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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 Sep 30. 2023

"그래, 너의 의도대로 된 거 축하해!"

<1화>


따지고 보면 나의 태생에 대해 아는 바는 별로 없다. 단지 태어나고 얼마 안 되어 인간의 손에 넘어간 것 말고는. 간혹 어렴풋하게 생각나는 게 있긴 하다. 아비와 짧은 기간 함께했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는 떠나갔다. 그새 바람이 난 건지, 두 아이를 낳고 보니 현실 자각이 된 건지, 아니면 묘생에 권태로움이 생긴 건지는 내 알 바도 아니고 관심도 없다. 다만, 어미가 상심한 건 미루어 짐작이 간다.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 맞다. 물론, 그 당시는 대부분의 시간을 무감각한 잠의 세계와 하나가 되었던 시절이라 기억이 채색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말다툼이 잦았던 건 사실이다. 잠에서 깨면 엄마의 품으로 달려들곤 했지만 언제부터인지 잠결에 듣는 불안한 소리에 주저하게 되었고, 목소리를 죽여가며 부모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들키고 나서 어른들의 대화에서 되돌려져 자기 방으로 쫓겨갈까 두려워하는 그런 상황과 비슷하다. 내 입장에서 얼마나 불편한 상황이었을지 여러분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달리 할 건 없다. 감긴 눈꺼풀 속에서 눈동자를 이리저리 꾸물거리고, 귀를 불안하게 쫑긋 거리고, 콧구멍을 벌렁대며 주변 상황을 상상해 보는 거 말고는. 그래봤자, 중간중간 끊기는 영사기를 보듯 연속적인 동작에서 각각의 동작을 분리해 낼 수밖에 없을 거라 당신들은 생각하겠지만 상황을 반복해 그리다 보면 연결이 될 때도 있다. 잠시 후, 좀이 쑤셔 꼼지락거리는 내 몸짓에 아비와 어미는 목소리를 죽이다가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고, 아비는 사냥을 나간답시고 집을 나선다. 나는 그제야 게슴츠레 눈을 뜬다. 바위틈 출입문으로 오렌지색 광선들이 집안을 길게 가로지르고, 어미는 무슨 생각이었던지 출입문을 배경으로 서 있었고, 검은 윤곽의 그림자는 허리가 꺾인 채 벽에 눌어붙어 있었다. 나는 야옹거리며 어미를 불렀고, 어미는 마지못해 등을 돌리며 나를 향해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이냐고 야옹거리자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앞 발을 방어적으로 추켜올리고 "아니야, 아무 일도 없단다. 더 자야지, 이리 오렴!"하고 불안하게 나를 껴안았다. 내가 무어라고 대꾸를 했을 텐데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얼굴에 두려움 같은 것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내면 어디엔가부터 마음이 이런저런 방향으로 한꺼번에 내닫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어미는 지금과는 다른 삶을, 어쩌면 자신의 것이 되었을지 모르는 더 나은 삶을 그리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지금 곰곰 생각해 보니 이 부분에서 좀 혼동이 있었던 것 같다. 아비와 헤어지고 난 뒤의 어느 날일 수도 있다.


어쨌든, 아비에게 어미는 한 번 더 돌아보고 싶은 여자가 아니었다. 책임지는 게 두렵다거나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어서 그랬거나, 어쨌든 그 후로 우리의 삶은 강물 속 나뭇가지처럼 물살에 휩쓸렸다고 보면 된다. 그 결과 정신머리 빠진 어미는 나와 형아를 단속도 하지 않고 집을 비우곤 했다. 먹을 걸 구하러 나갔든, 변심해 버린 남편을 수소문하러 나갔든, 상관하지 않는다. 뭐, 어미도 산후우울증에 더해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감당하지 못했을 테니. 남은 가족은 배신이라는 단어를 아비에게 배신을 당하고 경험했다. 여하튼 아비와 어미는 형아와 나의 한창 귀여울 때를 못 보고 떠나갔다. 인정머리 없게.


그런 그렇고, 이야기의 본줄기로 돌아가겠다. 지금의 집에 정착하기까지 몇 번의 과정을 거쳤다. 어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아직도 그렇게 믿고 싶다, 의도치 않게 자리를 비운 거라고.) 공원 주변을 서성이던 커다란 그림자가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거들먹거리는 인간이라는 족속이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건대, 내가 고양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듯이 그들도 인간인 것에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털 없는 원숭이 같은 인간의 등장으로 형아와 나는 불안했다. 먹을 거를 다투던 관계는 한순간 굳건한 우애로 뭉쳤다. 그랬었다고 생각한다. 잠시 눈치를 살피던 그는 "야옹야옹"하면서 우리를 방심케 했다. 그러다 미끈거리는 손을 바위틈으로 거침없이 집어넣었다. 순간 형아의 몸은 '휙'하고 공중부양했다. '야옹야옹'거리며 접근할 때부터 어째 좀 상하다 싶긴 했다. 여기서 한마디 안 하고 지나갈 수가 없는 게 있다. 도대체 인간들은 대화랍시고 '야옹'거리는 데 한번 생각해 봐라. 어떤 정신머리 없는 고양이가 그 말에 현혹당할지를. 그건 몇 개월동안 모국어를 배운 외국인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처럼 부자연스럽다. 아니, 그것보다는, 앵무새가 인간의 말을 따라 한다고 보면 된다. 아무튼, 손바닥에 얹혀 붕 뜬 형아는 지퍼가 달린 투명한 플라스틱 배낭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눈 깜짝할 새였다. 마치 들판에서 바람을 타던 독수리가 토끼를 낚아채서 날아오르는 듯했다. 이건 어미가 모험심이 강한 형아를 집 밖에서 입으로 물어다가 데리고 오는 거랑은 달랐다. 멀리서도 형아의 떨고 있는 모습과 그렁그렁한 눈가가 역력하다. 물론, 나도 공포에 질린 건 부인하지 않겠다. 거의 숨을 쉬지도 못한 채, 온몸의 털은 곤두섰고 가슴이 요동치는 소리는 귀에 까지 들렸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바위틈으로 뒷걸음질 치며 물러났다. 부드럽고 털이 수북한 앞발에서 날카로운 발톱을 끄집어낸 체. 그 순간, 나마저도 그러잡는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의 손아귀에 잡히는 순간, 공기는 차갑게 식어버리고 등줄기에는 서늘한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고는 하늘을 등진 체 배낭 속으로 던져졌다. 결국에는 형아와 같은 처지가 되었다. 배낭 속 형아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래도 의지할 피붙이가 있어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왈칵 올라왔다. 아무리 뭐라 해도 믿을 건 피붙이 밖에 없다. 형아와 나는 배낭 안을 살펴보았다. 뒤흔들리는 배낭 안에는 우리 냥이족과 멍멍이족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얇은 담요와 티슈도 있는 거로 보아 그는 전문가이자 상습범이다. 모든 것을 치밀하게 준비한 것이다. 어미가 없는 틈을 타서 빈집털이를 한 것이다. 그래도 마음속으로 소망했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형아와 생이별만큼은 막아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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