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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Forty Three 반지

by Hye Jang

“내일은 이번 후보가 맘에 안 들어 내 보냈다고 못할 것

같아.”


“왜?”


“내 보내기 싫어.”


“그럼?”


“응. 저 혼인했어요. 이제 부인이 있어요 할 거야.”


“뭐야. 부인이라니.”


“그럼 부인이지. 사람들한테 자랑하고 싶어. 막 떠들고

싶어. 내 부인 사엘이에요라고.”


“혼인도 안 하고 무슨.”


“무슨 소리야. 우리 혼인한 거 아니야?”


“아니야. 내가 생각해 본다고 했잖아.”


“아니야. 우린 이미 몸과 마음은 혼인한 거야. 다음엔

예쁜 혼인식을 해줄게. 네가 좋아하는 꽃들로 장식하

고, 우리 혼인 축사는 하갈님에게 해달라고 하자. 세상

에서 가장 이쁜 혼인식에서 넌 가장 아름다운 부인이

될 거야.”


라단이 자리에서 일어나, 벗어 놓은 윗옷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사엘 옆에 다시 눕는다.


“ 손 줘봐.”


사엘이 손을 주자, 라단이 반지를 사엘의 손에 끼어 주

며 말한다.


“딱 맞네. 역시.”


“이게 뭐야?


"너 주려고 만든 거야.”


“네가 만들었다고?”


“응.”


사엘이 손을 돌리며, 반지를 이리저리 본다. 가운데 동

그렇게 구멍을 판 것을 장식으로 올려놓은 모양의 반

지이다.


“어디에도 팔지 않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것을 너에게 주고 싶었어. 널 다시 만나면 주려고, 그

때부터 널 생각하며, 만들고, 다듬고, 칠도하고 해서 만

든 거야. 그런데 너의 손에 끼어 주기까지 시간이 이

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어.”


“너무 이쁘고, 너무 특별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게다가 나무로 만든 반지라니.”


“금도 귀하고, 은도 귀하지만, 뿌리 깊은 나무처럼, 너

에 대한 나의 마음과 사랑도, 이 나무의 뿌리처럼 깊고,

견고 하다는 의미야.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너를 지

키는 버팀목이고, 너의 쉼터가 되는 의미이기도 해. 그

래서 내가 만든 이 나무 반지를 먼저 주고 싶었어. 하지

만, 나중에 금반지도, 은반지도, 옥 반지도 다 해줄게.”


“모양도, 의미도, 너무 귀하고 아름다워. 고마워. 라단

아. 나, 너 부인할게.”


“갑자기?”


“응. 나한테 이런 의미 있는 반지를 손에 끼어주는데,

당연히 너의 부인이 돼야지.”


“역시, 반지부터 주는 거였어.”


“금가락지, 은가락지, 옥가락지도 준다고 했다.”


“이렇게 물질을 좋아하는 부인인 줄 몰랐네. 하지만 다

해줄게. 여기 손가락부터 여기까지, 한 손가락에 두 개

씩 해줄까?”


“치. 안 본 사이에 허세도 늘고.”


라단이 사엘을 끌어안으며 말한다. “너무 행복해. 이

시간이 흘러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사엘이 고개를 들어 라단을 바라본다. 사엘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 여기 이곳에서 그의 옆에서 제사장이 해

야 하는 일도 다 잊고,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다

잊고, 그냥 그의 부인으로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라단이 손으로 사엘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한다. “내

가 그렇게 살게 해 줄게. 친구들도 다 이곳으로 안 전하

게 돌아와, 그들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 가게 할 거야

너와 나는 서로의 일을 하면서, 같이 손잡고, 일을 하러

갔다가, 같이 집으로 돌아와, 같이 밥 먹고, 석양을 함

게 바라보고, 하루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고, 그리고는

이렇게 서로 끌어안고 잘 자라 인사하며, 잠들고, 다음

날 같이 일어나 아침을 함께 시작하며 그렇게 살자. 내

가 꼭 그렇게 살게 해 줄게.”


“응. 꼭 그렇게 해줘.”


사엘은 말만 들어도 행복하고, 꼭 그렇게 되길 마음속

으로 간절히 빌어 본다.


