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해 갑니다. 어쨌든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 중 토마시와 사비나는 가벼움을 추구하고, 테레자와 프란츠는 무거움을 대변합니다. 그런데, 가벼움을 추구하는 토마시가 테레자와의 사랑이 싹 뜨면서 무거움을 선택하고 그녀와 살기로 결정합니다. 그 후 토마시에게 다시 실망한 테레자가 스위스를 떠나 프라하로 돌아가자 토마시는 한동안 갈등하다가 그녀를 따라서 프라하로 갑니다. 그리고, 무거움을 추구하던 테레자도 우발적 충동으로 낯선 남자의 초청에 응하고 사랑을 나눕니다. 한 남자만을 향하던 그녀의 무거움이 가벼워지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소설에서 또 다른 축을 이루는 사람들은 사비나와 프란츠입니다. 작가께서는 사비나를 통해 '키치'라는 개념을 새롭게 만드셨는데 그 키치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키치'란 세상에 대한 풍부한 해석과 다의성을 배제하고, '이것은 이것이다'하고 굳게 믿는 단선적인 통념이나 편견 같은 것입니다. 원래는 '싸구려 예술'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의미를 확장하였습니다. '인간 존재가 지닌 것 중에서 본질적으로 수락할 수 없는 것들'로요. 시대에 따라 등장하는 이데올로기들도 키치입니다. 공산주의의 키치란 공산주의 자체가 아니라 공산주의에서 뻗어 나온 위선적인 행동들을 가리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키치란 아름다움을 뒤집어쓴 가면즉, 허위로 가득 찬 가식적인 것들입니다. 우리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천박함인 것이죠. 사비나는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는 키치적 행위에 대해 반대합니다. 키치의 무거움은 결코 가벼움을 수용하지 못하고, 이는 가벼움에 대한 무거움의 폭력으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사비나는 끊임없이 공산주의의 키치로부터 탈출하려고 합니다. 인간에게 어떤 감정을 유발하는 행진 대열에서 빠져나와 자신만의 내면적 세계를 구축하려고 한다. 군중 속에 있다는 것은 거짓말을 해야 하고, 진리라고 말하는 것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행위의 목격자가 있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좋건 싫건 우리를 관찰하는 눈에 자신을 맞추며, 우리가 하는 그 무엇도 더 이상 진실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군중 속에 있다는 것은 거짓 속에 사는 것인 거죠.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거대한 행진 대열이 프란츠에게는 감동을 선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혁명을 동경하는 몽상가입니다. 키치적 인물인 것이죠. 대학교수로 재직하며 그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프란츠는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행진에 매료됩니다. 그는 책 속에 파묻힌 삶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고 거리로 뛰쳐나온 행진의 대열에 합류합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 이것이 사비나가 프란츠를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키치는 공산주의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 키치, 유럽 키치, 미국 키치, 민족주의 키치 등 수도 없이 많은 키치들이 생성되고 사멸합니다. 키치들은 자신들이 가진 "Es muss sein" (그래야만 한다)라는 논리로 상대편을 선동하고 억압하면서 목적하는 바를 이루려고 합니다.
아직까지도 키치라는 말이 생소하게 들리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일단 '키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관통하는 핵심어입니다. 키치의 원천은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다. 달리 말하면 키치는 획일화된 관념이나 다양성을 부정하는 모든 것들이죠. 예를 들어 이념이나 종교, 정치 같은 것이에요. 왜? 인간이, 이념이 이끄는 대로 살고, 종교의 뜻대로 살아가야 하고, 정치인들이 지껄이는 걸 믿으면서 살아가야 하느냐는 것이에요. 그래선 안된다는 거예요. 그뿐만이 아니라 억압되고 세뇌된 감정은 모두 키치에 포함됩니다. tv 속의 어떤 광고를 보면, 잔디밭에서 아이들은 까르르 웃으며 즐겁게 뛰어놀고, 아내는 미소를 지으며 파이를 굽고, 한 아이는 호수로 물을 뿌리면 물방울은 빛에 반사되어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그런 장면 있잖아요. 그것도 슬로모션으로, 행복의 표정은 마치 이래야 된다고 말하는. 이런 유치함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야. 가족문제도 마찬가지야. 가족은 원래 갈등이 있는 거 아닌가요? 그런데, 갈등 있던 가족이 오랜만에 만나 눈물로 화해하는 장면을 사람들은 상상합니다. 