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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 Oct 02. 2023

나약해질 권리

<1화> 할머니 집사

PM 09: 30


분리가 되었던 하늘과 땅은 하나가 된 지 오래다. 무한의 어둠은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들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틈도 없다. 할머니 집사는 약을 먹는다. 어딘가 병색이 있는 것 같다. 약기운이 돌면 자기 부상열차가 철로 위에 사뿐히 내려앉듯 잠에 침잠 상태로 빠진다. 지루했던 하루를 견디었고 다시 무료한 하루를 맞아들여야 한다. 그녀에겐 모든 날이 공휴일이다.


AM 02 : 00


시크무레하고 들쩍지근한 땀냄새에는 고단한 치열함이 있고, 어둠을 향해 길게 내쉬는 날숨에는 불규칙적인 질식의 고통이 있다. 약을 먹은 지 다섯 시간도 안 돼서 밭은기침소리와 함께 눈을 뜬다. 눈을 뜨면 윙하는 이명이 그녀를 반긴다. 그나마 남편이 있을 때는 달그락대는 틀니 소리도, 숨 쉴 때마다 그르렁거리는 가래소리도, 두툼한 보청기에서 나오는 피리소리도 있긴 했다. 때론, 잡음도 그녀의 외로움을 달래준다. 이제는, 언제 어디에나 있던 남편은 언제 어디에나 없게 됐다. 지나 생각해 보면 조금 길게 느껴졌던 남편의 마지막도 싱겁게 끝났다. 서로 나누던 고독과 나약함은 오로지 그녀만의 몫이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다. 눈을 뜬 채 깊은 고독을 맛보다 다시 잠을 청한다. 운이 좋으면 이내 다시 잠에 들 수도 있다.


AM 07 : 00


머리를 쳐들고 귀를 기울인다. 발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안다. 뿐만 아니다. 자세는 어떤지, 걸음걸이와 보폭은 어떤지, 발의 각도와 종아리의 형태는 어떤지 연상이 된다. 할머니 집사는 일어설 때 한쪽 팔에 힘을 싣고 몸을 살짝 굴린 뒤 한 발에 체중을 싣고 '아이쿠'하고 한숨을 쉰다. 발소리에는 십일 자 보다는 한창 넓은 발의 각도에다 두 발의 길이가 다른 듯 절룩거림이 느껴진다. 덜 아픈 다리에 무게가 실린다. 한 번은 살며시 한 번은 무겁게. 걸을 때마다 불안하다. 왜 인간은 뒷다리로만 걸으려고 하는지 도통 이해가 안 간다. 뭐, 애써 이해하자면 그들의 선조가 먹고 싶은 걸 먹으려고, 갖고 싶은 것을 가지려고 앞발을 뻗다 보니 그게 손이 되었겠다 싶다. 욕망이 신체의 구조까지 바꾼 거다. 그렇게 두 발로 서게 된 것이 네 발로 균형을 잡고 있는 우리를 지배한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어쨌든, 그녀가 안타깝긴 하다. 젊었을 때는 병들고 아프다는 게 다른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하는 거라 생각했고, 노화는 마치 그들의 잘못인양 치부했던 그녀다. 그녀의 다가오는 모습은 어깨와 등이 굽힌 채 얼굴을 내밀고 눈초리는 아래서 위로 치켜뜬 모양이다. 눈은 얇은 막이라도 낀 듯 뿌옇다. 늙어버린 인간이란 걸 제외하고, 그 무엇으로도 유별날 것 없는 할머니다. 자리에 일어나 블라인드 줄을 당긴다. 안개가 걷히듯 천천히 올라가던 블라인드도 그녀가 만지면 꼬여버린다. 계속 잡아당겨보지만 블라인드는 사선으로 창을 가리고 아침햇살도 사선으로 들어온다. 먼지들은 햇빛사이를 날아다닌다.