“정하라는 아이가 후보에 있으면, 그 아이를 왕비로 삼

는다고 해. 그 아이가 여기 남아서, 서로 연락할 수 있

게 해 줄 거야. 같이 온 자 중에 아비 갈 이라는 자는 마

데라에서 옷 가게 주인으로 있고, 정하의 엄마라고 할

거야. 이번 왕비 선출을 위해 왕궁을 꾸민 것, 우리가

쓴 가면들 모두 하갈수장님께서 그 마데라 옷 가게에

서 해 온 것처럼 했어. 그래서 정하라는 아이가 왕비가

되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거고. 또 나와 함께 온 여

자 무사들을 하갈 수장님께서 데려 오면, 그들을 왕비

처소 집사들로 하겠다고 해.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정하에게 이야기하면, 정하가 우리들에게 연락

을 전해 줄 거야. 이곳에 들어오는 자들은 모두 무예에

능한 자들이니까, 그들의 안전을 염려하진 않아도 돼.

그리고 너도 조심하고. 알았지?”


“알았어. 걱정하지 마.”


앞으로의 계획들을 나눈 이들은 잠시 바라보며 침묵한

다. 이제 다시 헤어져야 할 시간이기 때문이다.


“가야 해?” 당연하지만 라단은 아쉽다는 듯 묻는다.


“빨리 돌아가서 상황을 알려 줘야지. 애들이 많이 걱정

하며 기다리고 있을 거야. 카야도 그렇고. 이 소식을

듣고 다들 얼마나 기뻐할까. “


라단이 사엘의 손을 꼭 쥐며 말한다. “우리 빨리 다시

보자.”


사엘도 다른 손으로 라단의 손을 감싸 쥐며 말한다.

“그래. 이번엔 다 잘 될 거야.”


서로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잠시 바라본다.


이윽고, 사엘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라단도 일어나 옷

을 입고는, 사엘이 입는 것을 거들어 주고, 머리도 만져

준다.


“어제 어떻게 했어?” 사엘이 묻자, “그냥 아무 일도 없

었던 듯, 후보자는 가면을 쓰고, 궁을 나가고, 나는 잠

시 바라보다 보연당으로 갔어. 너는 어떻게 하려고? 어

디로 갈 거야? 하갈 수장님 댁으로 바로 가는 건 좀 위

험하지 않아?”


“왕궁을 나가면, 위장 무사들이 호위해 줄 거고, 하갈

수장님 댁으로 갈 거야.”


“그래?”


“응. 거기에도 무사 하녀가 있어. 나는 하갈 수장님 댁

하녀 처럼 하고, 왕비 후보로 온 것처럼 했어. 내가 가

고 나면 그 아이가 왕비 후보였던 것처럼 할 거야. 사람

들이 후보자가 누구 인지 알아내려고 할까 봐 그렇게

이미 계획해 놓고 왔어. 지금쯤 애들이나 카야가 비밀

통로로 와 있을 거고, 그들과 같이 가면 되니까 걱정하

지 마.”


라단이 말없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사엘을 보자, 그녀

는 다시 말한다. “걱정하지 마. 우리 이번에는 다 잘 될

거야. 빨리 이곳으로 돌아와, 우리 함께 살자.”


사엘이 라단을 안자, 라단도 사엘을 꼭 안으며 말한다.

“그래. 이번에는 다 잘 될 거야.”


왕비 처소를 나오자, 가면을 쓴 사엘은 라단에게 허리

를 굽혀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뜬다. 라단도 어제처럼, 무

표정 이면서, 다소 싸늘한 얼굴로 다른 곳을 응시한다.

모두 왕비 처소에서 물러가라 했지만, 아버지 사울진

이 숨겨놓은 이들이 어딘가에서 보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가면을 쓴 후보가 보이지 않자, 그도 보연당을 향해 간

다.


담 옆에 숨어서 보던 하인이 사울진에게 달려가 전한

다.


“어제와 같다고?”


“어제 보다 더 안 좋아 보이신 것 같기도 했습니다.”


사울진은 생각한다. 도대체 오늘은 무엇으로 변덕을

부리고 생떼를 써서, 왕비 후보를 내 보냈다고 할지, 벌

써부터 걱정이 된다. 이러다가는 왕비 선출 시험만 보

기 좋게 치르고, 왕비는 들이 지도 못할지도 모르겠다.


하갈 집으로 돌아오니, 카야와 밧세가 와 있다.


놀이방으로 들어오는 사엘을 보자, 카야가 먼저 다가

가 그녀가 혹시 상한 곳은 없는지 살핀다.


사엘이 그런 카야를 보며 말한다. “나는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어. 아주 안전했고. 라단도 만났어. 계획대로

잘 되고 있고. 정하가 보이지 않는 것 보니, 후보자가

된 거 같아 그래서 라단에게 우리가 계획한 걸 말해 줬

어.”


“다행이에요.”


카야는 지금은 계획들 말고, 라단을 만나서 어땠는지,

그녀의 마음은 어떤지 알고 싶지만, 그건 그녀와 단 둘

이 있을 때 물어보고, 지금은 서둘러 돌아가야 할거 같

다고 생각한다.


