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일상의 변화
잠깐만 일 하려던 학원에서 일 한지 그새 일 년이
다 돼 간다.
엘레나도 놀만큼 놀았는지,
“When am I going back to school?”
하고 묻길래,
한국에 있는 국제 학교를 알아보면서,
미국으로 다시 가야 하나 생각도 하고 있는데,
엘레나는 이곳에 더 있고 싶다고 한다.
현정도 좀 더 있고 싶다.
지숙은 현정과 엘레나가 어디에서 살든,
함께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엘레나가 할머니 손길이 필요 없어질 때까지,
혹시 현정이 재혼을 한다면 그때까지,
그들에게 도움이 될 만큼,
필요할 만큼
함께 할 마음이다.
그래서, 그동안 지숙은 그녀의 물건들을 천천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 가서 하려면,
또 이것저것 생각이 많아지고,
그러다 함께 가지 못할까 봐.
너무 낡은 건 버리고.
거의 새 거인데,
쓰지 않는 괜찮은 것들은 주변에 나누어 줬다.
카페도 봄이 되면서, 정리를 했다.
서류상 지숙이 사장이지,
그녀는 미국도 자주 다녀오고,
작년부터는, 현정네가 와서 엘레나와 시간을 보내느라
거의 종업원 부부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숙은 그들에게, 카페를 그냥 주고 싶었지만,
그들이 극구 사양해서, 그들이 있는 돈 정도 받고,
그들에게 양도했다.
카페에서 일하면서, 결혼까지 한 커플이고,
지숙은 그들과 거의 가족처럼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손 정하,
그녀의 부모님은 평창에서 감자와 배추 밭을 크게
하시는 평창 토박이다.
정하는 위로 언니가 세명 오빠가 한 명 있는,
다섯 남매의 막내다.
딸만 셋을 낳은 정하의 부모님은,
넷째 때 아들을 낳았고,
다섯째도 아들일까 해서 낳았는데,
정하가 태어난 것이다.
정하의 세명 언니들은 참 야무지게,
알아서 척척척 잘 하며 산다.
학교도 잘 다니고,
집안 일도 잘 돕고,
바쁘신 부모님을 위해,
하나 있는 남동생과 막내 여동생까지 살뜰히 잘도
돌본다.
정하의 눈에 엄마가 네 명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있다.
오빠지만, 이 집안에 참으로 귀하신 한 명 있는
오빠님은,
그저 오빠님이다.
그를 위해 다들 해주기 바쁘다.
그래서 정하의 눈에, 그 오빠님은 귀할 줄만 알지,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어 보인다.
심지어 정하의 할머니는 그 오빠님의 이름만 부른다.
그러면 나머지 식구들도 알아서 모이니까.
정하는 막내라 귀여움을 받았지만,
또 딸인 막내라,
가족들 사이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자랐다.
정하는 딱히 잘하는 것도, 못하는 것도 없었고,
게다가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가족들 사이에 그냥 있기만 해도,
그녀의 세상은 그냥 그렇게 돌아갔으니까.
지숙을 만날 당시 그녀는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때였고,
그닥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할 일도 없었다고 한다.
모두 바쁘게 집을 나가면,
그녀는 집에서 뒹굴 거리거나,
일 하는 식구들 새참이나 챙기며,
졸업 후 반년을 그렇게 보냈고,
부모님이 시내 라도 나가 친구를 만나던가,
지금이라도 대학 갈 준비를 하던가,
아니면, 아르바이트라도 하는 게 어떠냐고 해서,
그냥, 시내를 어슬렁 거리며 다니다,
지숙의 카페에
‘아르바이트생 구함’
을 보고, 지원서를 냈다.
지숙의 말에 의하면, 5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정하가 합격했다고 한다.
지숙은 정하가 가장 어렸고,
별로 잘하는 게 없다고 하지만 손도 야무 지고,
식구 많은 집에서 자라서 그런지 눈치도 빠르고
빠릿빠릿한 데다,
당찬 성격이 좋았으며,
가족이 이곳 토박이라,
평창뿐만 아니라, 강원도에
대해서 잘 아는 정보꾼이라서
뽑았다고 했다.
지숙과 정하는 꽤 사이가 좋은
종업원과, 사장님이었다.
그녀는 아르바이트생으로 일 하는 사이,
지숙의 권유로 근처의 대학교에 입학해,
학사학위를 받고,
바리스타 자격증도 땄다.
