”

“그래 알았어.”


현정은 재욱의 초대에 응한다.

여기서

왜?

안돼

라고 말해 봤자,

그에겐 소용없는 일이다.

아니면, 그의 집에 정말 방문해 보고 싶기도 하다.

그때 미국 에서 살 때랑 지금은 어떤지 궁금하다.

라면을 먹던, 넥x렉스를 보던, 그다음은 상상만

해 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 아니야. 그럼 너도 잘 가고.”


인사하고 돌아서려는데,


“mommy.”


익숙한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엘레나가 마미라고 부르며 달려온다.


그 뒤에 지숙의 얼굴도 보인다.

이게 무슨 일이야

할 새도 없이,

엘레나가 달려와,  

현정은 무릎을 굽히고,

그녀를 품에 안는다.


“Mommy. Miss you.”

“Miss you too.”


현정은 엘레나를 들어 안아 올리고,

다가오는 지숙을 향해,

무슨 일이냐,

여기는 어떻게 왔냐,

언제 왔냐,

속사포처럼 묻는다.


그렇게 까지 말하고 행동할 일은 아니지만,

이런 상황은 상상조차도 해 보지 않아,

그녀는 당황스러워,

말의 두서가 없다.


이 상황에서 현정보다 침착한 지숙은,

엘레나가 다른 날과 다르게 서울 가자고 하도 졸라서,

오후에 버스 타고 왔고,

집에 와 있는 줄 알았는데 없어서,

전화할까 했지만, 일이 있나 해서 안 했고,

집에 있다가

저녁 먹고,

마트 가서,  아이스크림 사 먹고, 오는 길이다.

라고 차분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저녁 먹을 때, 너한테 계속 전화했는데, 안  

받던데.”

“아. 그러셨어요?”

현정은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니, 방전이 돼있다.

학원에서 충전한다고 꽂아 놨는데, 콘센트가 빠져

있어나 보다.

“아.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됐었나 봐요, 충전한다고 했는데, 안 됐나 봐요.”

“괜찮아. 서로 만났으면 됐지. 이번주에는 계속 여기 있다가 주말에 내려갈 거야.”

“네. 엄마.”


그제야, 지숙과 현정은 잠시 잊고 있었지만,

여전히 옆에 있어 신경이 쓰인 재욱을 동시에 바라본다.


현정이 그를 지숙에게 소개하려 하자,

그가 먼저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정재욱이라고 합니다. 현정 선생님 수업 듣는 수강 생이예요.”

“아. 네. 안녕하세요.”

지숙도 가볍게 목례를 하며 인사를 한다.

“저도 이 근처 살아서, 목요일 수업 끝나는 날은 지하철 타고 같이 오기도 해요.”

“그러세요. 아무리 환해도, 밤에 혼자 다니는 건 좀 그런데. 감사합니다.”


지숙은 좀 의아하다.

목요일,

현정은 수업이 일찍 끝나고,

오후에 평창에 내려오기도 하지 않는가.

오늘은 목요일인데, 왜, 현정은 밤에 들어오는 거지?

그것도 학원 학생과 함께.


현정은 재욱이 한 말이 모두 사실이고,

그 말속에 별 달리 이상할 점도 없는데,

도둑이 제 발 저린 마냥, 안절부절이 된다.


아 맞다.

오늘 목요일,

수업 일찍 끝나는 걸 엄마도 아시지.


현정은 번뜻 생각이 나지만,

뭐라 설명할 것인가


재욱은 적절한 타이밍으로,

“그럼, 선생님 잘 들어가시고, 다음 주 월요일 수업 때 만나요. 어머님도 만나 뵈어서 반가웠습니다.”

라고 인사를 한다.

“그래요. 학생분도 조심히 가세요.”


침착한 지숙과, 재욱이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눈다.

품에 안겨 있던 엘레나가 몸을 흔드는 바람에 현정이 그녀를 땅에 내려놓자, 엘레나는 재욱을 보며 엉클이라고 부른다.


명우를 생각해서일까.

‘Daddy’라는 말보다,  ‘Uncle’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쓰는  엘레나를 보니,

현정의 마음이 무겁다.


한참 아빠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랄 나이 아닌가.

토드가 살아 있다면.

그녀에게 그는 어떤 아빠였을까

그는 좋은 아빠였을 것이다.

엘레나를 누구보다 사랑했으니까.


재욱이 무릎을 굽히고 앉아 엘레나를 보며,

한국말이 편해  영어가 편해라고 묻자,

엘레나는 영어라고 대답한다.