하갈과 다시 긴 인사를 나누는 밧세가 말한다. “엄마.

곧 봐요. 건강하고 안전하게 계세요.”


“응. 너도 조심하고. 곧 보자 아들. 사엘아 너도 고생 많

았어. 쉬지도 못하고 가네. 조심히 가고, 곧 만나자.”


“네. 수장님. 라단에게, 아비갈과 정하 이야기도 했고

요. 사울진이 눈치채고 와도, 여기 란 이가 왕비 후보였

던 것처럼 잘할 거예요.”


“응. 계획대로 잘하고 있을게.”


하갈이 밧세의 손을 한 번 더 잡는다. 밧세도 그녀의 손

을 마주 잡으며, 걱정하지 말라는 얼굴로 말한다. “갈

게요. 엄마.”


그들이 비밀 통로로 가는 것을 보고는 하갈도 서둘러

준비하고, 보연당으로 향한다. 조금 늦은 하갈이 들어

서자, 이미 보연당에는 왕비 후보를 또 내 보냈다는 이

야기로, 어제처럼 분위기가 좋지 않다.


라단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층계를 내려오며 말한

다. “지금 있는 나머지 후보도 다 가라 하세요. 이제는

그들을 매일 한 명씩 만나는 일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울진이 말한다. “그렇게 하라고, 드리는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도대체, 이게 뭐라고 이 혼사가 뭐라고 이렇게 까지

하시는 겁니까? 전 처음부터 왕비는 필요 없다고 했습

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원하는 대로 해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뭘 더 그렇게 요구하고 바라시는 것

입니까? 이 혼사가 이 나라를 위해 어떠한 발전되는 거

라도하고 있습니까? 혼사라도 하면, 그동안 내리지 않

던 비라도 내려, 가뭄이 멈추기라도 합니까?”


사울진이 말한다. “혼사도 나라를 위한 일 중의 하나이

기도 합니다. 안정된 왕실은.”


라단이 사울진에게 다가가, 사울진의 말을 막으며 말

한다. “안정된 왕실요? 아버지 생각에는 지금의 왕실

이 안정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안정된

왕실이 아니라, 아버지가 원하시는 왕실, 원하시는 나

라를 만들고 싶어서 그러시는 것이겠지요. 그럼에도

제가 이 만큼이라도 해드리지 않습니까? 도대체 여기

서 뭘 얼마나, 더 하라고 이러시는 겁니까? 내가 마을

을 위하는 일이라면, 백번 천 번이고, 듣고, 설득하고,

반발해도 또 듣고, 설득합니다. 하지만, 이 혼사가, 내

왕비를 맞이하는데, 이 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다

니요. 내가 무슨 이유를 대고 뭘 설득해야 합니까.”


이번에는 라단이 넬에게 다가가며 다시 말을 잇는다.

“보나 보니아가 왕비가 되길 원하셔서 이러시는 겁니

까?“


“아닙니다. 아니, 제 딸들이 되면 좋지요. 하지만 그들

이 실력 것 붙길 바랄 뿐이 지요.”


“첫 번째 나간 후보자는 브니아였습니다.”


놀란 넬이 “네?”라고 말하자, 사울진도 놀라 말한다.

“브니아라고요? 그래서 넬 수장의 딸이라 내 보내신

것입니까?”


라단이 사울진을 비웃듯 쳐다보며 말한다. “본인이 하

기 싫다고 내 보내 달라고 해서 내 보냈습니다.”


넬이 말한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 자리에 불러서 물어볼까요? 모셔 왔느냐?”


왕실 집사에게 말하자, 그가 보연당 문을 여니, 브니아

와 보가 서 있다.


그들이 들어오자 넬이 묻는다. “그 말이 사실이냐?”


브니아가 말한다. “아버지. 우리는 왕비가 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요. 아버지가 하도 하라고 강요하셔

서, 응시는 했는데, 제가 실력이 좋았는지, 얼결에 1등

이 되었고, 그리고 라단왕께 부탁드렸어요. 저는 왕비

가 되기 싫으니 내 보내 달라고 말씀드렸어요.”


“네가 그럴 리가 없어. 아니지? 무슨 이유로 내 보내진

것인지 말해 봐라. 응?”


“아버지 그만하세요. 이번 시험으로 아버지 딸이 왕비

로서는 이 나라에서 실력이 제일 좋은 자인걸로만 만

족하세요. 일등 해 드렸으면 됐잖아요. 하지만 왕비가

돼서는 못 살아요. 그리고 전?”


“그리고?”


