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1

시나리오

by 김영


나의 일은 학생들을 빈틈없는 시간과 공간의 분할로 통제하는 일이다. 본 수업, 보강수업, 주말 특강, 방학특강, 선행학습, 상담, 각종 테스트를 통해 그들의 시간을 통제하고, 수준별 반편성을 통해 공간을 통제한다. 간단히 말해 학생들을 수치화해 분류하고 관리하는 일이다. 좋게 말해 관리이고, 나쁘게 말하면 감시와 통제이다. 여기에 학생들은 좋은 성적을 위해 자발적으로 순종한다. 감시와 통제를 자신을 위한 일로 생각한다. 일찍이 '미셀 푸코'는 '감시와 처벌'을 통해 권력이 형성되고, 공장, 학교, 병원, 병영이 감옥을 닮았다고 했다. 이제 우리는 사회의 감시도 모자라 '양심'이라는 내재화된 감시와 억압을 스스로 가슴속에 대량 침투시켜놓았다. 가슴속의 첩자들은 길거리에 돈이 떨어져 있어도 선뜻 줍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만들고, 줍고 나서도 누군가에게 이실직고(以實直告) 해야 할거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든다. 이 정도면 가정교육, 학교교육, 사회적 윤리는 그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스스로를 감시하게 되었으니 손 안 대고 코푸는 격이다.


한때, 국가안보, 정치불안, 사회 불안정 해소를 위해 도시를 외부로부터 차단한 적이 있다. 군인들의 순찰, 휴교령, 통행금지, 집회 금지 등 정권유지에 도움이 된다면 그들은 어떤 구접스러운 행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제 그들은, 늘어선 줄 속에서, 모여든 사람들 속에서, 대학교내에서, 몰래 적들의 말과 행동을 감시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후각으로 울타리 안의 사냥감을 잡는 가학적 즐거움을 도시 곳곳에서 즐긴다. 울타리 안에 갇힌 사냥감들은 헌법에 보장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면 처벌을 받는다. 존재하는 권리는 행사함으로 사라지고 가혹한 처벌로 다가온다.


'나는 생각함으로 존재한다'는 주체적 인간도, '나는 존재함으로 생각한다'는 실존적 인간도, 감시와 통제 아래에서는 스스로를 통제하는 신(新)인간이 된다. 감시와 통제의 이중의 쌍은 바깥쪽에서 뼈대를 이루고 그 사이를 내재화된 시선이 빈틈없이 좌우를 연결하여 우아한 나선형의 이중구조를 우리 몸에 심어놓았다. 거기에다 우리는 감시와 통제가 용이하게끔 주소, 수많은 사진 , 친구 목록, 종교, 정치적 견해, 심지어는 현재하고 있는 활동 정보를 자발적으로 그들에게 제공한다. 이제 그들은 세상을 위해 꿈에 그리던 일을 완성한다. 순종적 신체의 개인을 아무런 일탈 없는 평화로운 삶으로 이끌고, 각자의 내재된 정보를 통해 일어날지도 모르는 범죄를 예측해서 단죄하는 것이다.


이런 세상을 만드는 데 성실히 일조한 인간이 '나'다. 학생들이 이런 세상에 빨리 적응하도록 노력하면서 보람을 느낀 인간이다. 그런 반면에 항상 세상을 삐딱하게, 못마땅하게 보는 인간이 Q이다. 그는 시스템에 결코 길들여지지 않는 돌연변이다. 세상이 거대한 세트장임을 알면 두려움을 감수하고 세트장을 빠져나오거나 저항하는 인간이다. 탈주와 저항의 선봉장이다. 그는 학원을 옮기고 나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이다. 그는 학생운동이라는, 하나의 상징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그와 나는 책꽂이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앉았다. 간혹 그의 눈과 마주치곤 했다. 민망한 순간이지만 그의 눈빛은 동요가 없는 선한 눈빛이었다. 간혹 창가에서 밖을 내다보는 그의 뒷모습을 보곤 했다.


그는 대학시절 총학생회 간부를 하였다. 자연스레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일찍 눈을 떴다. 자본주의의 횡포뿐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현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10여 년 동안에 자행된 제주 4.3 사건과 5.18 민주화운동을 말할 때는 깊은 분노와 슬픔을 보이곤 했었다. 그 어린, 맑은 영혼들이 부서져 갔지만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게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세상의 잔혹함과 뻔뻔함을 증오했다. 그리고 그것은 보태거나 뺄 수 없는 그의 진심이었다. 그런 사람이다.