정하도 그녀의 가족보다 지숙을 더 따랐고,
사장님 이면서 인생의 멘토로 그녀를 대했다.
코로나 동안 잠시, 카페 문을 닫았지만,
정하는 떠나지 않았다.
커피 배달은 정하가 낸 아이디어였다.
예전에 시골 다방 같은 개념이 아닌,
정하는 앱을 만들었고,
온라인 오더를 해서
‘to-go’ 혹은 ‘delivery’ 식으로 해서,
카페를 유지하는데 도왔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커피 배달을 많이 주문했고,
그들은 배달원이 필요했다.
정하가 다녔던 대학교에 공고를 냈고,
군대를 막 다녀온 복학생이 지원을 했다.
그렇게 둘은 일하면서 연애도 했는지,
성철이 대학을 졸업하고,
동네 은행에 취직이 된 2022년도에
둘은 결혼을 했다.
봄에 정하가 카페를 인수하면서,
성철은 일하던 은행을 그만두고,
정하와 함께 카페 운영을 하기 시작했다.
그도, 은행보다는 카페일이 더 적성에 맞았고,
그 당시 정하와 결혼하려고, 구한 직장이라,
결혼 후에는 더 이상 다닐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도 은행에서 일한 금융 지식으로,
그 사이 집도 사고 돈도 꽤 모았다.
둘은 카페 운영을 하면서,
성철은 베이커리 자격증을 공부 중이고,
정하는 소믈리에 자격증을 공부하고 있는 중이다.
현정은 엘레나의 학교를 알아보다,
제주에 있는 국제 학교가 괜찮은 거 같아,
지숙에게 제주도에 가서 살면 어떠냐고 물어보니,
지숙도 흔쾌히 좋다고 한다.
현정이 미국으로 간다고 했을 때,
미국은 너무 멀다며,
가지 말라고 하면서,
다른 데로 이사 가자고 생각했던 곳이,
제주도였다.
서울에서 가장 먼 곳이고,
언젠가 한 번은 제주도에서도 살아 보고 싶다고,
재철에게도 말한 적이 있었다.
현정은 엘레나가 중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
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참에 같이 집을 정리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
지숙에게 물어보니 그녀도 좋다고 동의한다.
물론 평창집
잠실집
어느 곳하나
추억이 묻지 않고,
손때가 묻지 않은 곳이 없다.
현정이나 지숙에게
정리한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다.
하지만, 또 언제까지 붙들고 살수 많은 없다.
지숙은,
지금 까지 끌어안고 산 추억은,
가슴과 기억에 담고,
이제는 또 새로운 데서,
새롭게 추억을 만들어 가려고 한다.
현정과, 엘레나와 함께.
그렇게 재철의 바람대로 행복하게 살다가,
그를 만날 거니까.
그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더 많아질 것이다.
현정은 엘레나와 엄마와 어디든 함께 살 계획이다.
그러니 재혼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을뿐더러,
지숙이 현정을 많이 도와주지만,
현정은 아이와 엄마를 돌봐야 하는,
가장이라고 생각한다.
7월 중순쯤
지숙,
현정,
엘레나
삼대는 제주도로 이사를 간다.
엘레나가 환경에 적응해야,
가을에 학교에 입학하는데수월 할 것 같아,
집은 아직 팔리지 않았지만,
이사부터 했다.
학원은 늦어도, 8월까지만 하고 그만두겠다고,
그전에 선생님이 일찍 구해지면,
더 빨리 그만두어도 된다고,
5월 말쯤 이미 원장님께 말을 해 놨었다.
이런 변화가 없었더라도,
현정은 학원은 곧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래 하려던 일도 아니었고,
엘레나 학교도 계속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정은 서울에서 평창이 아닌,
주말에 서울에서 제주도로 다닌다.
그리고, 서울집과 평창 집도 처분해야 해서,
바쁜 여름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현정의 삶에 그렇게 변화가 생겼고,
재욱과 보낸 시간도,
지난해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지나, 여름을 보내고 있다.
그 해 같은 여름,
많이 달라진 여름,
그리고 새롭게 보낸 여름,
그리고 일상이 되어 버린 이 여름.
현정은 처음으로, 마음에만 담아 두고,
하지 않은 말을 오늘 꺼낸다.
이제는 그와
진심으로 진지하게 미래와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일상이 변하고 있으니까.
주네 가게에서, 저녁으로 초밥을 먹고,
시원하게 맥주도 한 잔 마신 후이다.