“전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혼인해 평범하게 알콩 달

콩 살 거예요.”


넬이 어이가 없어 잠시 눈을 감는다.


잠시 후, 보를 보며 묻는다. “너는?”


“저는 첫 번째 시험에서 떨어졌어요. 실력도 안 되지만

되도 사실 왕비가 되고 싶지 않아요. 여기 어른들은 뭐

라도 되고 싶으시고, 높은 곳이라며 올라가고 싶으신

거 같은데, 저희들은 그런 거 없어요. 높이 올라가고 뭐

가 되는 게 뭐가 중요해요.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재미

나게 사는 게 더 낫죠. 모두들 그렇게 살라고 만드신 나

라 아니에요?”


넬이 더 이상은 안 되겠는 듯 보아 브니아를 잡고는 황

급히 보연당을 나간다.


라단이 말한다. “들으셨죠? 저도 브니아 인 것을 알고

그래 이렇게 실력이 좋으니 넬 수장님이 그녀가 왕비

가 됐으면 하는 욕심을 내셨구나 하며 이해했어요. 하

지만 왕비가 되기 싫으니 내 보내 달라는데 제가 어떻

게 합니까? 오늘 이 자리도 브니아가 와서 말하겠다고

해서 모시고 온 것입니다.”


사울진이 말한다. ”그럼 오늘 내 보내신 후보님은요?”


“그 후보요. 그 후보는 하갈님댁 하녀가 아닙니까? 하

갈님도 그걸 아시고 오늘 좀 늦으신 거 아닌가요?”


“네. 뭐. 그렇습니다.”


사울진이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말한다. “하녀요? 아

니 어떻게 하녀가?”


하갈이 말하다. “뭐가 어때서요? 누구나 되고 싶은 사

람은 지원하라 해서 한 건데 뭐가 잘못 됐습니까?”


사울진이 말한다. “아니, 그 하녀가, 하녀가 지원하는

것을 알고도 가만 두셨습니까?”


“몰랐습니다. 하지만 알았다 해도 말리지 않았을 겁니

다. 오히려 시험 문제를 알려 주고서라도 도와주었을

거예요. 그 용기가 장하고 기특해서요. 사울진님과 넬

님도 브니아랑 보에게 시험 문제를 알려 주지 않으셨

습니까?”


사울진이 문제를 정확하게 알려준 것은 아니나, 그래

도 이런 식으로 낼 것이라고 그들에게 귀띔은 한 것이

있어,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돌리려, 라단에게 묻는다.

“그래서, 이번에는 왜 내보내신 것입니까? 하녀인 것

을 아니, 영 마음이 그러셨어요?”


“내 보내 달라 해서 내 보냈습니다.”


사울진이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말한다. “아니. 감히

하녀 주제에 왕비 선출에 응시한 것만도, 영광이거늘,

뭐라고요? 내 보내 달라고 했다니요? 내 이년을 잡아

다가.”


“네. 내 보내 달라 했습니다. 그 자가, 이 세상이 바뀐

줄 알고, 진짜 그녀 같은 신분도 왕비가 될 수 있는 나

라 인가 하며 기대를 하고 응시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

동안 얼마나 책도 많이 읽고, 세상에 대한 지식과 견문

이 넓고 깊고,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도 많은 자인

지. 왕비로서 손색이 없는 자였습니다.”


하갈이 묻는다. “그런데 우리 란이가, 그런 아이인데,

왜 안 하겠다고 했을까요? 새벽에 들어오길래 무슨 일

있냐고 물었더니, 왕궁에 있다가 왔다고 해서, 저도 오

늘 알았습니다. 하지만 왜 나왔는지는 이야기해 주지

않아서, 걱정도 되고, 해서 그 아이를 살피느라 좀 늦었

던 것입니다.”


하갈의 말에 라단이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층계를 올

라, 의자에 앉고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연다. “시험을

치르면서 생각했답니다. 바뀐 세상이 아니구나. 여전

히 그대로이구나. 그녀가 왕비가 돼도, 하녀 출신이라

는 이유로 무시당하겠구나. 그럴 바에는 차라리 하갈

님 댁에서 하녀로 있으면서, 자기 일 하며 사는 게 낫다

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하녀로 있는 것이 오히려 무시

당하지 않겠구나 생각했답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

는데, 얼마나 창피했는지 아십니까? 도대체 왕이라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내가 이 나라를 위해 무엇을 했습

