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soul
목요일 수업.
현정은 마지막 수업을 마쳤다.
몇 명 수강생들은,
현정이 그만두는 것을 아쉬워하며,
나중에 연락해도 되는지,
제주도에 놀러 가게 되면 연락해도 되는지,
미국에 취업 원서를 넣을 때,
혹은 가게 되면 연락해도 되는지,
물어봤고,
현정은
그들에게 연락처와 이 메일을 주면서,
언제든 연락하라고 했다.
송별회는 이미 지난주에
원장님께서 온 직원들과 함께 크게 해 주셨었다.
젊은 원장님과도 그동안 잘 지냈었다.
둘은 가끔 점심을 같이 먹기도 했었다.
보스와 직원이 함께 하는 점심 식사는 꽤 꺼려지는
일이지만,
둘은 서로 불편해하지 않았었다.
현정은 처음 원장이,
지나친 감정 표현에 피곤한 타입인가 했지만,
그녀는,
참으로 쿨 한 매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는 말도 사이다처럼,
뻥뻥 뚫어,
그녀와 이야기하면,
뭔가 속이 시원하면서 재미있었다.
원장도 현정이 소위 외국물 먹은
가식적이며, 잘난 척하지 않아 마음에 들었다.
현정은,
소박 한 것 같으면서도,
세련된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원장은 그녀가 마음에 들었고,
점심을 같이 먹자고 조심스럽게 제안했을때
거절당하지 않고,
함께 식사를 했다.
그 뒤로, 가끔은 현정이 먼저
점심식사를 제안하기도 했고,
원장도 흔쾌히 그녀와 점심을 먹었었다.
라이언이 알려준,
학원 근처 맛집도 함께 갔었다.
잠깐 일하려던 곳이었지만,
생각보다 길게 일하면서,
사람들과 즐겁게 일한 곳을
아쉬움을 담은 채,
남아 있는 동료들에게 다시 한번
작별인사를 한다.
현정과 재욱이 지하철을 타고 함께 하는
마지막 퇴근길이다.
지하철에서 내려,
현정의 집으로 걸어가는 길도
오늘이
함께 하는 마지막 날이다.
둘은 평소와 다름없이,
손을 맞잡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웃으며 걸어간다.
뜬금없이 재욱이 묻는다.
“나도 제주도로 함께 갈까?”
“회사는 어떡하고?"
재욱에게 일어나지 않을,
비 현실적인 이야기이지만,
현정은 진지하게 받아친다.
이제 그와는
왜?
안돼.
라는 단어를 쓰지 않은지 꽤 됐다.
“제주도에 IT 회사 없나? 아니면, IT 회사 하나
차릴까?”
무슨 ‘IT’ 회사가 상차림도 아니고,
차릴까 하면 차려지나.
현정은,
현실적으로
다니는 회사 그냥 다녀야지.
같은 한국이어도,
제주도까지 그렇게 옮기는 건,
외국에 나가는 것만큼 쉽지 않은 일이야.
라고 말하는 대신,
“우리 아빠도, 너 나이쯤에 사업을 시작하셨다고
했어.”
“그래?”
“응. 무역회사 다니시다가, 무역회사를 시작하셨어.”
“그렇구나. 나도, 회사 다니면서, 생각을 좀 하고 있긴 한대.”
“콘텐츠는 있어?”
현정은,
이성적으로,
제주도에 따라 내려오는 건 무리야.
너랑 나랑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라고 말하는 대신,
그가 하는 이야기, 미래에,
그녀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포함해서 묻는다.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는 게 있긴 해.”
“말해 봐.”
“말 못 해주지.”
“왜?”
“기밀이니까. 이거 엄청난 아이디어인데, 막 그렇게
유출되면 안 돼. 게다가 넌 동종 업계사람이잖아. 너도
들어 보면, 감이 딱 와서, 안돼.”
얘 봐라.
함께,
같이,
어쩌고 할 땐 언제고,
사업 콘텐츠 공유는 안 한다 이거지.
“벌써부터 비밀도 만드시겠다.”
“그 말 몰라? 며느리도 안 알려 준다는 거?”