그때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아는 그는 대부분은 사적인 만남을 통한 겉모습이다. 마음만 먹으면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줄 수도 있다. 외양적인 모습에서 그를 알기 위한 실마리를 더 찾고 싶다면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소한 행동이나 자신도 모르며 지나가는 찰나적 표정을 참고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인 체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등장인물

Q(38세)

J(39세)

포장마차 주인( 40대 초반)

외국인 근로자 1,2,3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아저씨 1,2 ( 50대 초반)


S#1. 도시(밤/외부)


부감으로 보이는 밤 도시의 먼 풍경. 빛이 빠져나간 거리에 봉제선 같은 가로등이 켜져 있고, 가로등 불빛에 흰 털실 같은 가느다란 눈이 바람에 흩날리며 반짝인다. 자동차 불빛은 꼬리를 물고 이어달리기를 하고, 간혹 검은 천의 한가운데를 허연 가윗날로 가르듯이 119 자동차는 굉음을 내고 지나간다. 그 옆으로는 검은색 각설탕 같은 건물들이 올망졸망 늘어져 있다.


S#2. 포장마차(밤/외부)


학원에서 국어강사를 하는 Q가 눈 날리는 빌라촌을 걸어가고, 그의 뒤를 카메라가 따라간다. 걸어가는 양옆에는 4층이나 5층의 빌라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외부인 주차금지', '창고 大방출', '외국인 근로자 및 고시생 월세 환영'등의 현수막이 보인다. 빌라 앞에는 자전거 거치대와 쓰레기로 넘친 재활용 분리수거함이 있다. 자전거 거치대에는 자전거와 버려진 소파가 포개져 있고, 타이어가 빠져 뼈대만 남은 자전거는 쓰러져 있고, 일반쓰레기와 캔과 병, 플라스틱과 비닐은 분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채 쌓여있다. 깨진 맥주병에서 흘러나온 맥주와 쓰레기통에서 새어 나온 정체모를 액체, 그리고 악취가 날 거 같은 오물들이 눈으로 덥여 작은 흰 언덕처럼 보인다. 길고양이들은 눈을 헤집어 이곳의 정체를 다시 확인시키고 있다. 부는 바람에 눈은 어지럽게 춤을 추고, 바람을 품은 비닐봉지가 이면도로를 가로질러 날아간다. Q는 눈이 덮인 쓸다만 낙엽을 밟지 않으려는 듯, 아니면 땅의 촉감을 샅샅이 톺아 나가면서 살피는 듯 걷고 있다. 길모퉁이 실내포장마차가 있다. Q는 쓰러진 간판을 보며 바람을 견디고 있는 비닐 문을 밀치며 들어간다.


S#3. 포장마차(밤/내부)


카메라가 Q의 시선을 따라간다. 그리 크지 않은 포장 마차이다. 좀 낡고 오래된 듯 보이지만 서민적이면서 편안해 보인다. 들어서자 낯설게 느껴지는 언어가 들린다. 문가에는 동남아시아인 세 명이 보이고, 옆 테이블에는 아저씨들이 시끄럽게 술을 마시고 있다가 문을 힐끔 본다. 그 옆 테이블에는 J가 들어오는 Q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Q는 미소로 답한다. Q가 자리에 앉자 포장마차 주인은 반가워하며 다가온다. 라디오에서는 익숙한 팝송이 흘러나온다.


라디오 : Starry, starry night

별이 빛나는 밤에

City of stars

별들의 도시여

Are you shining just for me?

당신은 나를 위해서 빛나고 있나요?

couldn't look you in the eye

난 너를 볼 수 조차 없었어

you float like a feather in a beautiful world

넌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깃털처럼 떠다니지

You're just like an angel

너는 천사와도 같아

you're so fucking special

넌 존나게 특별해

but i'm a creep

하지만 난 병신이야

i don't belong here

난 여기에 어울리지 않아

And so it is

그래요

With eyes that watch the world and can't forget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눈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Like the strangers that you've met

당신이 만났던 이방인들

Just like you said it would be

당신이 그럴 거라고 말했던 처럼

We'll both forget the breeze

우리 모두 그 순간을 잊어버릴 테죠

but I can't take my eyes...

