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않는 1
어떤 수 × 1 = 어떤 수
어떤 수 ÷ 1 = 어떤 수
1은 자연수가 시작되는 수이다. 어떤 수에 1을 곱하면 어떤 수가 되고, 어떤 수를 1로 나누어도 어떤 수가 된다. 증가하지도 않고 감소하지도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는 1은 담백하고 영구적으로 변하지 않는 신(神) 적인 특성이 있다. 이미지로 비유하면 초콜릿 케이크 같은 토양에 한눈팔지 않고 하늘을 향해 고집 세게 서있는 나무 같다. 꼿꼿이 허리를 세운 체 직립한 침엽수 말이다. 또는 '홀로'라는 말 때문에 외로움과 고독감이 느껴지기도 하다.
요즘은 점점 사람들의 목소리는 잊혀 가고 글자로 서로의 마음을 전한다. "카톡!"이라는 소리는 누군가가 나를 향해 '여기 있음'을 알리는 소리이다. 소리를 듣는 순간 미지의 상대방을 예측한다. 처한 상황에 따라 설렘, 반가움, 귀찮음, 무관심의 감정이 교차한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설렘과 반가움이 앞서겠지만 이별을 생각하고 있다면 귀찮음과 무관심으로 시큰둥하다. 호의감이든 적대감이든 나는 상대방을 확인하는데 약간의 시간 간격을 둔다. 쉽게 말해 뜸을 들인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의뭉스러운 놈인 거 같다. 그렇대도 할 수 없지. 그렇게 하는 이유를 굳이 말하면 이렇다. 상대방과 마주 보고 얘기할 때는 상대방이 나의 표정을 보고 있음을 인식하면서 말한다. 나도 상대방 말의 진실됨을 그의 눈빛, 표정, 몸짓으로 판단하게 된다. '카톡'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확인하면 상대방에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마음을 들키거나 상대방에게 마치 발가벗겨진 나의 모습을 보이는 거 같다. 한마디로 말하면 현재의 나를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반대로 상대방에게 전송과 동시에 떠있는, 지워지지 않은 1자를 보게 되면 어지간히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나의 애틋한 마음이 상대방의 문 앞에 가로막혀 그가 문을 열어주기를 바라고 서성대는 느낌이다. 그것도 아주 초조하게. 문 앞에 굳은 표정으로 완고히 서있는 1이라는 수문장은 요동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가 1이라는 숫자가 사라지면 안도의 한숨을 쉬고 그의 배려에 감사해한다. 그러고 나서는 '나를 어떻게 읽었을까?'에 대해 궁금해한다. 마음의 동요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읽고 답장이 없으면 이유를 추측하고 과대망상에 빠진다. 좋게 해석해서 마땅한 답변을 찾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불길하게도 그의 속내를 알고 있다. 나는 그에게 소중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물론, 억지로 달리 생각할 수는 있다. '많이 바쁜가?' '배터리가 없나?' '내가 잘못한 게 있나?' '마음이 변했나?' '나를 차단했나?' 아니면 '말하기 싫다는 건가?' 등 혼란스럽다. 어쨌든 버림받은 느낌이고 급기야는 그의 예의 없음에 분노한다. 시간이 지나서도 아예 읽지도 않으면 '왜 읽지도 않을까?' 하고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손에 일도 잡히지 않는다. 체한 거 같기도 하다. 긍정적으로 굳이 생각하면, 아직 읽지도 않았기에 내 생각이 봉인된 상태로 멈춰 있어, 관계가 회복할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 최악의 결과보다 불확실성이 낫다고 스스로 위로한다. 어쨌든, 읽고 답장이 없든, 아예 읽지도 않든, 모두 미묘한 기싸움이기도 하고, 고도의 심리전이고, 권력관계까지 내포되어 있다. 여기서 끝은 아니다. 또다시 갈림길에 서게 한다. 다시 보낼까, 말까에 대해서다. 보내기에는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다시 무반응이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있다. 이제 나는 '판옵티콘'의 감옥 안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보이기만 한 처지에 놓여 수치스럽기까지 하다. 문자를 보내고 나서는 발신자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그다음 몫은 수신자에게 있고, 그의 처분만을 기대해야 한다. 부당하다. 부당함은 내가 부여한 의미 외에 다른 의미가 더해져 전혀 생각지 못한 결과를 야기하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어떤 것의 이면을 보아 달라는 것도 아닌데도 문자를 보냈다는 원인제공으로 사후처리까지 책임져야 한다. 마치 공을 던지고 나서 순간순간 공이 어디쯤을 날고 있는지 매번 예측을 해야 하고, 어느 곳에 떨어졌는지 신경을 곤두서야 하고, 떨어진 결과도 그의 몫이다. 이제는 다른 사람의 의도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데 들어가는 에너지를 쓰는 게 싫지만 어쩔 수 없다.
이런 얘기를 하는 데는 이유가 있긴 하다. 내겐 사랑하는 연년생 조카가 둘 있다. 누나의 죽음 이후로 그들과 같이 산다. 자식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렇다고 치자. 언제부턴가 둘은 대화도 없고, 카톡에는 지워지지 않은 1이 꼿꼿하게 서있는 것을 알았다. 둘의 불화는 생각보다 깊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점점 멀어지는 걸 지켜보고만 있다. 몇 번의 설득은 유효기간이 지나 약효도 없고, 이제는 둘 사이의 틈을 메울 방법도 알지 못하고,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틈도 사라졌다. 그렇게 됐다. 각자 나름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어떤 시도도 곧바로 감정의 찌꺼기에 신호를 보내 잊혔던 분노를 차오르게 했다. 이제, 그들은 서로 감정의 차오름을 피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방법은 간단하다. 잠들어 있는 감정을 일깨우는 어떤 대화도 거부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어떤 일에도 무관심하는 것이다. 이 일은 우리 가정에서 벌어지는 가장 흔한 일이라 새삼 확인하는 것이 더 놀랍다. 행복한 가족은 밥 먹는 장면만 보아도 알 수 있지만 식사를 언제 같이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뭐 어차피 같이 모이면 어색하고 시선처리도 되지 않을 텐데.. 당분간 메아리가 울릴 일은 전혀 없다. 내 이럴 줄은 몰랐다.
사람만큼 어리석은 존재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뻔히 결과가 예측이 되고 기어코는 후회할 일을 저지르고 만다. 항상, 때가 되면, 좋은 기회가 오면, 그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라는 야무진 희망을 저버리지 못한다. 그러다 버릇처럼 회피의 장막 뒤에 숨어 있다가 이미 늦음을 알게 된다. 이미 때가 늦었음은 어느 날 갑작스러운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서다. 우리가 마음에만 품었던 진정한 인간관계의 회복은 죽음과 함께 아예 사라지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