“양념장 비법은 가족도 안 알려 준다는 거 그건가?”
“응. 아무튼 아무리 가족이라도 비법 공개는 위험해.”
어이가 없네.
“그런데 난 그렇게 시간도 많이 쓰고 싶지 않아?.”
“뭘?”
“만약 사업을 시작하면, 지금 보다 더 바빠져서 너랑
시간을 많이 못 보내면 어떡해. 너랑 시간을 더 많이
보내고 싶어서, 제주도로 갈까 생각하는 건데.”
역시.
그의 안에 담긴,
사랑 ‘soul’ 은
남 다르다.
따라갈 수가 없다.
“그런데 난, 자기 일을 멋지게 하는 남자가 좋은데.
남자는 역시 능력 아니야?”
“맞아. 남자는 능력이야. 나처럼.”
아.
그의 자기애를 건드려 버렸다.
“엄마도 아빠 사업을 같이 도우셨었대. 엄마가 영문과
출신이라. 영어로 된 서류를 도와 드렸다고 하셨어.”
“그것도 괜찮겠다. 너랑 같이 일 하는 거. 나는
개발하고, 프로그래밍하고, 네가 프러덕트 매니징
하면 되겠어. 와. 우리, 부자 되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콘텐츠가 뭔지 말해봐. 내가 너랑 같이
사업 파트너가 될지 말지 결정하게.”
재욱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한다.
“아직은 안돼. 네가 내 진짜 사업 파트너가 된다고
결정하면 말해 줄게.”
“뭔지 들어 봐야 파트너가 되지 말지를 결정하지.”
“이건 무조건 대박이야. 뭔지 안 들어 봐도 된다니까.”
“너, 사실 아무것도 없지?”
“있어.”
“솔직히 말해봐, 콘텐츠 같은 거 없지?”
“네가 그렇게 떠봐도 말 안 해줄 거야.”
“얘 봐라. 입이 왜 이렇게 무겁지.”
“다른 거 물어봐. 내가 입이 얼마나 가벼운지 알려
줄게.”
“다른 거? 뭘 물어봐?”
“사랑해? 이런 거.”
역시 그의
사랑 ‘soul’ 은
따라갈 수가 없다.
재욱은 그녀의 시간,
그녀의 계획,
그녀의 미래에,
그가 있어,
행복하다.
그는 그가 여느 때보다,
모든 것에 에너지가 넘치고 있음을 느낀다.
그녀와 함께 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녀 곁에서,
그녀가 쉴 수 있는 그늘이 되어 주고,
그녀를 빛나게 해 주고,
그녀를 미소 짓게 하며,
그녀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고 싶다.
엘레나에게는 그녀의 아빠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의 아빠는 토드 한 사람뿐이다.
하지만, 엘레나가 믿고 의지 할 수 있는,
그녀가 생각하는
이웃이든,
친구든,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현정의 엄마에게는,
그녀의 딸을 정말 아껴주고, 사랑해 주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의 부모가 바라는지도 모르는,
결혼,
자녀,
가정 같은 것들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의 부모님은
이해해 주실 것이다.
무엇보다,
그가 행복하길 바라시니까.
그는,
그가
누군가의 남편,
남자 친구,
아빠로 불려지지 않아도 괜찮다.
그는 재욱이고,
그는 현정과 함께 있다.
그러면 된다.
그리고,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그때까지 얼마 큼의 시간이 흘러도,
현정과 함께 한다면,
괜찮다.
현정은 더 이상
그의 미래에 대해,
세상이나 그의 부모가,
기대할 수 도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의 마음에,
그녀가 채워주는
평온과 사랑이 넘치게 해주고 싶다.
이제 그녀는,
그녀가
과거에 누군가의 ‘ex’
현재에 누군가의 여자 친구,
그리고 미래에 누군가의 부인,
이라는 범주에 그녀를 두지 않는다.
그녀는,
현정이고,
엄마고,
딸이며,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둘은,
서로 이러자 저러자 이야기하며,
약속하지도 않았고,
계약서 같은 것은 더더욱 없다.