하지만 당신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어요

Til I find somebody new

다른 누군가를 만나기 전까지 말이에요


포장마차 주인: (반가운 목소리로) 오늘은 몇 분 선생님이 오시나요?

J: (미소 지으며) 오늘은 저희 둘만이에요. 꼼장어 하나 주시고, (잠시 벽에 붙은 메뉴판을 쳐다보다가) 사장님이 알아서 탕하나 주세요. 그리고, 소주 먼저 주시고요.


서로 익숙해하는 모습으로 보아 단골로 보인다. 주인은 빠르게 소주와 잔과 밑반찬을 가지고 온다. J와 Q는 서로에게 잔을 채워주고 건배를 한다.


Q: (미소 지으며) 일찍 왔어?

J: 아냐, 나도 방금 전에 왔어. (웃음 띠며) 오는데 눈 맞고 걸으니까 좋더라.

Q: 결혼을 하지 않아서 그런지 아직은 낭만이 남아있군. 나는 눈 오면 오나보다 해. 별 감흥은 없고, 다음날 차를 가지고 갈건가 말건가 그런 생각밖에 없는데...

J: (수줍게, 외면하고) 비가 오던지 눈이 오던지 하늘에서 뭔가 오면 설레거나 가라앉곤 하더라고.

Q: 근래에는 연애를 하고 있어 더 그러겠지. 윤희 선생도 낯빛이 좋아 보이던데.

J: (눈가에 웃음이 가득하여)어, 만나기를 잘한 거 같아. 같은 일을 하다 보니 시간대도 맞고, 그냥 둘이서 할 것들이 많아서 좋아.


S#4. 포장마차(늦은 밤/내부)


시간 경과. 동남아시아인들은 보이지 않고, 그 자리에 젊은 남녀가 붙어 앉아있다. 아저씨들은 많이 취해 있다. 둘의 탁자에는 빈 소주병 3병과 바닥을 보이는 소주병이 보인다. 둘의 대화는 잠시 멈추고, 불편한 침묵이 흐른다. 서로 눈길을 피하고 있다. Q는 소주잔 주둥이를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있고, J는 할 일없이 담배를 피운다. 재떨이에는 짓눌린 담배꽁초가 수북하다. CLOSE UP.


J: (조금 굳은) 너만은 예외야!

Q: (비웃음 띤 채, J를 보며) 나만이 예외라고... 그런 말에 내가 고마운 줄 알아? 너는 운동하는 사람들을 모욕했어.

J: (약간 당황해하며) 너는 아니라고 하는 데 그게 어째서 모욕이야?

Q: (맘에 안 드는, 약간은 꾸짖는) 너는 운동을 이해하는 듯하면서도 은근히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있어. 존경이든 경멸이든 하나만 선택해.

J: (억울하다는 눈빛)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존경이든 경멸이든 하나만 선택하라니. (감정을 애써 숨긴 덤덤한 표정으로) 물론 젊은 시절 앞장서 희생한 부분은 존경하지. 단지, 나는, 현시점에 그들의 문제점과 위선을 말하는 거야. 그들이 처음과는 바뀌어도 너무 바뀌었다는 거야... (눈 피하지 않으며) 젊은 시절의 행동으로 평생을 우려먹는 게 한심하다는 거야. 너도 간혹 혁명을 얘기했지만 혁명 이후에 대해서는 말을 안 하잖아. 그건 혁명에 성공해도 그다음은 생각한 적이 없다는 말 아닌가? 그 말은 달리 말해 혁명의 성공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말 아닌가? 말은 혁명을 얘기하지만.


Q의 시점 숏. 맞은 편의 J와 뒤편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중년의 아저씨가 겹쳐서 보인다. 포장마차의 문이 덜컹거리며 흔들릴 때마다 비집고 들어온 차가운 바람은 사람들의 전신을 스치고 지나가고, 허공의 가느다란 담배연기는 심하게 흔들리더니 이내 흩어진다.


Q: (완전히 굳은 얼굴에, 소리도 안 나오고)

J: ( 심하다 싶은지 Q의 표정을 살핀다. 오래 망설이다) 아니, 너를 두고 하는 말은 아냐! 아까도 말했지만.

