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스스로 찾아 나서지는 않을 것 같은 곳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중국의 장가계다.
강, 바다, 계곡, 산 등 빼어난 산 수 풍경 보는 것을 좋아하는 남편의 여행 취향과 죽기 전에 꼭 한번 가봐야 할 곳이라는 워딩을 내세운 여행사의 마케팅 전략은 적절하게 맞아떨어졌다.
그렇게 동행한 장가계 여행.
남편과 달리 자연의 풍광을 둘러보는 종류의 여행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나이지만 중국의 장가계는 예상과 달리 나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수많은 계곡과 기기묘묘한 암봉들 사이 가득한 운무로 신비로운 분위기를 유감없이 연출하고 있었던 천문산. 보트를 타고 건널 수 있는, 마치 강이나 호수 같은 크기의 물길과 억겁의 세월이 쌓아 올린 진기한 형태의 석주와 석순들을 가득 품고 있는 황룡 동굴 등.
그것들은 얼마나 거대하고 웅장하던지.
아웅다웅하는 인간의 삶에는 아랑곳없이 스스로 생겨나고 변화하고 마침내 자태를 드러내어 포효하는 듯한 자연의 모습에 나는 일순 야릇한 두려움 같은 것을 느꼈다.
땅덩어리도 크고 인구도 많고 모든 게 크고 거대한 나라 중국임을 새삼 떠올렸다.
주변에 가득한 그 많고 거대한 것들 속에서 살아가는 중국인들은 예전부터 자연스레 자기네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에게, 주변의 작은 나라들에 늘 갑 노릇, 상전 노릇을 해왔던 걸까?
최근 빠른 속도로 부상하는 중국의 과학 기술 분야의 성취를 설명할 때도 누군가는 말한다. 과학 기술 인재의 풀 자체가 크다고.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거기서 고르고 고른 인재가 오죽할까 하고.
이게 규모의 경제인가? 그럼 우리는? 나는 운무에 쌓인 봉우리들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먹는 거 자는 거, 이동하는 거 고민하지 않는 패키지여행이었고 현지 가이드의 세세한 설명을 들으며 이곳저곳을 탐험하듯 둘러보았다.
가이드는 조선족 3세대 청년이었다. 우리말과 중국말을 무척 자유롭게 구사했다. 인상도 호감형의 얼굴인 데다가 늘 하는 일이고 직업이라 그런지 무척 익숙하게, 무엇보다 효율적으로 여행 스케줄을 운용했다.
마지막 날 공항으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가이드는 그전 여행 일정 중에서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색다른 질문 하나를 시작으로 갑자기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중국과 한국이 축구 경기를 하면 자신은 어느 편을 응원할 것 같냐고.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래도 뿌리가 우리 민족이니 한국을 응원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답은 내 예상과 달리 ‘중국’이었다. 이어서 한국과 다른 나라(중국이 아닌)가 경기하면 당연히 한국을 응원할 거라고도 했다. 나는 그의 질문과 응답에 담긴 메시지를 헤아리느라 잠시 생각에 잠겼다.
태어나서 자라고 교육받은 곳이 중국이고 당연히 자신의 국적이 중국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는 듯했다. 중국인이라는 그의 정체성은 확고해 보였다.
그러나 마음 저 밑바닥에 남아있는 부모의 나라, 그게 뿌리라면 그 뿌리에 대한 막연하지만 본능적인 애정 같은 게 있는 것 같다고,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막연하다는 그의 말에 문득 나는 밧줄에 매달린 채 두 발이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땅에 닿지도 못하고 줄에 단단히 매어있지도 못한 어떤 사람의 모습을 떠올렸다.
부모 세대와 자신의 세대까지는 조선족 자치구 내 학교에서 한국어(조선말)를 가르쳤는데 시진핑 집권 이후 소수민족 관리 차원에서 그 민족의 언어교육을 금지하고 모두 중국어만 가르친다고 했다.
언어가 사라진다면? 갑자기 나의 불안 섞인 의문에 그는 간단하게 답했다.