또한 각자에게 담긴 마음과 생각이
이렇다고 상대방에게 말하지도 않았다.
각자의 마음이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둔다.
그래서,
함께 더 할만하면 하고,
그만 할 만하면 그만하고,
지금, 함께 여도 괜찮고,
만약 내일 한쪽이
각자의 길을 가길 원하는 것도
받아들였다.
8월 말,
평창집은,
그때 마음에 들어 하셨던 노 부부가 살게 되었다.
재철과 지숙도 그런 모습으로 서로 늙어,
그 연세쯤,
그 집에서 사셨을 것이다.
잠실 집도,
11살인 남자아이와 이제 초등학교를 입학하는
8살 여자 아이가 있는
두 아이의 부부에게 팔렸다.
집 앞에, 초, 중, 고 학교가 다 있어서,
아이들이 클 때까지는 문제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엘레나가 학교에 입학했다.
생각보다 적응도 잘하고,
학교도 마음에 들어 하고,
친구들도 사귀어서 다행이다.
여전히 그 미국에 있는 친구와는
한 달에 한번
인터넷으로 접속해,
게임을 한다.
낮에 엘레나가 학교를 가서,
시간이 많아진 지숙은,
소믈리에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다.
정하에게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 사이 정하네도 제주도에 왔다 갔었고,
윗집 선생님댁은 이사할 때도 내려와서 도와주시더니
그 사이 두어 번 더 다녀 가셨다.
명우는, 현정만 서울에서 따로 만나, 술 한잔을 했고
제주도는 다음 해, 여름휴가 때나
내려와 보겠다고 하지만
현정은 이곳이 아니라,
명우가 맘에 들어하는 그 분과,
다른 곳에서 휴가를 보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둘이 이곳이 같이 오는 것도 환영이고.
현정은 이제,
서울과 평창,
서울과 제주도로,
다니지 않는다.
9월 말쯤,
현정은 갑자기 제주 대학교에서,
학원 원장이 소개를 시켜줘,
컴퓨터 학과 시간 강사 일을 하게 되었다.
학과장과 원장은 서로 언니 동생 하며 아는 사이인데,
강사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자동차와 접촉사고가 나서,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다리 한 개와,
팔 한 개가 부러져,
부득이하게, 출근을 할 수 없게 됐다고 한다.
학과장은 여기저기 대타 강사를 구하는 중에,
원장과 오랜만에 통화를 했고,
이를 알게 된 원장이
현정을 소개한 것이다.
현정은 컴퓨터 학과 전공자 아닌가.
게다가 박사 학위도 있지 않은가.
전공도 살리고,
강의도 일주일에 두 번,
오후에 있어서,
시간적으로도 괜찮을 것 같아,
중간에 들어가 강의하는 것이지만,
흔쾌히 수락했고,
학과처에서도 현정의 경력과 학위를 보고 상당히
만족해했다.
주중에 두 번 오후에 있는 강의 시간을 빼고는,
나머지 시간은 강의 준비를 한다.
저녁식사는 늘 엘레나와 엄마와 한다.
지숙이 음식을 준비할 때도 있고
현정이 간단하게 할 때도 있고,
같이 할 때도 있고,
어떤 날은
세 식구가 나가 사 먹는 날도 있다.
동네지만.
여자 셋이
나름 이쁘게 입고
저녁에 지숙과 차 한잔을 마시는 날도 있다.
오전에, 지숙과 요가를 다니는 요일이 있고,
오일장이 서는 요일은 함께 가서,
장도 보고,
시장 음식도 사 먹는다.
현정이 수업이 있는 날은,
지숙이 엘레나를 학교로 데리러 가고,
수업이 없는 날은 현정이 데리러 간다.
어떤 날은 온 식구가 엘레나를 데리러 가서,
엘레나가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노는 것을 보며,
둘은 말없이,
라테를 마시기도 한다.
그렇게, 현정은
지숙과 엘레나와 함께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일상을 만들며 지낸다.
재욱은 여전히 같은 동네,
같은 오피스텔에 산다.
영어 학원은 그만뒀다.
