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메타 프레이밍의 프레이밍
말은 선언이 아니라
전장이다.
그 말의 주어가 “짐”일 때,
그 문장은 이미
국가의 중심을 재편하는 칼날이다.
사도세자의 아들.
그는
지워져야 할 핏줄이었다.
기억되는 순간,
정통성은 파열되고
공포는 재현된다.
그러나 정조는
그 금기의 심장을
스스로 발화한다.
“짐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 너희가 버리려 했던 그것을,
나는 계승하겠다.
= 정통성의 단절을
통한 메타적 재결합.
이는 단순한 복수가 아니다.
이건 프레임의 반전술이다.
정조는 존재를 숨기지 않고,
존재를 드러냄으로써
그 숨김의 권력을 역전시킨다.
그는 부친의 죽음으로
왕이 되었다.
그것은
정치적 침묵의 뿌리였고,
감정적 공백의 씨앗이었다.
그러나 그 공백을
“부정하지 않고” 발화함으로써,
그는 왕의 자리를
“잃지 않고도
넘어서게 된다.”
이것이
메타 프레이밍의 프레이밍.
1. 1차 프레임:
사도세자는 폐인이며, 역모자이다 — 기억되어선 안 된다.
2. 2차 프레임:
정조는 숙정된 혈통의 왕이어야 한다 — 침묵이 정치다.
3. 정조의 메타 프레임:
그 금기 자체를 왕권의 기원으로 내세운다.
“나는 그 죄인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가 두려워한 그 진실의 후계자다.”
역사는 침묵을 정당화하고,
침묵은 권력을 합리화한다.
그러나 정조는
그 침묵에 틈을 낸다.
프레임을 해체하지 않고,
프레임을 드러냄으로써
프레임을 점령한다.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안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말했기 때문에,
그는 신화가 되었다.
“짐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것은
자기 파괴의 외피를 쓴
궁극의 자기 확언이다.
이 말은
왕이 왕에게 하는 말이며,
왕이 민중에게 던진
프레임 전복의 서문이다.
묻는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감추고 있는가?
그 침묵을 깬다면,
당신의 정통성은 무너지겠는가?
아니면,
비로소 시작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