PM 12 : 00


할머니 집사는 아파트 노인정에 간다. 그곳의 인간들은 죄다 자세가 구부정하고, 발을 질질 끌거나 갓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인 양 보행기를 밀고 다닌다. 늙음이 당연한 공간에서 식사를 한 후, 구질거리는 날씨가 아니라면 친구와 공원 벤치에 앉는다. 어떻게 보면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그 친구도 남편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녀들은 마음을 터놓고 일상을 나눈다. 노인이 되어서 서로 살피는 친구가 있다는 건 다행이자 삶의 선물이다. 노인이 되면 젊었을 때 대단하든 대단하지 않았든 모두 대단하지 않게 된다. 심지어 아무 존재도 아닌 투명인간이 되지만 친구와 있으면 더 이상 아무 존재가 아니게 된다. 간혹 홀로 벤치에 호젓이 앉아있을 때도 있다. 잠시 생각한다. 따사로운 햇살을 주는 태양과 아득하게 빛나는 별에 울적하지만 감사해한다.


이젠 무용한 공상과 쓸데없는 몽상에 젖지 않는다. 삶은 소망한다고 되지 않는 걸 알고 있다. 어디서부터 길을 잘못 들어섰는지 모르지만 삶은 그녀를 그렇게 대했다. 그것을 알기에 극히 사소한 것만을 소망한다. 살아가는 것이 누군가에게 짐이 되지 않기, 다소의 평온함, 덜 아프기,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음식등이다. 그렇지만 이 정도의 소망도 충족할 수 없다. 다시 마음을 고쳐 먹고 바란다. 공원에서, 들떠 시작하는 봄과 열정적이지만 재빨리 소진되는 여름과 색색의 비명을 지르며 불타는 듯한 가을과 세상의 흔적을 하얗게 덮어버리는 겨울, 그 촉감들을 샅샅이 톺아 살피듯 걷고 싶은 소망이다. 더 이상 걷기가 불편하면 비스듬히 떨어지는 한 줄기의 햇살이나 금빛으로 물드는 황혼녁을 느낄 수 있으면 된다. 그녀에게 인생은 아직 놀던 곳을 떠나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이는 오후의 공원 같다.


PM 03 : 00


따분한 TV를 멍하게 보다가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창가에 서서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멀찍이 떨어져 있는 건물을 바라보기도 한다. 창너머 아이들의 목소리가 행복하게 울려 퍼지고, 길모퉁이 젊은 여인의 블라우스는 살랑인다. 멀어져 가는 모습에 슬픔이 조여 온다. 세상사 어떤 아름다움도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사라지지만 그녀 기억 속에 아름다웠던 날을 붙들어 텅 비고 허무한 날 마음에 뿌려야 한다.


간혹, 웅얼웅얼 뱉는 목소리에는 물기가 없다. 몸도 수분이 빠져 쪼그라들고 흐늘흐늘 늘어져있다. 검버섯이 번진 손은 뼈와 힘줄만이 앙상하게 남아 기괴하게 크게 보이고, 노랗게 마디진 손마디는 노동의 고단함이 담겨있고, 메마른 나무껍질 같이 깊게 파인 손금은 세월의 우여곡절이 묻어있다. 텅 빈 눈은 흐릿한 외로움이 있고, 줄줄이 깊게 그어진 주름살은 지난한 삶의 흔적이 엿보이고, 초라하게 휘어진 등줄기는 허투루 살아오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억센 그녀의 손도 한때는 몽실몽실하고 우아했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는 많은 권리가 있다. 세상을 이해 못 할 권리, 삶에 허무할 권리, 꿈을 잃어버릴 권리, 세상일에 무관심할 권리, 나태에 빠질 권리, 마음이 공허할 권리, 만사가 귀찮을 권리, 누군가를 그리워할 권리, 마음이 나약할 권리, 까닭 없이 불안할 권리, 모든 것에 체념할 권리, 어떤 것에도 지루해할 권리, 지독히 우울할 권리, 무기력에 빠질 권리, 흥미를 잃어버릴 권리, 사소한 것을 걱정할 권리, 궁극적인 몰락을 기뻐할 권리, 까닭 모르게 고독할 권리, 지나간 세월에 억울할 권리, 할 말을 잃고 허탈할 권리가 있다.


