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그녀의 내밀한 비망록

by 김영


거의 모든 사내들은 보수적이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제한된 상상력은 유치하기 짝이 없다. 아이들보다 그들을 다루기 쉽다. 그냥 치켜세워주고 거짓말로 떠받쳐 주면 된다.


다가가면 다가가는 만큼 멀어지고, 멀어지면 멀어지는 만큼 다가온다.

그럼에도, 그러는 동안에는 관계는 유지된다.


나와 이 세계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사내들은 상대방의 지나간 애인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지만 실은 진지하고 조금은 경멸적으로 이야기한다. 시도 때도 없이 끊임없이 내밀한 사항의 납품을 요구한다. 납품을 요구하는 표정에는 성적 호기심이 깔려 있다. 일방적인 요구가 미안했던지 그들도 지나간 여자들에 대해 스스로 이야기한다. 허영심이 깔려 있는 우쭐함이다. 더 나아가서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비밀을 몽땅 털어놓는 찌질이들도 있다. 그리고는 자신을 모조리 알아버린 여성을 증오한다. 어쩌란 말인가?


사랑의 조화는 이루어졌다. 그는 수줍어하지만 나는 얌전 떨 필요가 없는 취향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스쳐 지나가던 장소를 말하면서 조금은 더 일찍 만날 수도 있지 않았나에 대해서 안타까움의 탄식을 하고, 우연의 일치에 경탄한다. 그러면서 서로가 사랑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우리도 이런 사랑놀이를 하고 있다.


J는 사랑에 완전히 빠져드는 것에 두려움을 가진다. 미숙함인지 비겁한 건지...


그는 사랑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는 남자이다. 따뜻함 속의 냉담함이 있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 우쭐댄다. 허영심인지 동정심인지 아직은 모르겠다.


그와 싸웠다. 나를 위해서라면 아예 싸우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그를 위해서 싸웠다.


그는 내가 다른 여성과는 다르다고 한다. 여성스러움이 부족하다고 들린다. 그도 대다수의 남성이랑 다른 게 없는 건가?


사내들은 정력적인 남자라는 끊임없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우쭐하기를 좋아하고 침대에서의 허영이 여자보다 더하다.


그는 간혹 편지를 건넨다. 사랑한다는 편지를 읽는 건 언제라도 기분이 들뜨는 일이다. 누가 그런 낭만적인 일을 뿌리칠 수 있는가?


상대방의 생각을 겉으로만 이해한다. 나를 충분히 알기를 거절한 거 같다.


그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남들이 알아주기를 원한다. 항상 정의로운 쪽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이 착하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물론 동의는 하지만 스스로에 대해 환상을 가지는 것을 알기나 알까.


그는 말로만 여행을 가고 싶어 한다. 여행이라는 관념과 여행의 기억만을 좋아한다. 그에게 가장 확실한 쾌락은 경험하지 않은 기대의 쾌락이다.


그와 나 사이에는 어떤 거래도 없다.


나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는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나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나를 포용하려고 한다. 그건 자기기만이다. 이런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할 수 있는가?


옥신각신하는 것도 없다. 결론은 이미 정해진 거 같다.


왠지 모르게 슬퍼진다. 그 슬픔을 이성적으로 참아내려 한다.


그는 진실의 오류와 진실의 상대성을 알기나 아는 건가?


그들은 술, 담배를 좋아하고 아무 하고나 자는 여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아무 하고나'에 포함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고, '아무 하고나'에서 멀어지는 느낌이 있으면 신랄하게 나를 비판한다. 본능대로 사는 것이 나이 들어 손톱 물어뜯는 습관보다 낫다고 본다. 적어도 그들처럼 손톱 물어뜯으면서 다른 사람의 뒤통수를 쳐본 적은 없다.


사내들은 일단 성관계를 갖고 나면 말투부터 바뀌고,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하지 않는 이야기를 자진 고백한다. 그리고는 아무 때나 방문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방문할 권리를 여자는 인정한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영토를 확인해 주려는 듯 방안의 여기저기에 몸 냄새를 풍기고 다닌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 견디지 못하는 겁 많은 동물과도 같다.


사랑의 기억은 언제까지나 남아있다. 그가 떠나도, 죽어도, 하물며 배신했을지라도. 무슨 수로 그리움을 털겠는가?


사람들은 스스로 늙었다고 생각하기 전까지는 언제나 그를 기다리는 새로운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거리 길모퉁이만 돌면 어떤 근사한 사람과의 근사한 모험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있다.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는 아쉬움이다. 그들에게 기다림은 익숙함이다. 그러다 자신 몸의 노화의 깊이에 눈길이 닿으면 그제사 자기도 일정한 부피와 중량을 지닌 쓸모없는 유물에 지나지 않음에 탄식한다.


가까이서는 알 수 없는 것을 헤어진 이후 알게 되었다.


남녀가 만나서 반드시 그 사람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없다. 육체적 위무와 사랑은 엄연히 다르다. 육체적 위무는, 별 이렇다 할 감정을 느끼지 않더라도, 때마침 있는 이성이 누구일지라도, 상관없는 감정이다. 구부렁 구부렁 휘감겨 올라가는 넝쿨은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가 중요하지 않다. 다만 거기에 나무가 있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거기에 고상한 인간의 정신적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위선이자 허영이다. 동물에게 동물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라는 것이 말이 될 소리인가.


욕망을 이겨내라는 소리가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지. 관능은 정상적이고 건강한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축복이다. 욕망이 있을 때는 욕망을 해소할 방법을 찾고, 그러고 나서 나의 일에 온 마음을 쏟고 사는 거지.


사랑은 사라지기 마련인가? '그들은 그 후에도 만남을 가지면서 노년을 함께 보내었다. 욕망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함께했다. 그렇게 모든 게 끝나버렸다.' 이런 꿈은 불가능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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