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을 잇는 우정의 강물
다음 날 아침, 그들 일행은 일찍 아침을 먹고 8시 반에 약속 장소로 나갔다.
그녀는 미리 도착해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차는 1,600cc짜리 일제 경승용차로서 남자 세 사람이 타기에는 비좁아 앞쪽 조수석에는 준혁이 타고 덩치 큰 두 사람은 뒷좌석에 앉았다. 그날의 일정은 구마모토현 동부에 있는 활화산인 아소산(阿蘇山)을 구경한 후 벳푸 온천을 둘러보고 오는 것으로 편도에 2시간 반 정도 걸릴 것이라 했다.
훤하게 뚫린 길을 따라 차는 시원스레 달렸다. 그녀는 'English speaking Guide' 라이선스 소지자답게 영어가 유창하였고 그런 그녀와 준혁은 영어로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필이 딱 맞아떨어지는 우아한 귀부인이 모는 차를 타고 격조 높은 대화를 나누며 잘 닦인 고속도로 위를 드라이브하는 기분은 참으로 상쾌하였다.
휴게소에 들러 기름을 넣고 출발하자 이번에는 그녀가 한국어로 아리랑을 불러 일행을 놀라게 했다.
차가 마지막 휴게소에 도착하자 다들 내려 각자 용무를 본 후 음료수를 한잔하기로 했는데 그때 그녀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였다.
“오늘 저녁은 우리 집에서 식사 대접을 하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너무나 파격적이고도 과분한 기습적 제안에, 그녀의 면전에다 대 놓고 “우리 한 번 의논해 보고 답할게요.”라 고 할 수도 없고 하여, 다들 얼떨결에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라며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러자 그녀는
“하지만, 집에 있는 남편의 허락을 받아야 하니 전화 한 통 하고 오겠습니다.”
라고 말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순간, 준혁의 머릿속에서는 “왜~ㅇ” 하는 사이렌 소리를 내며 붉은 경광등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여성 동무, 혹시 조총련 공작책?'
당시만 해도 일본에서는 대한민국을 조국으로 하는 민단(재일본조선거류민단, 在日本朝鮮居留民團)보다 북한을 조국으로 받드는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在日本朝鮮人総聯合会)의 세가 훨씬 셌다.
그들은 관광이나 업무차 일본을 방문하는 한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포섭 내지는 납치를 일삼아 일본을 방문하는 모든 한국인은 반나절 동안 모 기관에 가서 조총련에 대한 반공교육을 받아야 했고, 그때 받은 교육 내용의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일본에 갔을 때, 재일동포든 일본인이든 간에 모르는 사람이 접근하여 필요 이상으로 친절하면 일절 응하지 말라. 특히 처음 보는 사람이 모르는 곳에 같이 가자 하면 절대 따라가지 말라. 그랬다가는 자칫 조총련에 납치되어 쥐도 새도 모르게 만경봉호(號)에 실려 이북으로 끌려갈 수 있다.
실제로 한국 사람이 일본에 갔다가 조총련의 공작에 넘어가 간첩이 되어 발각된 사람, 한동안 행방불명되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북의 대남방송에 등장하는 사람 등에 관한 내용이 언론에 심심찮게 보도될 때였으니 그런 교육을 받을 만도 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와 오늘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 하나같이 교육 내용과 딱 맞아떨어져 준혁은 필름을 되돌려서 처음부터 하나하나 짚어보았다.
1) 그녀는 왜 하필이면 그 시간에 들어와 초밥을 시키고 서 있었을까?
마치 우리가 거기 들어올 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듯.
2) 그녀는 왜 모르는 남정네들 대화에 귀를 쫑긋거렸을까?
무얼 엿들으려고?
3) 그렇게 우아한, 아무 모자람 없어 보이는 여성이 관광 가이드를 한다?
뭔가 어색한 조합니다.
4) 그녀는 왜 우리가 묻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이 가이드해주겠다고 했을까?
그것도 일요일에, 예정에도 없던 일을.
5) 그녀는 왜 생면부지의 외국인들을 온종일 따라다니면서 공짜로 가이드해 주겠다는 것인가?
무얼 얻겠다고?
6) 일본인이 아리랑 곡조는 알아도 가사까지 아는 경우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저 여인은 일본인을 가장한 조선인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7) 처음 보는 사람을 집에까지 데리고 가서 저녁을 대접한다? 그것도 세 사람씩이나!
이 부분이야말로 가장 이해 안 가는 대목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준혁의 마음속으로 스산한 불안감이 엄습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