그 권리 중에는 편견에 사로잡힐 권리도 있다. 할머니집사의 편견을 비웃는 건 아니다. 그녀에게 편견은 싫든 좋든 그녀와 세상의 두 세계를 이어준다. 실제의 세상과 일치한다면 편견은 공고해진다. 간극이 있어도 괜찮다. 세상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고 치부해 버리면 된다. 그녀만이 아니라 인간들은 오만가지 편견을 다들 가지고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편견 속에는 계급의식도 깔려있다. 성직자는 이해심이 많을 거라는 편견, 변호사는 논리적이라는 편견, 부모는 자애로울 거라는 편견, 의사는 돈이 많을 거라는 편견, 선생은 다정할 거라는 편견, 작가는 담배를 많이 필 거라는 편견, 강사는 말을 잘할 거라는 편견들이다. 맞는 부분도 있다는 거 안다.


할머니 집사는 '옛말에 그러더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나와 동거하면서는 '고양이는 영물이다'라는 또 하나의 거짓말을 믿고 나를 경계했었다. 물론, 처음에는 아예 관심도 보이지 않아 얼씬거리지도 못했다.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했지만 기술이 잘 먹혀들지 않았다. 다가가면 롤에서 테이프가 급작스럽게 뜯기듯이 쌩하니 지나치기 일쑤였고, 내가 보이지 않으면 궁금하던지 구석진 곳을 찾아다니며, 에 뭐랄까, 입원실 커튼봉의 고리들이 쇳소리를 내며 커튼이 홱 젖혀져 환자가 민망할 때랑 비슷하게 나를 찾아내곤 했다. 게다가 지나간 잘못을 들추어내는데 나로서는 별 재간이  없었다. 내 행동거지에 신경을 활시위처럼 긴장시킨 채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내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기색이 분명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지금은 뭐 어쩌다 다정한 말을 해주기도 하고, 한두 번은 살갑게 다가오는 나를 쓰다듬기까지 한다.


PM 05 : 00


설핏 잠이 들었다 겁먹은 상태로 깨어보면 어두워지고, 마음은 우울해진다. 어린 시절엔 자다 깨어 어둠 속에서 서럽게 운 적이 있다. 아니, 울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무엇 때문에 울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눈물이 무작정 났다. 


지금은, 문득, 그저 몇 걸음 앞서간 남편과 딸이 보고 싶기도 하다. 둘에게 말하고 싶다. '둘 다 사랑해. 고마워.' 


PM 07 : 00


몸은 쇠약하고 외모는 구부정하지만 그녀 자신은 생각 속의 그녀 그대로다. 젊은 시절을 돌이켜보면 딱히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시절은 누구나 힘들었으니까. 다만 아이들이 자랄 때 돈이 너무 없었던 것이 미안할 뿐이다. 힘들게 버티면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기대로 살았지만 삶은 그녀에게서 멀찍이 비켜나 있었다.


불한당 같은 밤의 시간은 다시 밀려온다. 세상을 어찌어찌 통과하면서 많은 감정, 이름 없는 감정을 느꼈었다. 그녀 삶은 그동안 수많은 누군가의 무엇이었다. 지금은 또 하나의 무엇이다. 그 무엇이 시들었고 사라질 것이다. 그녀가 있던 장소와 거닐던 거리는 여전하겠지만 그녀는 없을 것이다. 그녀 존재의 한 조각은 그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남아있는 존재들 사이에 남아 있다가 세상에 없었던 것처럼 기억조차 사라질 것이다. 이것이 그녀의 삶이다. 이제 '살아가기'보다는 '그만두기'가 맞을 때이지만 '살고 싶음'과 '죽고 싶음'의 경계에 서성거린다.


PM 09 :30


할머니 집사는 약을 먹는다. 또 한 번의 날이 지나간다. 조금만 버티면 잠자리에 들 수 있다. 수면제는 잠만 이끄는 것이 아니다. 그녀 몸 곳곳에 숨어있는 외로움의 찌꺼기까지 데려가 준다. 거기에 운이 좋다면 젊은 시절의 남편과 어린 딸이 그녀에게 손을 흔들고 다가오는 꿈을 꿀수도 있고, 아니면 내일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마치 처마에 쌓인 눈이 녹아 털썩하고 떨어지는 순간처럼 싱겁게 말이다. 뭐, 안타깝지만, 다 그런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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