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을 잇는 우정의 강물
1989년 3월,
서울에 있는 도시바 메디컬(Toshiba Medical) 한국 총판인 '영한무역'의 강 상무가 준혁을 찾아왔다.
"교수님, 오는 5월 후쿠오카에서 일본 의료기 전시회가 열리게 되는데 거기 가서 저희 회사 신장비(新裝備)들 한 번 둘러보시고 평가도 좀 해 주시지요.”
그 말은 곧, 자회사의 신장비도 구경하고 콧구멍에 바람이라도 좀 넣으러 가자는 말이었다.
요즈음이야 외국 드나들길 제 집 안방 드나들듯 하지만 당시에는 외국 한번 나가는 게 쉽지 않던 시절이었다.
세계적인 의료기 회사에서 30대 후반에 불과한 그를 그토록 예우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 그가 그들의 루미나리 닥터였기 때문이다.
의료기 분야의 글로벌 마켓을 크게 점유하고 있는 유명 회사들은 그 회사 장비를 사용하는 의사들을 유저(user)라 부르고, 그중에서도 개별 국가에서나 국제적으로 영향력이 큰 인플루언서들은 '루미나리 닥터, Luminary doctor'란 이름으로 특별 관리한다.
당시, 준혁이 근무하던 병원의 영상의학과에는 도시바 장비가 가장 많았고, 그가 주로 사용하는 초음파도 도시바 제품이었다. 게다가 그는 이때 이미 초음파학 분야에서 Korea를 대표하는 학자 중 한 명이 되었기에 회사 측에서 그를 루미나리 닥터로 대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준혁은 강 상무와 도시바 장비 구매예정인 부산의 한 종합병원 과장과 함께 셋이 5월 첫 주 토요일 오전 11시 비행기로 후쿠오카로 날아가 오후 1시 넘어 뉴오따니(New Otani) 호텔에 도착했다.
일행은 각자 방에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점심을 먹기 위해 호텔 내에 있는 스시 집으로 내려갔다.
세 사람이 스탠드에 나란히 앉아 주방장이 쥐여주는 스시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준혁이 강 상무에게 물었다.
“오늘 오후에는 뭘 하죠?”
“한 번 찾아봐야죠.”
“그럼 내일 스케줄은?”
“아직 ~~”
강 상무는 한국을 떠나올 때 일본에 도착하면 현지 여행사 사무소에 알아봐서 토·일 이틀 동안의 관광 스케줄을 잡을 예정으로 왔다 하였다.
“그럼, 찾아갈 여행사는 알아보고 왔어요?”
“그건 호텔에 물어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준혁이 제일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계획 없이 움직이는 것이다.
게다가 혼자 여행 온 것도 아니고, 일행을 안내해야 할 사람이 계획도 안 세우고 왔다?
그의 안면(顔面) 온도가 서서히 올라가는 듯했다.
“그럼, 우선 저 주방장에게 한 번 물어보지요.”
강 상무가 능숙한 일본어로 주방장에게 물어보니 ‘자신은 그런 것 모른다’라는 냉정한 답이 돌아왔다.
그의 답하는 태도에 준혁은 기분이 언짢아졌다. '이건 손님을 대하는 매너가 아니지!'
전시회는 월요일. 그럼, 이틀 동안 무얼 하냐? 참으로 황당한 시추에이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그들이 앉아 있는 스탠드 오른쪽 앞쪽 공중전화 박스 옆에는 테이크아웃을 기다리고 있는 한 우아한 중년 여성이 있었는데 준혁의 예민한 감각은 그녀가 아까부터 그들 쪽으로 안테나를 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다. 대화가 여기까지 이르러 답이 없자, 어쩌면 저 여성이 무언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준혁의 안테나에 "띠띠띠" 하며 신호를 보내왔다.
“그러면 저 여자분에게 한 번 물어보지요?”
그의 제안에 강 상무가 일본 말로 몇 마디 묻자, 그녀는 다음과 같은 절망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일본에서는 토요일 오후가 되면 여행사 사무실이 대부분 문을 닫습니다.”
하지만, 그다음에 하는 그녀의 말은 준혁의 예감을 입증해주었다.
"저는 때때로 외국인 상대로 여행 가이드를 하는 사람인데 마침 내일 스케줄이 비어 있으니 괜찮으시다면 내일 관광 안내를 제가 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가방 속에서 'English speaking 외국인 전문 관광가이드'라는 라이선스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녀의 제안에 다들 두말할 것 없이 그러자고 했다.
“그런데, 제 차가 소형이라 세 분이 타시면 불편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지금 더운밥 찬밥 따지게 됐나? 다들 아무 문제없다고 말했다.
“그럼 내일 아침 8시 반에 호텔 길 건너편에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가이드 요금은 받지 않을 테니 기름값과 통행료만 부담하시지요.”
이건 또 웬 떡이냐?!
이리하여 그들 일행은 정체불명의 여성이 내미는 상식을 벗어난 과도한 호의를 그만 덥석 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