K 직장인답게,
아침, 저녁, 출퇴근을 하고,
새 프로젝트가 있는 날은 야근도 하고,
요즘은 회식도 참석한다.
참석 못할 이유가 없어서.
퇴근하면, 주네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는다.
이제는 누군가의 아파트 앞,
그리고 오피스텔까지 걸을 일이 없어서,
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달리기 동호회에 가입해 볼까,
이왕 달리는 김에 마라톤도 출전해 볼까,
자전거 동호회가 있다고 해서,
그것도 가입해 볼까 생각하고 있는 중에,
지난번, 스키를 같이 타러 갔던 동료들이
크로스 핏도 소개해 줘서,
일주일에 한 번은 그들과 함께 그곳에 가서,
운동을 한다.
운동을 꽤나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
일이 끝나고 나면 한강에 가서
가끔 농구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뭐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없이
다들
쿨 하게 헤어진다.
다들 여자 친구들도 없고,
게임도 못하고,
술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들도 아니고,
수다도 없는,
겨우 하는 취미가 운동인데,
그나마 회사에 비슷한 무리들이 있어,
일주일에 두서번 운동을 함께 해서,
부쩍 친해졌지만,
함께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수다를 떨거나,
따로 연락하는 일은 없다.
재욱은 집에 와서,
동네를 혼자 달린 날은,
편의점에 앉아 혼자 맥주를 마시기도 한다.
편의점 플렉스는 하지 않는다.
사가지고 와서는, 쌓이다
결국은 버리는 일이 생겨서.
어떤 토요일은 주 와 함께, 그의 가게 영업을 마치고,
다른 집에 가 골뱅이 소면과 파전에 소주를 마신다.
서로 대화를 많이 하지는 않는다.
재욱도 영어로는 할 말이 없고.
주 도, 영어로 물어봐도, 별 할 말이 없어서.
그렇다고 한국말로도 둘이 달리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소주잔을 함께 기울이는 것이 좋다.
왠지 오래 알고 지낸,
서로 별 말이 없어도
알아 자식아
하는
동네 친구와 있는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어떤 날은,
지하철에서 내려,
무심코, 동네 한 바퀴를 걷고,
그의 집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재 본다.
익숙했던 습관처럼.
그렇게 그녀 없이 살아 본다.
그리움도 기다림도 없이.
기대도 희망도 없이.
밀어내지도 않고,
그렇다고 붙잡고 있지도 않고
그렇게 그녀 없는 시간 속에,
그를 내 버려둬 본다.
오늘 현정은
잠이 오지 않아,
침대에서 뒤척 뒤척 하다,
일어나 책상에 앉는다.
오랜만에,
책상 서랍을 열어,
열쇠가 채어진 노트를 꺼낸다.
[가로등 불빛, 차가운 공기 속의 밤거리를 이제는 걷지
않는다. 대신, 엘레나와 엄마와 이른 저녁을 먹고,
노을이 지는 동네를 걷는다. 사케와 우동도 먹지
않는다. 편의점 앞에서 맥주도 마시지 않는다. 함께
할 이가 없어서. 대신, 차를 한 잔 마신다. 엄마와 함께
할 수 있어서. 망고 주스를 마신다. 엘레나와 함께
할 수 있어서. 밤에 집 앞으로 찾아오는, 누군가로
인해, 설레는 일도 없다. 심장의 박동은 늘 같은 비트로
평온하게 뛴다. 지하철을 타는 대신, 차를 운전하고,
학원 대신, 대학교 강의를 준비하고, 엘레나를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학교에 보낸다. 학교 친구 엄마들도
만난다. 여느 한국 엄마들처럼. 필라테스도 아니고,
누군가 소개해준 gym 도 아닌, 요가 학원에 엄마와
함께 간다. 그리고, 그전처럼, 주말에는, 엘레나와
엄마와 함께, 바다를 가거나, 산에 가거나, 해안길을
따라 자전거를 탄다.
일상이 되어 버렸던 일들이 어느덧 추억이 되고,
요즘은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현정은, 노트를 덮고,
열쇠로 채우고,
서랍 깊이 넣는다.