Q: (언성이 높은) 도대체, 뭐가, 너는 아니라는 거야? 그러면 내가 감사해야 하니? 네가 운동에 대해서 뭐를 아는데? 그까짓 데모에서 한 두 번 돌 던졌다고 운동했다고 하는데...(잠시 멈칫하다가) 모르면 가만히 있던지, 아니면 공부를 하던지...

J: (속엣말) 그는 어째서 나의 실존을 거부했는가? 인간의 나약함에 관대하고, 동료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해 마땅한 이유를 찾아내던 그였는데 말이다.

J: (이것 봐라, 하는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감정을 가라앉히고 낮은 목소리로) 나의 실존을 거부하는 거야? 나는 네가 자주 말하는 혁명을 그들이 설령 성공을 한다고 해도 그들이 혁명의 명분으로 내세운 약속은 지켜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의도하든 의도 안 하든, 그들은 혁명의 성과물을 지들 배 채우는데 쓰고 점차 권력에 취해 타락의 길을 갈 거라고 봐.

Q: (사이) 그러면 혁명은 애당초 시도해서는 안된다는 말이야? 수많은 혁명이 역사에 있었고 너 말마따나 혁명의 결과로 권력을 잡은 엘리트들의 타락이 있었지만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권력에 착종하는 무리들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무지와 무기력도 한몫했다고 생각해.

J :(건성건성 딴청 피듯) 모든 혁명의 성과물은 돼지 같은 엘리트들에게 가고, 그들은 또다시 권력에 취해 당초의 약속을 저버리는 혁명을 해야 되는 건가?

Q: (확신에 찬, J를 뚫어지게 보며) 혁명이 신뢰를 잃었지만 위대한 새 출발은 있어야 해. 한번 생각해봐. 1789년 프랑스 대혁명과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비록 우여곡절이 있었어도 결과적으로 사회에 영향을 끼친 것은 부정할 수 없잖아. 혁명은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하지만 새로움이 희박해져 지루함에 질식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해.

J: (Q 쪽을 힐끗 돌아보고 나서 작은 소리로) 만약에 혁명이 계획대로 성공했다고 가정해 볼게. 혁명만이 살길이라고 평생을 투쟁을 하는 사람들의 숭고함은 혁명의 성공으로 보상을 받겠지. 그렇지만 보통 사람이 일생동안 투쟁을 하면서 인간으로 느껴야 하는 감각적인 기쁨이 혁명의 구호 속에 묻혀버린 것은 어떻게 생각해? 그들한테 위대한 혁명을 위해서 한 때밖에 느낄 수 있는 인간적인 기쁨을 희생하라는 건 가혹한 것이 아닌가?

Q: (답답한, 담담히) 고장 난 수도꼭지는 아무리 잠그려고 해도 졸졸 흐르는 물방울을 멈추게 할 수 없고, 바늘귀에서 일단 벗어난 실은 아무리 눈을 부릅떠도 소용없어. 수도꼭지는 교체를 해야 하고, 실은 다시 꿰어야 해. 혁명밖에 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는 말이야. 혁명은 혼자의 힘으로는 할 수 없어. 슬픈 일이지만 다소의 희생은 불가피해. 그게 혁명이야.

J: (말없이 Q를 쳐다본다)

Q: ('너도 그 정도는 알고 있지 않아?'라는 표정으로 J를 슬쩍 쳐다본다)

Q: (망설이다)그리고, 우리가 정치성향이 같다고 너는 생각하겠지만 나의 생각은 전혀 아니라고 봐. 그건 우리나라의 정치 진영상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야. 그리고(언성을 높이며) '너만은 예외야!'라는 말은 어폐가 있다고 생각해. 너의 진심은 그런 거 같지 않아. 운동을 하는 집단속에 예외를 두는 것처럼 말하지만 이면에는 '너도 그쪽에 포함돼!'라고 들려. 그렇게 싸잡아 비아냥 거리는 거 같아서 화가 나기도 하고, 저들이 잘 쓰는 이간질에 놀아나는 네가 안타까워. (머뭇거리며) 그리고, 너의 말이 나의 내적인 균형을 깨뜨리고, 나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있어.

J: (긴장한 얼굴로, 소리친다) 내가 너의 정체성을 뭘 위협했는데...?

Q: (이것 봐라, 하는 느낌) 너는 정체성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J: (건성으로) 뭔데? (비아냥거리며) 똑똑한 네가 말해?