‘당연히 우리 민족이 사라지는 거지요.’라고. 그리고 그 사실이 슬프다고.
통치, 힘, 지배, 따위의 단어들이 떠올랐다. 그런 것들만이 중요한 세계에는 강자와 약자, 다수와 소수만이 존재한다는 생각도.
소수, 소수민족, 힘없음, 든든한 배경도 없음, 같은 편도 없음.
그들이 사는 세계였다.
슬프다고 말했지만 그 감정조차 거세된 듯 고저 없이 이어지는 그의 말을 듣는 동안 나에게는 다시 한번 공중에 매달린 채 버둥거리는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88 올림픽 이후 한국의 위상이 달라지면서 그에게 조국, 모국의 모습이 든든하게 자리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뜻밖의 이야기였다. 또한 한국에 대해 개인적으로 너무나 감사한 일이 한 가지 있다고도 했다. 자신의 어머니가 난소암 진단을 받았는데 한국 내 여행사 소속 직원이라는 자신의 직업 덕분에 그는 한국의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었고 자신의 어머니가 한국 의료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고 지금 건강하게 생존해 계신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중국에서라면 엄두도 못 낼 수준높은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는.
그러면서 덧붙이는 그의 다음 말에 나는 다소 당황했다.
자신도 안다고. 한국 사람들이, 자국의 의료보험 제도를 외국인들 특히 중국인, 조선족들이 얌체처럼 이용한다는, 밥상 차려놓았는데 숟가락만 얻으려는 파렴치들이 많다고 욕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그럼에도 모국이라 부를 수 있는 한국이 있어서, 어머니를 살릴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고.
아, 나 역시 그런 비난에 목소리를 보탠 적이 있던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던가?
내 속에서 내 생각과 감정은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허둥댔다.
부모의 나라, 굴곡과 주름이 많았던 우리의 역사.
그 틈바구니에서 오래전 머나먼 이국땅에 이주해 그곳에 정착해 살았던 그들은 무슨 잘못을 했던가?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어서, 나라가 힘이 없어서, 가난해서 운명처럼 주저앉은 그들의 부모, 그 자녀들에게 무슨 죄가 있던가?
내가 낸 의료보험이 저 젊은이의 어머니를 구하고 저이가 한국을 자랑스럽게, 고맙게 생각하게 만들었구나.
갑자기 가슴이 느꺼워졌다.
한국이라는 존재가 저이에게 힘이 되는구나. 그들과 우리가 그렇게 연결되어 있구나.
중국 안에서 소수민족이란 이름표를 등에 붙이고 살지만 그래도 그들 뒤에 우리가 있었구나.
조선족, 중국인이란 단어와 함께 무심코 듣고 말해지던 부정적인 이야기들.
그러나 무심코 듣고 말해버리기엔 미안해지고 가슴 따뜻해지는 누군가의 이야기도 있구나.
그제서야 내 생각과 감정은 더 이상 허둥대지 않고 제자리를 찾은 듯 평화로워졌다.
일하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기억이 있느냐는
한 여행객의 질문에 그는 황산을 오르던 중 심장 쇼크로 결국 명을 달리한 할아버지를 기억해 냈다. 그 이후 오랫동안 일을 못 할 정도로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여행객 중에 진상 고객을 만나면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는 며칠만 참고 응대하면 된다고, 그 정도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라고 시원스레 답했다. 나름 단단한 내공을 자랑하는 씩씩한 젊은이였다.
거대하고 진기한 자태를 뽐내는 자연의 비경도 아름다웠지만 마음 따뜻하고 건강한 젊은이와의 만남도 반가웠던 시간이었다.
그의 꿈은 돈을 많이 벌어서 파이어족(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 경제적 자립을 이루어 조기 은퇴하는 것)이 되는 거다.
꿈을 이야기하며 그는 유쾌하게 웃었다. 요즘의 평범한 젊은이다.
그가 정말 돈도 많이 벌고 어디서든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