“누가 결혼한대?”
“넌 해야 하지 않아? 결혼은 아니어도,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면 제대로 만나야지.”
“그걸 왜 네가 결정해?”
“그런 게 아니라.”
“그러면?”
“재욱아.”
“응?”
“나는 내가 해야 할 문제들이 있어. 평생 짊어져 할 문제야. 그래 문제가 아니라 일들이라고 하자. 그리고,
난 내 일을 누군가와 나누거나, 함께 할 마음이 없어. 왜냐 하면, 그렇게 하기 위해선, 엘레나의 의사와 감정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인데, 나는 엘레나에게 그런
고민거리를 주고 싶지 않아.”
“무슨 말 인지 이해해.”
현정은 이해한다는 그의 말에 그를 쳐다보자,
재욱은 말을 잇는다.
“다는 이해 하지 못하겠지. 나는 너의 상황을 겪어
보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같은 경험이라도 생각은
다 다르니까. 그런데, 어느 정도는 이해해. 새로운 가족
을 만들고, 새로운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건 나도 이해하고 공감하는 부분이야. 그래서
넌 그걸 혼자서 감당하려는 거고. 나는 너의 생각을
존중하고, 대단하다고도 생각해. 그래서 나도 너랑
만나고는 있지만, 결혼을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물론 너도, 엘레나도 원하면, 나는 충분히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결혼이라는 건 중요
하지 않은 문제 같은데.”
“우리가 이렇게 계속 만날 수는 없어. 너 언제까지
나랑 이렇게 만날 건데? 너와 나는 앞으로의 미래가
없어."
“그런 게 어때서?”
“어때서라니? 너는 미래가 있고, 나는 이미 미래가
있어.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미래가 없는데, 이렇게
만날 수는 없다는 거야.”
현정은 그를 만날 때마다 고민을 했고,
도대체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깊이 곰곰이
생각했다.
처음엔,
이혼녀?
아이 엄마?
나이차?
이런 것들이 고민거리였는데,
재욱이 고민할 거리도 되지 않게 만들어 버렸고,
현정도 이런 건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미래다.
현정은 이미 정해진 미래가 있다.
그리고 그녀의 미래에 재욱을 담을수는 없다.
정해진 그녀의 미래에
지금처럼 그와 이렇게 만나면서
어느 순간 그의 미래가 될까 봐,
현정은 그것을 고민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렇게
그를 그냥 만날 수는 없다.
현정은 재욱과 만든 일상 외에,
원래 그녀의 일상이 있다.
그런 그녀의 일상이 그의 일상이 될 수는 없다.
“그러니까 그게 뭐가 문제가 돼?”
“너한테 문제지.”
“네가 문제라면 이해가 되는데, 나한테 뭐가 문제라는
거지? 그냥 이러고 있는 것도 다 내 미래야. 내가 결정
하고 좋아하는.”
“너네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할 거 같아? 부모님들 마음
거의 다 같아. 성인이 된 자식들이 좋은 사람과 연애도
하고, 결혼도 했으면 하는 거. 나는 그걸 충족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거야."
“글쎄. 널 만나면서 그런 걸 그렇게 깊게 자세히 생각
해 보진 않아서."
재욱은 잠시 말을 멈추고,
이제야 생각하는 분위기지만,
재욱도 늘 생각했던 문제다.
재욱의 입장에서는 문제가 아닌 문제를
현정의 입장에서 문제로 늘 담아 두었던 일들이다.
그런데,
현정에게,
난 다 괜찮으니 우리 다 같이 살자
라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이 참에 그도 비혼주의자라고
그냥 선언할 것인가.
그때처럼 말없이, 사라지듯이 떠난 것보다
지금 이렇게 마주 않아
미래에 대해, 계획에 대해,
듣는 것이 훨씬 낫지만,
이런 이야기는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
영영
안하하면서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를 만나길
재욱은 바랬다.
그런데 그녀는 오늘 용기가 났는지,
문제를 직면하고,
마음에 담은 말을,
그에게 한다.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정답 없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우리 부모님, 나한테 별말씀 안 하시는데, 큰 누나는
비혼주의자라고 선언까지 했어. 그리고 우리 부모님이
그런 기대가 있다고 하셔도, 30넘은 아들, 그렇게
원하시는 대로 하실 수 있을까? 나 18살 때, 미국
갈 때도 나 혼자 결정해서 갔어.”