또는 tv의 멜로드라마 속에서 배은망덕한 딸이 버림받은 아버지를 품에 껴안는 모습이나 행복한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의 창문이 황혼 속에서 반짝이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두 눈이 촉촉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보이는 거짓과 뒤에 숨어있는 진실을 구별해야만 이런 유치한 키치적인 감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 남녀 간의 문제도, 남자는 이래야 되고, 여자는 저래야 된다는 편협한 시선이 있어요. 그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나 정치도 그들의 주장을 위해 편집을 하여, 대중이 보고 싶고, 믿고 싶은 것만 보여줍니다. 정치인들은 근처에 카메라가 있으면 눈에 띄는 첫 번째 아이에게 달려가 그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빰에 키스합니다. 키치는 모든 정치인, 모든 정치행위의 미학적 이상이에요. 진실은 외면한 체. 이처럼 나도 모르게 젖어 있는 키치적인 감성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근데 키치의 세계를 움직이는 건 감수성이라 쉽지가 않습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나 첫사랑의 추억, 그리고 애국심 같은 키치는 두 방울의 감동적인 눈물을 흘리게 하여 키치로부터 자유롭기가 힘듭니다. 가슴이 말할 때 이성이 반박의 목청을 높이는 것은 예의에 벗어난 짓이기에 키치의 왕국에서는 가슴이 독재를 행사합니다. 키치는 인간들의 기억 속에 깊이 뿌리내린 핵심 이미지에 호소합니다. 그래서 키치는 백발백중 감동의 눈물 두 방울을 흐르게 합니다. 모든 인간 사이의 유대감은 오로지 이 키치 위에 근거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지만 키치가 위험한 건, 키치로부터 파생된 감정이나 감수성은 폭력을 수반할 수밖에 없어요. 감정을 이성보다 앞세우면 말입니다. 논리나 이성은 체계가 있어서 변하지 않는데 감정은 수시로 변하거든요. 나치즘이나 파시즘, 스탈린주의나 일본의 제국주의가 이런 토대 위에서 형성되었어요. 야만성의 상부구조가 키치적인 감수성인 셈이지요.
한마디로 말하면 '키치'는 개별성이 아니라 범주화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이 소설의 또 다른 모티브인 '그래야만 한다'와도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당위성을 주는 것이 키치인데.. 작가님 말씀대로 키치가 어디에나 존재한다면 과연 키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키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키치들을 배반하고 탈출해도 새로운 키치들을 만나게 될 겁니다. 만약에 모든 키치들로부터 탈출했다면 모든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인데 엄청난 고독과 공허를 느끼겠죠.
키치로부터 벗어나기 쉽지는 않더라도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여러 사조가 공존하고 그들의 영향력이 서로를 제한하고 무화하는 사회에서는 키치의 독재로부터 어느 정도 빠져나올 수 있겠죠. 모든 개인주의와 회의주의, 아이러니가 발현한다면 말입니다. 그러면 개인은 자신의 독창성을 보호할 수 있고, 예술가는 예기치 않은 작품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정치 흐름 하나가 모든 권력을 쥐는 곳에서 사람들은 대번에 전체주의의 키치 왕국에 빠지게 됩니다. 키치 왕국에서는 대답은 미리 주어져 있으며, 모든 새로운 질문은 배제됩니다. 따라서 전체주의 키치의 진정한 적대자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인 셈이다. 질문이란 이면에 숨은 것을 볼 수 있도록 무대장치의 화폭을 찢는 칼과 같은 것입니다.
작가님은 3부 '이해받지 못한 말들의 조그만 어휘집'에서 단어들을 새롭게 정의를 내렸더라고요.
네, 맞습니다. 몇 가지를 말했습니다. 여자, 정조와 배신, 음악, 빛과 어둠, 행렬에 대해서요. 예를 들어
배신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아빠와 교사들은, 배신이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추악한 것이라고 누차 우리에게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배신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배신한다는 것은 무리에서 벗어나 바깥으로 나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다. 사비나에게 미지로 떠나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한 번뿐인 인생에서 모르는 것을 향해 가는 것이 충실한 것입니다. 배반할수록 삶에 충실한 것이죠. 그래서 배반의 순간들이 그녀를 들뜨게 했고, 그녀 앞에 새로운 길을 열어주고, 그 끝에는 여전히 또 다른 배반의 모험이 펼쳐지는 즐거움을 그녀의 가슴에 가득 채워 주곤 했어요. 그러나 여행이 끝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부모, 남편, 사랑, 조국까지 배반할 수 있지만 더 이상 부모도 남편도 사랑도 조국도 없을 때 배반할 만한 그 무엇이 남아 있을까요? 공허만이 남겼죠. 그래도 배반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살면서 두려운 것이 권태와 허무인 거 같습니다. 권태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토마시이고, 허무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프란츠인 거 같습니다.
