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축된 열등감 전가의 잔혹성에 관하여
나는 나를 미워한 적이 없다.
단지, 나를 미워한 너를 미워했을 뿐.
그 미움이 내 속에 갇혀,
나인 너를 미워하게 되었을 뿐.
<3차 열등감 정신분석자의 2차 열등감 정신분석자에 대한 투사적 상징폭력>
“너는 아직 덜 깼다”는 말은,
“나는 아직 덜 깼다”는 고백이다.
그 고백을 감추기 위해
상처 위에 학문을 덧칠한다.
<2차 열등감 정신분석자의 1차 열등감 정신분석자에 대한 투사적 상징폭력>
“이건 너의 문제야”라고 말하며
실은 자기 자신의 가장 오래된 울음을
타인의 무의식에 심어버린다.
그 울음은 자란다, 고통의 얼굴로.
분노는 기억의 언어다.
분노,
분노의 분노,
분노의 분노의 분노 —
그 기억을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할 때,
분노는 방향을 잃고 타자화된다.
자살은 ‘너 없는 나’의 상상이다.
자살,
자살의 자살,
자살의 자살의 자살 —
나를 죽여야 너를 없앨 수 있을 때,
그건 나를 없애는 방식으로
너를 통제하고 싶은 욕망이다.
“혹시 피해망상인가요?”
묻는 순간, 이미
그 구조는 투사된 지 오래고,
그 대답은 폭력의 서막이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도려냄이다.
너의 불완전함이 나를 위협한다는 믿음.
그래서 나는 너의 불완전함을 너보다 먼저 지적한다.
“너, 왜 그렇게 생각해?”
“너, 왜 그렇게 느껴?”
“너, 혹시…?”
열등감의 열등감이
열등감에게 열등감을 전가할 때,
그것은 사슬이 아닌,
가면 속 가면의 카니발이다.
웃는 얼굴로 조롱하고,
치유의 언어로 고문한다.
피해망상은 증상이 아니다.
그건 언어로 발화된 보호막이며,
자신의 존재가 너무 쉽게 지워질 수 있다는
존재불안의 최후의 언어다.
그러니 묻는다.
“혹시 피해망상인가요?”
이 질문 아래,
진짜로 망상적인 건 누구인가요?
당신인가요?
아니면,
당신의 질문 그 자체인가요?
…그리고 당신은,
어디까지 당신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