Q: (J를 뚫어지게 보며) 사람들은 정체성을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변하지 않는 존재의 본질, 그만의 인장 같은 거라 생각하는데... (눈치 보며, 단호하게) 나는 아니라고 봐. 정체성은 타인과의 관계에다, 자신의 이름, 자신의 얼굴 등과 유기적인 관계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 자아의 총체성인 정체성이 역설적이게도 타인과의 관계에 많이 좌우돼. 타인의 말 한마디에 자긍심을 갖기도 하고, 절망감을 갖기도 하잖아.

J: (수긍이 가는 듯 Q를 바라본다)(한쪽에 둔 물 잔을 들어 마신다)

Q: (J를 바라보며)그리고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다양한 가면을 쓰고 있어. 직장에서, 가정에서, 동창모임에서, 아니면 다른 사적 모임에서 죄다 다른 모습으로 생활하고 있어. 그래서 가끔은 나인 척하는 게 헷갈릴 때도 있어.(사이) 만나기 싫은 사람이 있다면 왜 만나기 싫은 것일까? 그가 나의 과거의 정체성을 상대방이 되살리기 때문이야. 좋고 싫은 이유들은 그들을 통해 발견되는 자신의 정체성에 우리의 감정이 투영된 것이야. 어쨌든 우리의 정체성은 타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닌 거 같아.

J: (말하는 Q를 놓치지 않고 보고)

Q: (고집스러운) 이름도 타인과의 관계 못지않게 정체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어.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익명을 사용하거나 위장이나 마스크를 쓰고 있다고 가정해봐. 익명을 사용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비록 동일인물이더라도 다른 이름을 사용하면 다른 정체성을 가지게 돼. 그래서, 어느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다르게 부른다면 자신의 이름으로 불러주기를 바라는 것인 줄 몰라.

J: (담배만 피우고)

Q: (아랑곳 않고) 사람뿐 아니라 어떤 대상을 그 고유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그 대상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인정한다는 의미니까.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자신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사실에 불쾌해해.


테이블 위의 J의 핸드폰이 울리고, J는 Q에게 미안하다는 듯 겸연쩍은 눈길을 보내며 전화를 받는다. J의 목소리만 들린다. 약간 귀찮다는 목소리이다.


J :... 여보세요. (고개를 돌리며)... 예. 친구 만나고 있어요....(흩트러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곧 들어갈 거예요. 먼저 주무세요.... 알겠다니깐요.... 네.

J: (핸드폰을 닫으며) 미안해. 미리 집에다 늦게 들어간다고 전화를 했어야 했는데...

Q: (궁금한 듯) 집에 별일 있는 거 아니지?

J: (얼버무리는) 응. 집에 들어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연락도 없어 걱정돼서 전화 온 거야. 부모들이 다 그렇잖아. 근데 하던 얘기나 계속해.

Q: (망설이다가) 그냥, 뭐... 이름이 생각보다 어떤 사람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수단이라는 거야. 근데 이름보다 더 위험한 건 위장이나 가면을 쓰는 거야. 위장을 하거나 가면을 쓰고 거침없이 끔찍한 일들을 벌이는 경우도 있어. 그럴 때 가면은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가 된 것이지. 가면의 배후로 수치감과 자의식에서 해방된 인간은 숨어버리고, 본능에 충실한 괴물이 새로 탄생한 거지.

J:(이야기하는 그를 말없이 바라본다.)어....(오래 망설이다가) 낯설지만 수긍이 가는 이야기인데... 오늘은 가르치는 듯이 들리네.(잠시 생각하며) 근데 나도 정체성이라는 말이 예전처럼 들리지가 않아. 그 말뿐만이 아니라 전통, 보편성, 예의범절 등 절대적인 가치와 규율처럼 여기던 것들을 들으면 관심은커녕 가슴이 답답해져. 그래서 그런 말들을 피하게 돼. 이념의 과몰입이나 천국으로 이끌겠다는 종교인의 말이나 대중이 보고 싶고, 믿고 싶은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정치인이나 가족에 대한 사랑, 사랑의 강박, 그리고 애국심 같은 것처럼 '그래야만 한다'라는 논리로 상대편을 선동하고 억압하는 것들, 획일화된 관념이나 다양성을 부정하는 모든 것들이 징그럽게 싫더라고. 이런 것들은 인간에게 눈물을 동반한 감정을 유발하여 사람들을 행진의 대열에 서게끔 해.

