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을 잇는 우정의 강물
안 선생이 모는 준혁의 차는 개금에서 출발해 황령산 터널을 지나 광안대교로 진입했다.
시원스레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그림처럼 펼쳐지는 광활한 수평선과 아이파크를 위시한 해운대 마린시티의 고층빌딩들, 노루 궁둥이처럼 톡 튀어나온 동백섬에 나지막한 달맞이 고개의 부드러운 곡선, 언제 보아도 매력적인 해운대의 아름다운 모습을 웅장한 광안대교가 자랑스러운 자태로 뽐내고 있었다.
레이꼬는 귀국 후 편지에서 광안대교를 지나며 본 해운대의 모습을 마치 SF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고 묘사했다. 차는 어느덧 거대한 신세계 센텀시티 지하 주차장으로 진입했다. 그러자 드넓은 주차장의 규모에 모녀는 놀라는 눈치였다. 목적지인 교보문고에 도착하자 레이꼬는 어린이 동화 분야를 보고자 했다. 그제야 준혁은 그녀가 출간 동화 작가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그들이 왜 한국에 와서 책방과 문구점을 보고자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법학을 전공한 레이꼬는 다양한 재능을 지녔는데 그중 하나가 그림과 공작 솜씨다. 그녀는 1987년에 ‘にんじん にんじん めをさませ 홍당무야 홍당무야 잠에서 깨어나렴’이란 동화책을 발간하였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두 권의 물리학책에 일러스트레이터(illustrator, 삽화가)로 참여했으며 매년 보내오는 크리스마스카드는 자신이 직접 손으로 만들어 보냈다.
일행은 책방과 문구점을 둘러보며 그 규모에 감탄했고 레이꼬가 한국 동화책 한 권과 문구 몇 점을 사고 나자 곧바로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그때 준혁은 문득 어떤 생각이 떠 올라 일행을 잠시 차에서 기다리라 하고 혼자 에스카레이터를 타고 한 층 올라가 주먹밥 두 개를 사 와서 게이꼬에게 주었다.
“귀국해서 집에 도착하면 많이 시장하실 텐데, 밥 하기도 뭣 할 터이니 나중에 이걸로 요기나 하시지요.”
그들은 신세계를 나와 축구장 2.5배 크기의 물결모양 지붕으로 장식된 예술성 높은 영화의 전당을 차로 한 바퀴 돌아보며 감상한 후 곧바로 공항으로 향했다. 저녁에 LED 조명이 들어올 때 보았더라면 훨씬 더 멋있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이 컸으나 어쩔 수 없는 일.
초음파실 단체 회식이 있는 날이면 팀장인 안 선생이 주로 준혁의 차를 몰게 된다. 그럴 때마다 그는 평소에 자신의 차를 몰 때보다 아주 얌전히 모는데도 불구하고 준혁으로부터 “동무, 차 좀 살살 몰라우. 안전거리 지키고!” 하는 잔소리를 들어온 터였다. 하지만 이날은 시간이 빠듯하다는 준혁이 말에 해방된 기분으로 평소처럼 시원스레 밟았다. 한두 번 일본 손님들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긴 했지만, 아무튼 그의 장쾌한 운전 솜씨 덕분에 예정 시각보다 일찍 공항에 도착하여 일행은 커피숍에서 차 한잔하는 여유까지 누리게 되었다.
커피숍에서 준혁은 미리 준비해 온 선물을 손님들께 전했다. 게이꼬에게는 ‘나전칠기자개보석함’을, 레이꼬에게는 ‘라브라도라이트(Labradorite)’라는 천연석에 가죽과 은으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독특한 팔찌를. 그리고 그는 설명을 덧붙였다. 보석함은 서울의 작가가, 팔찌는 부산에 있는 수공예 작가가 만든 것으로 한 디자인에 한 개씩만 만든, 말 그대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작품들이라고.
그때 마침 레이꼬와 안 선생이 잠시 자리를 비워 준혁은 게이꼬와 단둘이 있게 되었다. 그러자 준혁은 그동안 매우 궁금했지만 차마 대놓고 물어볼 수 없었던 질문을 하나 했다.
“우리 처음 만난 날, 왜 그렇게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호의를 베풀었지요?”
그의 질문에 그녀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학창 시절에 한 조선인 유학생과 아주 친한 친구로 지내게 되어 자연스레 친한파가 되었고 결혼 후에는 사업상 조선을 자주 왕래하게 되면서 더더욱 조선이란 나라와 가까워져 술이 한잔 거나해서 귀가하면 아리랑을 곧잘 불렀다. 이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게이꼬는 어려서부터 한국에 대해 호감과 관심을 가게 되었고 아리랑이란 노래는 거의 외우다시피 하였다. 그러던 차, NHK에서 ‘한국어 강좌’를 개설하자 게이꼬는 그 프로그램을 보며 혼자서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를 시작한 지 몇 개월 후, 뉴오따니 호텔에 스시를 사러 갔다가 뜻하지 않게 바로 옆에서 한국말 대화 소리가 들리자, 자신도 모르게 그쪽 대화에 귀 기울이게 되었고 그 결과 상대가 한국에서 건너온 의사들이란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때, 한국인 일행 중 한 명이 주방장에게 여행사에 대해 물었는데 그의 답변하는 태도가 아주 불손하게 느껴졌다. 이에 게이꼬는 ‘일본인 손님이 묻는 데도 저렇게 퉁명스럽게 대답할 수가 있을까? 이건 분명 상대가 한국인이라 깔보고 하는 태도야!’라는 생각에 같은 일본인으로서 창피하고 화나고 미안했다. 그러던 차에 마침 자신에게도 같은 질문을 해 와, 이건 자신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라는 생각에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나섰다 한다.
준혁은 게이꼬의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싱긋이 웃음이 나왔다. 이제야 20여 년 전에 가졌던 대부분의 의혹이 풀린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 남은 의문에 대해 물어보려는 찰나, 레이꼬와 안 선생이 돌아오는 바람에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의문은 그녀의 사후에야 풀리게 되었다.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
출국장 입구에서 다들 아쉬운 석별의 포옹을 나눈 후 손을 흔들었다.
게이꼬와 레이꼬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さようなら 사요나라 ~~”
23년 만에 다시 만나, 겨우 4시간 만에 떠나다니!
이제 가면 언제 다시 만날까? 기약 없는 이별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