니까? 용기 내어 지원한 자가, 왕비로 살면 오히려 무

시당하니, 그냥 하녀로 사는 게 낫다니요? 나도 왕비가

되었다. 세상이 바뀌었다. 나는 바뀐 세상의 첫 번째로 평등한 왕비이다. 그러라고, 누구나 자원하라 했는데,

막상 와서 시험을 치르니, 바뀐 세상이 아니라는 생각

이 들었다니요. 전 도대체 바뀌지도 않은 세상에서 새

나라 새 왕이라며, 여기서 무엇을 한 것입니까? 저는

다른 후보자들을 만나는 것이 두렵습니다. 한 명은 싫

은데, 아버지가 강요해서 어쩔 수 없이 자원하고라고

내 보내 달라며, 이전 세상이 좋았다고 하질 않나, 한

명은 왕비 자리보다 하녀가 낫다며, 내 보내 달라 하질

않나. 정말 나머지 후보들을 만나는 것이 두렵고 창피

합니다.”


다들 아무 말이 없다.


라단이 말을 잇는다. “바로 잡아야 합니다. 이렇게는

새 세상, 새 나라, 새 왕이 의미가 없어요. 이 나라를 만

드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넬 부관님은 4지파, 명망도

힘도 없다며, 새 나라를 만들어 이제는 명망도 힘도 가

지셨는데, 그 자녀는 이전 4지파 때가 좋았답니다. 게

다가 하녀는 이 나라보다, 2지파 하갈 수장님 댁 안에서, 차별도 무시도 없이, 더 자유롭고, 평등 함을 느낀

답니다. 그런데도, 이 나라가 있어야 하며, 제가 여기

에 앉아 있어야 합니까?”


사울진이 말한다. “또 왜 그러 십니까? 잘해보면 되지,

왜 늘 안 할 생각부터 하십니까?”


“제가 마을이 잘 되는 일을 안 한 것이 있습니까? 그리

고 그건 왕이 아니어도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엔 왕이

없고, 지파 로만 있어도 다 했어요. 최소한 그 지파를

다 없애고, 새 나라를 만들었으면 뭐라도 달라져야 하

지 않습니까? 그런데 뭐가 달라졌습니까? 나라는, 환

경은 달라진 것 없이 저만 달라졌지요. 이 쓸모도 없는

왕이라는 자리에 앉아 있는 저만 달라졌어요. 그러니

이 왕이라는 자리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경전의 신이 왕을 지명했습니까? 필요가 없

다면 그러시지 않았겠지요.”


사울진은 말을 하고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라단

이 경전의 신을 부름을 받지 못한 왕이라고 말한 것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자리에서 경전의 신과

왕의 지명을 입에 담은 것이 후회가 된다. 서둘러 말을

잇는다. “그러니까 제 말은 왕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

다.”


라단이 말한다. “네 필요하겠지요. 그러니 경전의 신도

왕을 지명하신 것이고요. 그러니 우리는 기다려야 했

습니다. 그렇다면, 왕이 왜 필요 한지 답은 찾아가면서,

왕이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만든 이 나라는 명분도, 부름도, 목적도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그저 힘없고 명망 없는 지파 수장이 힘

과 명망을 가지고 싶어 만든 세상이니, 이곳에 어떻게

평등과, 자유가 있겠습니까? 하갈 님의 하녀가 이 세상

을 정확하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브니아가, 그녀의 아

버지의 욕심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고요.”


라단의 말에 사울진이 안절부절하며, 손톱을 물어뜯으

려, 입으로 가져갔다가, 이것도 아니라며, 손을 내리고

는 마주 잡고는 대신 연신 비빈다.


라단이 말한다. “오늘은 다들 가 보세요. 회의를 할 수

나 있겠습니까. 저도 마음도 지치고 머리도 아픕니다.

좀 쉬었다가 다음 후보자를 만나 보겠습니다. 그래도

해 보겠다고 지원해주신 분들인데, 제가 만나는 봐야

예의죠.”


다들 말없이 인사를 하고는 보연당을 나선다,


사울진의 마음이 복잡하고 언짢다.


하갈과 마하살은 별다른 표정이나 말없이 왕궁을 나선

다.


모두 나가고, 라단이 의자에 머리를 기댄다.


왕실 집사가 묻는다. “처소로 가시 갰습니까?”


“조금 있다가.“


“약좀 가져오라 할까요?”


“아니야. 좀 쉬면 돼. 처소에 갈 때 되면 다시 부를 테니

나가 있어.”


왕실 집사가 나가자, 라단은 윗주머니에서 반지를 꺼

내 손으로 만지작 거린다. 사엘에게 하나 주고, 하나는

그의 것이다. 그녀가 이곳으로 돌아오면, 같이 이 반지

를 끼고, 그녀를 부인이라 부르며 함께 사는 모습을 상

상하고 또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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