재욱은 자기소개를 영어로 간단하게 말하고,

제이슨이라고 부르라고 하자,  

엘레나는 제이슨의 이름을 부르고  자기소개를 한다.

서로 만나서 반갑다고 악수도 한다.

엘레나는 제이슨의 말과 행동이 맘에 들었는지,

내일  또 보자고 까지 말한다.  

제이슨은 스케줄을 확인해 보고,

너한테 연락할 수 없으니,

엄마를 통해 알려 주겠다고 말하니,

엘레나는,

‘Sounds good’ 이라고 대답한다.

제이슨은 밤이 늦었으니, 들어가라고 말하고,

엘레나도, 조심히 가고, 잘 가라고 인사도 한다.


둘의 대화 뭐야.

6살과 30살의 대화 맞아?


엘레나는 지숙과 현정의 손을 잡는다.

굽힌 다리를 펴고 일어선 재욱은 지숙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현정에게는  많은 의미를 담은 눈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뜬다.


지숙은 그 둘을 이미 멀리서 봤다.

엘레나가 한참 아이스크림을 집중해서 먹느라,

그녀는 못 봤지만, 지숙은 멀리서도 단번에 현정을 알아봤다.

현정은 어떤 남자와 서 있었고,

무슨 대화를 하는지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밝은 얼굴이었다.

늘 잘 웃던, 그때 그 딸의 얼굴이다.

남자는 그냥 봐도, 딸에게 관심이 많아 보였다.

그녀를 보며 환하게 웃는 얼굴, 현정의 팔과 어깨를

쓰다듬는 손길.

그리고 멀리서도 느껴지는 그의 눈빛.

그리고 가까이서 보니, 현정을 향한  따스하고 세심한 것이 더 많이 보였다.

그리고 어린 엘레나와 나눈 대화에서 그녀를 배려하는말과 행동까지.

지숙은 현정이 행복하길 바란다.

지금처럼 이렇게 환하게 웃는다면

더 좋을 게 없을 거 같다.


집으로 오는 엘리베이터, 복도, 그리고 현관문을 들어올 때까지,

지숙은 궁금한 것이 많지만,

묻지 않는다.

지숙은 엘레나에게 잘 자라고 안아주고는,

현정에게 올라오느라 피곤하다면서,

그녀의 방으로 들어간다.


현정은 엘레나와 오랜만에,

 ‘Bathtub’을 같이 하고,

머리도 말려 주고,

빗질도 해주고는,

커플 잠옷으로  같이 입고,

침대에 눕는다.

품에 안아주니, 작고 소중한 존재는,

금방  새근거리며 잠이 든다.


현정은 지숙이 묻지 않아 줘서 고맙다.

뭐라고 말할 것인가.

엘레나도 별 말이 없어 다행이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누구냐,

엉클 명우는 어디 있냐 등등

두서없이 물어보면 어쩌나 했는데.

아이라 그런지 그새 잊어버렸나 보다.

전화기를 충전한다는 것을 깜박했다.

그래도 품에 안은 엘레나를 놓고 싶진 않다.

현정도, 금방 잠이 든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늘 그렇듯 재욱과 현정은 퇴근을 같이 한다.

“주말은 잘 보냈어?”

“응.”

“어머니와 엘레나는?”

“어제 평창에 내려갔어.”

“뭐 했어?”

“한강 가서 자전거 타고.”

“나도 자전거 잘 타는데, 다음에 우리 같이 자전거 탈까?”

재욱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글쎄.”

“너도 편하고, 엘레나도 좋아하면. 그거 알지, 엘레나가 또 보자고 해서, 내가 스케줄 확인하고 너 통해 알려 주겠다고 한 거?”

“알았어.”

“그리고 또 뭐 했어?”

“여자 셋이 백화점 가서 쇼핑도 하고.”

“많이 샀어?”

“내가 여자 셋이, 백화점이라고 했잖아.”

“응. 이해했어. 또 뭐 다른 것도 했어?”

“집앞에 놀이 동산도 가고.”

“와. 재미있었겠다. 엘레나 잘 타?”

“잘 타는데 내가 같이 타 줘야 하니까, 거의 내 챌린지였지.”

“나도 놀이동산 엄청 좋아하고, 잘 타는데. 그것도 다음에 같이 갈까?”


현정은 재욱과 함께 그녀의 가족, 엘레나에 대해

갑자기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이

낯설면서, 서로 오랫동안 알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또 편한 것이 신기하다.


“너는? 너는 주말에 뭐 했어?”

“가족이 오랜만에 다 모여서, 바빴지. 기억나? 나 누나 둘이 있는 거.”