“그건 너의 나은 미래에 대한 도전이니까 그런 거고,
나를 만나는 게 너의 미래에 대한 진취적인 도전은
아니잖아. 컨텐츠가 다른 문제야.”
“사람을 만나는 게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아는 것처럼, 우리 가족은 다 제주도로 이사 갔어.
나는 학원도 곧 그만둘 거고, 평창집과 서울집도 곧
처분할 거야. 그리고 그렇게 있다가, 엘레나가 중학교
들어 가기 전에 미국에 돌아갈 거고.”
“알았어.”
현정의 계획을 들은 재욱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알았다
라고만 말한다.
“그게 다야?”
“응. 너 말대로 넌 너의 미래가 있고 계획이 있잖아.
너의 계획에는 엘레나와 어머니도 있고, 너만 아니라,
모두가 다 괜찮은 계획을 세워야 하고.”
“맞아.”
“그래서 알았다고 하는 거야.”
“너는? 너는 어떻게 할건데? 내 계획에 넌 없어. 아니
계획하고 싶어도 할 수 없어.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계속 만나?”
헤어져
라는 말보다
너는 없어.
라는 말이 더 아플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정은
그를 아프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말 그녀의 계획에 그를 생각할 수 없다.
그녀의 계획에, 엘레나, 엄마 지숙, 그리고 재욱,
재욱의 가족들까지 서로 엮이게 하고 싶지 않다.
그녀가 사랑한다고 해서, 그들에게, 새로운 관계
속에서 갈등과 어색함을 줄 수 없다.
그렇다면,
그녀는 그녀의 가족과 그녀의 계획대로,
이미 정해진 미래를 살면 된다.
간단하다.
재욱은, 그의 계획을 세워,
아직 정해지지 않은 그의 미래를 향해 살면 된다.
간단하다.
하지만,
간단하지 않다.
마음이 얽혀 있으니까.
그것도 사랑.
그래서,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오랜 시간 고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너의 계획을 나는 알고 있고, 너의 계획에 나는 없어.
그리고 나는 내 계획이 있어. 내 계획에 너가 있고
없고, 나의 미래가 어떻고는 너가 고민할 일은 아니야.
그러면 되는 건데, 여기서 너랑 나랑 만나, 안 만나를
이야기할 필요는 없지 않아?”
늘 그렇듯
그는 복잡한 상황도 간단하게 만들고,
결론도,
만나면 되는 거아니야
로 내려 버린다.
겨우 용기내서 말한 사람
무안하게.
“재욱아. 그냥 이렇게 만날수는 없어. 내가 다시 말해
줘? 나는 결혼도 했고, 이혼도 했고, 아이도 있어. 내가
누군가를 다시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고 하는 건 나는
할 수 없어. 하고 싶지 않아. 그런데 너 말대로 결혼은
안 한다 해. 그렇다고 너랑 이렇게 미래 없는 연애를
할 수는 없어. 너가 지금 만나는 시간속에 내가 있는데,
내가 너의 미래를 어떻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어? 우
리가 그냥 이렇게 만나는 게 맞아?”
“맞고 안 맞고가 어딨어? 정답이 없는 문제야. 그냥
흘러가는 대로 놔둬야 하는 거라고.”
“그럴 수 없어.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잖아.”
“왜?”
“응?”
“그러니까 왜 그러는데. 너는 너의 계획대로 하고,
나는 나의 계획대로 하면 되는 일인데, 뭐가 문제지?”
“계획이 있지만, 서로 다른 계획인데, 그냥 이렇게 만
나는 건, 너에게 너무 의미가 없어.”
“같은 말을 반복하는데, 나에게 의미 있고 아니고는
내 문제야. 그걸 왜 네가 고민해?”
“재욱아. 나 진지해.”
“나도 진지해. 나의 모든 계획에 네가 있는 나와,
너의 모든 계획에 나만 없는 너 사이에서, 내가 어떨
것 같아?”
“그러니까. 그만해도 된다고. 나랑은 아무것도 없어.
의미 있는 너의 미래와 너의 삶을 생각해.”
재욱의 맘에 스산한 바람이 인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녀.
떠나가도 된다는 그녀.
그녀에게 뭐라고 또 말할 것인가.
사랑한다고 말할 것인가
그녀도 그를 사랑한다.
그래서 그만하려는 것이다.
그녀도 그 만큼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문제 될 게 없다 고 말하고 싶다.
물론, 넘어야 할 일들은 많다.
하지만, 문제는 없다.