Q: (말꼬투리 잡고) 행진에 서는 게 나쁜 건가? 하나가 된다는 것도 의미 있다고 보는데...

J: (입이 근질근질하듯, 과거를 생각하는 듯) 나도 한때는 그랬었는데... 지금은 모여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보면 섬뜩해. 특히, 그 사람들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면서 애국심을 강조할 땐 공포심마저 들어. 개인보다 국가를 앞세우는 폭력과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둘레 살피며) 아무튼 지금은 그런 것들이 다 싫어. 그리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념도 문제가 있다고 봐.

Q: (빼꼼히 보며) 신념은 왜?

J: 신념도 이미지일 뿐 아닌가? 그냥 이미지. 그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나타내는 의지의 소산에 불과해. 나름 합리적이고, 실재한다고 믿는, 지각(知覺)이나 표상(表象)을 만드는 것도 그들의 의지 아냐? 냉정하게 말하면, 그들이 그냥 그렇게 남들한테 비치고 싶다는 이미지일 뿐이라고 생각해. 사람들이 기억하는 우리도 결코 우리 자신이 아니라 그들이 만들어낸 이미지일 뿐인데. 그리고, 네가 철석같이 믿고 따르는 신념도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사회적 관념에 따라 속절없이 변하는 거라고 생각해.


Q는 새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깊게 들이마시고 담뱃불이 빨갛게 타오른다. 그는 연기를 내뱉고 허공에 흩어지는 연기를 바라본다. J도 Q에게 시선을 뗀 체 연기를 따라 바라본다. Q의 눈꺼풀이 흔들린다. 잠시 후 J의 핸드폰에서 "카톡" 문자 알림 소리가 들린다. 휴대폰을 들어서 보자 휴대폰 불빛이 J의 얼굴에 비춘다. 인서트. 휴대폰 화면에 뜬 문자 메시지. CLOSE UP.


[Web 발신] 윤희 선생.

'오늘 집에 들를 거야? 나는 단과반 회식이 있어서 늦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그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흐른다.


S#5. 포장마차(깊은 밤/외부)


시간 경과. 포장마차를 나오는 두 사람. J는 영수증을 구겨서 길가에 버린다. 포장마차 앞 이면도로는 어수선하다. Q는 멀리서 오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며 "택시!"라고 소리친다. 둘은 손을 흔들고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간다. J의 뒤를 카메라가 따라간다.


S#6. 그녀 집(깊은 밤/내외부)


그녀 집은 원룸이다. 원룸이라는 말이 제격이다. 현관문 앞에는 종량제 봉투와 각종 전단지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J는 철제 현관문을 열고 구두를 벗을 자리를 찾아 발을 타일 바닥에 붙인 뒤 더듬더듬 움직인다. 그리곤 손을 뻗어 벽을 더듬거리며 스위치를 켠다. 갑작스러운 불빛에 눈이 부시다. 눈부신 빛 속으로 어둠 속에 숨어버렸던 방이 나타난다. 눈이 빛에 적응하자 방안이 한눈에 들어온다. 현관문 맞은편에는 화장실이 있고 그 옆은 싱크대가 있다. 싱크대 옆쪽으로, 벽면에는 침대와 옷장이 있다. 현관문 옆쪽으로는 커튼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창문인 거 같다. 침대에는 두세 권의 책과 옷가지가 널려있고, 바닥에는 곰팡이가 슨 귤껍질이 있다.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자 유리창에 미끄러진 바람이 휘파람 소리를 내며 화난 듯 들어온다. 방 안과 몰래 내통한 바람은 J의 머릿결을 한쪽으로 쓸어주고 눈두덩과 콧날을 스치고 간다. 창문은 반쯤 열리는 들창이다. 맞은편에는 차고 으스스한 분위기의 빌라 외벽이 단호하게 버티고 있다. 들창이 반만 열리는 이유가 있었다. 손만 뻗으면 차고 습한 외벽에 닿을 수도 있다. 그 사이를 황소바람이 불면서 지나간다. 부감. J는 침대의 옷가지와 책을 한쪽으로 미루어놓고 옆으로 눕는다.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F.O.


꾸르륵 신음소리를 내는 배관파이프 소리는 계속되다가 서서히 잦아든다. 그리고 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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