“응.”

“한 누나는 아직 미혼이고, 한 누나는 그 새 아들 둘에 셋째 임신했어.”

“조카가 있어서, 애들이랑 금방 친해지는구나?”

“조카 있다고 다 그러진 않는데, 애들이 나를 좀 좋아하긴 해.”

“그래. 그러겠지.”

“뭐지? 강한 부정이 느껴지는데.”

“아니야. 강한 긍정이야.”

“강한 긍정은 부정 아니야?”

현정은 아니라는 듯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묻는다.

“조카들이 몇 살이야?”

“4살, 2살. 셋째는 딸이어야 한다고 기대하는데. 이미 초음파 해서 알고 있는 것 같아. 말은 안 하는데, 아무래도, 아들 삼 형제 키울 것 같아. 조카 둘이가 개구쟁이야. 에너지가 많아. 누나가 내가 그나마 젊고 가볍다고, 나랑 애들이랑 놀이터로 내 좇는 바람에, 아이들과 놀아 줬어. 나 정말 미끄럼틀 타다가, 토할 뻔했잖아. 군대 훈련보다 더 힘들어.”

“아들만 그런 게 아니고, 딸도 그래. 애들은 에너지가 많아.”

현정이 웃는다.

그런 현정을 보고 재욱이 묻는다.

“왜 웃어? 애들이 에너지가 많은 게 재미난 일이야?”

“아니. 너랑 애들 이야기를 하는 게 재밌었어.”

“그럼 더 이야기해봐. 애들이 에너지가 많아서, 넌

어떻게 하는데, 엘레나랑 주로 뭐 하며 놀아?”

재욱이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이야기해서,

현정은 이야기의 주제를 돌릴 수 없다.

“우린.”

“응?”

“우리는, 바다도 가고 산도 가고, 엘레나가  아웃 도어 액티비티를 좋아해.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는데,

같이 그러고 놀다 보니, 좋아하더라고, 나도 좋아하고.”

“다음엔 산에도 같이 가자. 우리가 산길 전문가잖아. 캠핑도 좋겠다. 그렇지?.”


재욱은 현정이 말하면,

같이 하자

라는 말을 계속한다.

그때도, 그는 현정에게,

늘 뭘 같이 하자.

하던 그였다.

이제는 엘레나와도 같이 하고 싶은 게 많은가 보다.


“그래. 그러자.”

현정은,

아니, 싫어

다음에

라는 말보다,

그때처럼,

제이슨과 있을 때처럼,

한국에서 재욱과 있는 지금,

그래

좋아

그러자

라고 말한다.


사실 미래에,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고,

못 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알 수 없지 않은가.

그러니 지금은

그래

라고 말한다.

그러면,

앞으로의 일은 몰라도,

지금은 행복하니까.


재욱이 늦게 끝나 현정은 집에 먼저 왔고,

늦은 밤 그가 아파트 앞으로 왔다.

요즘에는 금요일 아침에 주로 평창에 간다.

지숙도 왜 그러냐고 별 말이 없다.

왜 그런지 알고 있고,

좋은 사람이라면, 행복하다면,

그 사람과 현정이 좋은 시간을 보냈으면

하는 바램으로.


“주말에 연락해도 돼?”

재욱의 질문에 현정이 피식 웃는다.

“왜 웃어?”

“네가 언제는 나한테 묻고 연락했어? 내가 답장 안

해도, 볼지 안 볼지 몰라도 연락했으면서.”

“내가, 그랬지.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다 좀 조심스러워서.”

“뭐가?”

“네가 엘레나와 있는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토요일,

엘레나와 바다에 간 현정은 바다 사진을 찍어 재욱에게 보낸다.

그는 그의 사진과 함께 문자를  보낸다.


“나도 가고 싶다. ㅠㅠ”


사진에 그가 얼마나 오고 싶어 하는지 한 껏 담았다.

그의 문자를 보고 재욱의 귀여움에,

현정이 웃는다.

지금 이 순간,

엘레나와  엄마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여유롭고,

바다는 아름 답고,

파도 소리는 힐링을 주며,

누군가로 인해,

웃음이 지어지고,

행복한 기분이 든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서

일상생활에서

불현듯,

느끼는 것 이라는데,

맞는 말인 거 같다.


재욱은  머리가 헝클어진 모습으로 미끄럼틀 앞에

앉아 지쳐 있는 사진도 보낸다.

사진만 봐도, 그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힘내.”


현정이 답장을 보내자,

제이슨은 웃으며 엄지 척을 한 사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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