하지만, 그녀는 그와 함께 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그때는 그냥 말없이 떠났고,
지금, 그녀는 말하고, 떠나거나,
그 보고 떠나라고 말하는 것이다.
현정과 함께 듣던,
그녀가 좋아하는 밴드의 노래 가사가 떠오른다.
‘그냥 가라는 말
그대의 한마디가
나를 뚫고 지나가요.’
재욱은 뚫고 지나간다는 말이 무슨 의미이고,
어떤 느낌일까 했는데,
가슴을 뚫고 지나갈 만큼,
아프다.
그는 또 생각한다.
그다음 노래 가사가 뭐였더라
대답은 침묵뿐?
그는 왜 침묵 할까?
라고 생각했었다.
안 지나갈래.
안 갈래.
안 떠날래.
왜 그래야 돼?
우리 서로 너무 사랑하잖아.
라고 말하면 되지 않는가.
그 노래의 가사 앞 뒤가 뭐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침묵뿐
이라는 것이 지금 너무 와닿는다.
왜 저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지,
지나가라는 말 안에,
얼마나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지,
너무 잘 알아서.
그래서 너무 아파서,
침묵할 수밖에 없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런데 넌?”
재욱이 겨우 입을 열더니 다시 말을 멈춘다.
현정도 그의 침묵을 내버려 두고,
차가운 맥주를 한 모금 마신다.
일주일에 한 번 혹은 두 번 정도 주 네 가게에 와서
사케를 한잔 마신 것이,
어느덧 일상이 되었고,
여름이 시작되면서,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재욱도 한 잔 마시고는 말을 잇는다.
“그런데 넌, 내일, 미래가 중요해? 오늘이 모여 내일이
되고, 그런 내일 들이 미래가 되는 거 아니야? 그런데
넌 오늘은 그렇게 보내면서, 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만
생각하면서, 정리를 해?”
“정리가 아니고, 계획이야.”
“오늘일도 계획이고, 그런 계획된 오늘이 미래가 되지
않을까? 난 네가 늘 미래만 보면서, 현재를 놓치거나,
현재의 것들을 처분해야 하는 건 안 했으면 좋겠어.
특히 관계란 그런 거잖아. 계획대로 되지 않기도 하고,
갑자기 어떤 일이 생기기도 하고, 나는 너에게 관계인
사람인거지. 너의 계획의 리스트가 아니야.”
“누가 리스트래. 그런 뜻이 아니야.”
“알아. 네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그런데, 너의 계획
을 세울 때, 난 그 목록처럼 수정할까, 삭제할까
고민하지 않아도 돼. 적어도 나와는.”
“그럼 내가 어떻게 해?”
“너와 나의 관계는 그냥 이렇게 가는 대로 내버려 둬.
그러다, 헤어질만하면 헤어지고, 그래도 만날만 하면
만나고, 그러는 거 아니야? 나는 지금 널 사랑하고,
너와의 만남은 가치 있고 의미가 있어. 그러니, 너랑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야. 너도 계획이나 미래가
아니라, 나와의 만남이 좋다면, 뭘 더 하지 않아도, 덜 하지 않아도, 오늘처럼 이대로 좋은 대로 내버려 두면
되지 않을까? 우리가 지금까지 만든 일상처럼?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서는, 지금 보다는 자주 보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어떻게 할지를 계획해야지.
왜 넌, 의미가 없다. 미래가 없다 하면서 이별 쪽으로
결론을 내려고 해? 나는 지금은 널 사랑하잖아. 너도
그렇고. 그것 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지금은,
만날 이유가 되지 않아?”
“나는 지금을 말하는 게 아니잖아.”
“미래도 마찬가지야. 나도 내 미래에 대한 계획이 있어
지금 회사도 좋지만, 미국에 다시 가고 싶어 질 수도
있고, 그냥 이곳에 머무를 수도 있어. 결혼? 너도 해봐
서 알지 않아? 언제 해야지, 누구랑 해야지 하는 게
결혼이야?”
그는 이제 대 놓고,
결혼 유 경험자 취급을 한다.
현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여기서 맞아
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아니야 난 계획하고 했어
라고 말 할 것인가
“일단 나는 아직은 누구랑 같이 살아야지 하는 계획은
없어.”
현정은 속으로
그러니까
네가 지금 날 만나니까 계획이 없는 거지.
나랑 그만 만나야,
다른 사람도 만나고,
미래를 함께 할 사람도 만나는 거라고,
말하는 거잖아.