누가 볼 정도로 비밀은 적혀 있지 않지만.
사실 정말 적고 싶은 말들은 적지 않았다.
글이 아닌,
마음에 간직하고 싶다.
엘레나의 학교와 현정의 대학교가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다.
제 작년 이맘때,
현정은 엘레나와 함께 한국에 왔었다.
그동안, 현정이 지낸 서울 생활은,
‘soul’ 이 가득 채워진 시간이었다.
외면한 아빠 재철의 죽음을 마주 하면서,
그리움 대신, 행복했던 추억으로 되새길 수 있었다.
떠나고 싶었던 곳에서,
가장 열심히, 열정적으로 에너지 넘치게
살아 냈음을 발견했다.
이혼도, 사망한 전 남편도 문제가 아니라고
받아들였다.
엘레나를 보며,
가끔 토드를 생각하고,
그에 대한 미움이나 배신, 원망은 용서했다.
그래도 그 당시, 서로 사랑했고, 결혼했고,
서로에게 잠시나마, 평온과 위안을 주지 않았던가.
현정은 그녀 자신과도 화해를 했다.
그녀의 ‘soul’ 안에 담긴,
슬픔, 고통, 트라우마, 상실,
그리고, 희망과 기쁨,
그리고 행복과 사랑,
모든 감정들을 받아들이고 화해했다.
떠난 현정도,
도망친 현정도,
억누른 현정도,
꿈속에 있는 것 같은 현정도,
현실의 현정도,
모두 그녀였음을 받아들였다.
그녀를 제대로 마주한,
서울 생활은,
‘soul’ 이 넘쳤었다.
그리고, 새로 시작된 이곳에서는,
현재에 머물러 본다.
과거에서 도망치거나 외면하는 것도 아닌,
일어나지 않을 미래를 염려해서,
망설이고 주춤하고,
그만하는 것이 아닌,
현재에 있는 현정.
그 현정은 무엇을 하고 있으며,
누구이며,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가를
생각한다.
그렇게 2025년,
새해가 또 시작이 되었다.
토요일,
늦은 아침을 먹은 후,
정오.
현정과 지숙, 엘레나는 잠바를 두툼하게 입고,
겨울바다를 보러 간다.
사면이 바다라,
언제든 갈 수 있는 바다지만,
바다를 가는 길은 늘 설렌다.
늘 보는 바다지만,
늘 다르니까.
엘레나는 모래 놀이를 꺼내, 놀고 있다
지숙은 그 옆에 담요를 깔고, 다른 담요로 무릎을
덮고 앉아 있다.
현정은 근처에서, 따뜻한 마끼아또 두 잔을 사가지고 와서, 지숙 옆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제주도라 그런지,
서울만큼 춥지는 않지만,
공기가 싸늘한것이,
‘chilly’ 한 기분이 들어 좋다.
맑은 하늘에,
바람이 살살 불고,
푸른색의 파도가 잔잔하게 일렁인다.
참으로,
‘soul’ 넘치는 풍경이다.
시카고의 ‘Windy city’에서 느낀 바람.
샌프란시스코의 ‘Bay’에서 느낀 바람.
‘Tiburon’ 집의 거실에 앉아서 느낀 바람.
평창집에서 나무 사이로 불던 바람.
서울의 차가운 밤공기에 실려온 바람.
부는 바람 사이로,
짧고 빠르게 지난 시간들이 떠오른다.
현정은,
서로 말은 안 했지만,
행복하게 살다,
재철을 만나자고,
다짐하며 살아내고 있는 지숙의 얼굴을 바라 본다.
현정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귀한 존재인
엘레나를 바라 본다.
현정은,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보며,
하얗게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를 본다.
현재 머무는 시간과
공간이
아름답다.
띵동
문자가 왔다.
“나야 제이슨. 잘 지내?”
그녀는,
빠르게 답장도 하지 않고,
그의 문자를 외면 하지도 않고,
그의 문자를 읽고,
다시 바다를 바라 본다.
그가 그녀의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일상으로,
다시 찾아왔다.
이번엔
어떤 ‘Soul’ 이 넘쳐 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