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요약을 제대로 했는지 모르겠네요.. 작품 속에 헬레나의 유머가 나오는 부분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사랑을 잃은 헬레나가 자살을 위해 먹은 약이 변비약이었다는 설정 말인데요. 당신이 생각하는 유머는 무엇입니까?
유머가 특징인 경우 독자들은 쉽게 관계를 따라갈 수 있어요. 진지함에 대한 묘사는 독자를 매혹시키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저는 희극적인 대화를 쓰는 걸 좋아합니다. 하지만 모든 인물이 희극적이라면 따분할 겁니다. 그래서 균형을 잘 맞추어야 합니다. 일단, 유머가 있으려면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는 초연함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유머를 쓰다 보면 안정감을 줍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진지해지면 불안정해집니다. 그게 진지함이 갖는 문제예요. 그에 반해 유머를 구사할 때는 안정감을 느낍니다. 미소를 지으면서 싸울 수는 없는 거랑 비슷한 거죠.
아,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저는 작가님이 이 책에서 말하려는 것이 무심코 내뱉는 말 한마디로 순식간에 인생이 바뀌는 '인생의 의외성'과 루치에를 정말로 사랑하는데 정작 그녀에 대해 아는 게 없고, 옛사랑 루치에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랑의 허무주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데 작가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것 말고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많아요. 농담이 통하지 않는 과도한 엄숙주의를 비판한 것일 수도 있고, 방금 말한 것과 비슷한 얘기지만 비장함과 진지함에 대한 허무주의적 시선일 수도 있고, 나의 전부라고 믿었던 사람에게 내 마음이 전달이 안 되는 안타까움일 수도 있고, 사람마다 다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작가에게 '당신의 소설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요?'라는 말을 매우 싫어합니다. 천편일률적인 해석을 저는 단호히 거부합니다. 커튼이라는 장막을 찢고 그 안을 보는 것은 각자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은 1967년에 쓰였습니다. 반세기 지났지만 지금의 현실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소설 속 공산주의 체제하에 놓였던 여러 등장인물의 뒤엉킨 신념과 믿음처럼 말입니다.
자기 신념에 빠져 있는 상황을 보면, 저는 한낮 농담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글 속에서 농담에 대한 생각을 말한 부분이 있습니다. 들어보세요.
"내가 이야기 하나 해 줄게요. 제네바에서 칼뱅의 말이 곧 법이 되던 때에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어쩌면 당신과 비슷하게 똑똑하고 농담도 잘하는 친구였어요. 그런데 하루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서에 대한 조롱으로 빼곡히 차 있는 그의 수첩이 발견되었지요. 그게 어디 화를 낼 만한 일인가요? 당신을 빼닮은 그 청년도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어찌 되었든 그는 아무것도 나쁜 짓은 하지 않았고 다만 농담을 한 것뿐인걸요. 증오요? 그는 그런 건 알지도 못했어요. 그는 단지 조롱과 무심함만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는 처형되었지요. 아, 내가 그런 잔인성을 편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어떠한 위대한 운동 앞에서도 조소와 우롱이 용납될 수 없다는 것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것을 부식시켜 버리는 녹이기 때문이지요."
농담은 결국은 삶의 모순성과 개인의 실존적 물음에 대한 이야기인 듯싶습니다.
네, 맞습니다. 이 작품은 루드비크, 헬레나, 야로슬로프, 코스트카라는 주인공들의 독백과 회상을 통해 각 인물의 관점에서 인생의 부조리함, 모순됨과 거기에 따른 실존의 문제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삶의 모순성을 헤처 나간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냥 모순성을 받아들이고 조금은 가볍게 생각하겠다는 얘기이다. 한때는 인생을 원인과 결과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거나 과거의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면서 힘든 현재를 이기려고 했었고요. 그런데, 지금은 행복한 삶이나 불행한 삶도 차이가 없이 교대로 반복되는 사건으로 생각됩니다. 행복과 불행의 반복이 어차피 삶이기에, 행복과 불행은 원인과 결과가 아니라 동일한 선상에 놓인 사건처럼 생각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삶은 아름다운 행복한 것이라는 희망 섞인 생각은 아예 없습니다. 다만 인생은 의외성이라는 길을 따라가는 여정으로 생각됩니다. 인생에서 어떤 선택을 하든 그 결과는 예측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고, 피하고 싶은 어떤 일을 이유 없이 당할 수도 있습니다. 나의 전부라고 믿었던 사랑도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고, 그 사람에게 마음조차도 전달할 수 없는 순간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인생의 허무를 말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인생에서 불현듯 일어나는 의외성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만 더 하겠습니다. 당신은 모든 작품에서 작가 소개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다. 1975년 프랑스에 정착하였다.'라고만 썼습니다. '태어났고, 정착했다'가 전부입니다. 그런 특별한 의미는 무엇인가요?
두 문장의 함의는 '작품은 작품으로만 봐 달라'라는 뜻입니다. 작가가 어디에 태어나, 어떻게 자랐고, 어디에서 교육을 받았고, 또 어떤 상을 수상했고, 어떤 사회활동을 했는가에 말하는 순간. 작가의 정보가 독자의 눈을 가린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로 제 책에는 작품 해설도 없습니다. '선(先) 이해와 해석'이라는 망막을 찢어버려야 작품을 다양하게 이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하고 다음 작품으로 만나겠습니다. 다음 작품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입니다.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TMI
1. 농담은 쿤데라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다.
2. '농담'은 7부로 구성이 되어있다. 작가의 의도인지 모르겠으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불멸'도 7부로 구성이 되어 있다. 쿤데라의 소설이 어렵다고 익히 들었고, 두께도 만만치 않아 겁도 났지만 '농담'은 그런대로 잘 읽혔다.
3. 내용 중 줄거리 요약은 대화체에서 벗어나 독후감 형식으로 쓰기로 했다.
4. 쿤데라의 소설을 읽기로 한 것은 잘한 거 같다. 섬세한 심리 묘사, 철학적 사유, 연결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를 나중에 한데 엮는 솜씨는 그가 왜 거장인지를 알려준다.
5. 밀란 쿤데라는 베일에 싸인 작가로 유명하다. 그와의 인터뷰와 사진 찍기는 하늘에 별따기라고 한다. 그와의 인터뷰를 허락받으려면 여러 조건이 필요하다. 먼저 그의 작품들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하고, 그와 진정한 친구가 되어야 한다. 그 친밀감을 형성하는 기간은 10여 년이 걸린다고 쿤데라의 친구는 말한다.
6. 왜? 그는 이런 신비주의를 고집할까? 이에 대한 해답은, 그가 작품을 대하는 방식을 짚어 가다 보면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그건 그가 엄청난 완벽주의자라는 것이다. 작품의 단어 토씨 하나와 쉼표 하나까지도 자신의 의도대로 작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번역의 적확성에도 과민할 정도이다. 그런 면모 때문에 그의 말에는 엄청난 무게감이 실리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연유로 자발적으로 실종을 당했다고 말하는 것이 나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