“그런데 널 만나고 있는 중이라서 계획이 없는 건 아니야.”
속마음을 읽었나?
재욱이 잠시 말을 멈추고, 맥주를 한잔 더 마신다.
“그런데 현정.”
그가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른다.
무섭게 왜 저래
“응.”
“나는 예전엔 너랑 함께 할 거다. 오래 할 거다. 그렇게
생각했어. 결혼 그런 걸 떠나 그냥 나는 너와 오래도록
함께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가 과거형으로 말한다.
그럼 지금은 아닌가?
“지금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해.”
현정은 갑자기
휴
다행이다
라는 마음이 들어야 하나 생각한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에는 우리의 환경이 고려
되어 있지는 않아. 나는 그냥 너란 사람 이랑 함께
오래 하고 싶은 거야.”
그러니까
이제는 환경도, 상황도 좀 고려해야 한다고
말하는 거잖아.
현정은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만 담는다.
이미 그동안
누누이
언급했던 말들 아닌가.
“그래서 나는 우리가 함께 할 수도 있지만, 또 헤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
뭐라고?
현정은 그녀가 먼저 이별의 말을 담았는데.
그의 입에서
헤어짐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마치
지금 헤어지자
라고 들은듯
마음이 저리다.
“상황이나 환경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에게, 이제
는 그만해야겠다는 마음이 들 수 있잖아. 나는 우리가
그때 그런 마음이 들었을 때, 이별해도 된다고 생각해.”
그의 이별 공식은
환경이나 상황이 아니라,
마음이다.
라디오에서,
리메이크한 입영 열차 안에서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어느 날 그대 편질 받는다면,
며칠 동안 나는 잠도 못 자겠지.’
어.
3년이라는 시간도 1년 반으로 가사가 바뀌었네.
언제 바뀐 거야?
80년대, 감성의 노래.
차가운 맥주.
그리고 그와 일상이 되어버린 것들.
집에 와 아직도 여운이 남은,
그 감성으로 현정은,
비밀 이야기라도 쓰고 싶어,
서랍 속에 깊숙이 넣어둔 노트를 꺼낸다.
[제이슨, 재욱이, 정재욱, 제이슨 재욱 정]
노트에 그의 이름만 적어 내려간다.
한 자 한 자 그의 이름을 적을 때마다,
그와의 추억,
그와 누린 감성,
그와 나눈 언어들이
떠오른다.
[제이슨, 재욱이, 정재욱, 제이슨 재욱 정.
제이슨, 재욱이, 정재욱, 제이슨 재욱 정.
JJJJJJ
J가 엄청 많이 들어가네.
그는, 나에 대해 이제는 다 안다. 물론 나에 대해 알아
가야 할 것들이 무궁무진 하지만, 나의 상황을 안다.
그가 이제는 아~ 그렇구나. 하고 떠나도 이상 하지
않다.
그런데,
그의 이별은 상황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나를 사랑한다.
그래서 지금은 그에게 이별이 필요치 않다.
와.
무슨 공식처럼 딱 맞아떨어지잖아.
내 마음은?
사실 내 마음은 그의 사랑을 놓고 싶지 않다.
미래? 나에게는 어느 정도 짜인 바꿀 수 없는 미래가
있다. 그의 말대로, 그렇다고 해서 그를 못 만날 이유는
없다.
이별의 공식은 상황이 아니라 마음에 있으니까.
그런데 나는 그렇게 만은 할 수 없다.
그의 공식은 간단하게 딱 맞아떨어지는데,
나의 공식은 복잡하다.]
현정은 오늘도 풀지 못한 숙제처럼,
또 놔둬 버린다.
용기내서 한 말들인데,
집에와 생각해보니,
무엇을 용기 낸건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오히려
고백을 하고
고백을 받은 기분이다.
마음만 더 복잡해 졌다.
현정을 데려다주고,
재욱은, 그녀의 집에서
그의 집까지 거리를 재며 걷는다.
그에게 일상이 되어 버린 일들이다.
그런데
그 일상에 변화가 오고 있다.
재욱은 걷다가
주변에 있는,
의자에 앉는다.
남은 집까지의 거리가,
지구를 몇 바퀴 돌아야 도착하는 듯 멀게 느껴진다.
재욱은
원래 이렇게 멀었나
라고 생각한다.
거리만이 아닐 것이다.
상황도,
마음도,
오늘은,
멀게 느껴지고,
그리고
이별은
가깝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