허무하다는 것은 자기가 의미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알고 보니 의미 없는 것일 때 느끼는 실존적인 공허감이겠죠. 권태는 같은 일을 계속 반복했을 때 생겨나는 삶과 세상에 대한 태도이고요. 토마시는 권태가 두려워 수많은 여자들을 만났다가 헤어지고, 프란츠는 허무가 두려워 한 여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의미를 지닌 사랑을 하려고 했습니다. 결말은 좋지 않았지만요. 어쨌든 간에, 인간은 허무와 권태를 달고 살 수밖에 없고, 결국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거 같습니다. 권태를 두려운 사람은 일을 저지르고, 허무가 두려운 사람은 모범적으로 무겁게 행동하고요.
토마시가 오이디푸스 신화를 인용하여 반성하지 않은 공산주의를 비판함으로써 병원에서 쫓겨나고 유리창 닦는 노동자로 전락합니다. 그 기사만 철회한다는 문서에 사인만 하면 쫓겨나지도 않는데 그런 행동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토마시 삶에 끼어든 돌발적인 일입니다. 예전에 그는 그가 생각한 대로 수술을 성공하지 못하면 절망에 빠져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여자에 대해 흥미를 잃기까지 했죠. 그의 직업이 지닌 "Es muss sein!" (그래야만 한다)은 그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와도 같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내면적 "Es muss sein!" (그래야만 한다)에 의해 인도하지 않은 직업에 종사하며 일단 일을 끝내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사람들의 행복을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리창을 닦는 긴 막대기를 들고 프라하를 누비고 다니며 십 년은 젊게 느껴지는 자신의 삶을 발견하게 되죠.
테레자는 죽어가는 개 카레닌을 보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이 주는 삶의 아름다움과 신비함을 깨닫습니다. 그녀는 개와의 사랑은 인간과의 사랑에서 얻을 수 없는 지고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테레자는 카레닌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사랑조차 강요하지 않습니다. 이는 카레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존재는 영혼과 육체의 이원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혐오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존재입니다. 그 존재는 육체와 영혼 중에서 무엇이 우월한지를 따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테레자는 카레닌의 곁에 있으면 기분이 좋고 편안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이 가능한 곳은 자연의 세계입니다. 그곳은 미래의 결과를 예상하거나 추측하여 행동하지 않으면서 지금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곳입니다. 토마시와 테레자가 전원의 목가적 삶에서 온전한 행복감을 얻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도 괜찮습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라는 대사가 있습니다. 작가님이 말씀하신 것이 슬픔의 탈을 쓰고 있지만 내 삶의 내용은 행복으로 채워졌다는 것이죠?
네, 맞습니다. 나의 행복은 너무나 슬픈 표정을 하고 있어서 오랫동안 행복인 줄 몰랐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말로 전부 소진할 정도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비해 당신은 당신의 작품에 대해 극도로 말을 하는 꺼리더군요. 그런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 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걸 꺼리는 건 맞습니다. 사실 이야기를 많이 하면서 독자들의 이해나 친밀감을 높이는 장점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제가 제 작품에 대한 생각도 바뀌고 무엇보다도 제가 하는 말이 선입관으로 작용할까 봐 그리고 제가 의도하지 않은 다른 해석이 가능한 것을 방해하지나 않을까 해서 가급적 작품에 대해 말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작가를 다른 사람과 구별 짓는 특징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작가는 우선 관찰하는 사람입니다. 관찰하는 대상에 질서를 부여하고 삶에 의미를 불어넣고자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언어를 사랑하고 언어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지능과는 그렇게 관련이 없습니다. 지능이 높고 독창적인 사람들 중에도 언어를 사랑하지 않고 그걸 효과적으로 사용할 재능도 없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표현력이 엉망이에요.
당신은 타고난 소설가라고 생각하는데.
타고난 소설가라기보다는 소설 쓰는 일에만 관심 있다는 말이 더 어울릴 거 같습니다. 저는 다른 관심사가 없습니다. 저에게 있어 소설은 마음을 가득 채우고 시간과 에너지를 모두 쏟는 그런 일입니다. 반면에 다른 종류의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은 그 밖의 활동에 흥을 갖게 되겠지요.
농담에 비해 풍자가 줄어든 거 같습니다. 지금은 풍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네, 맞아요. 농담에 비해서는 줄었어요. 하지만 풍자를 좋아합니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필요합니다. 모든 곳에서 사람들은 너무 진지합니다. 지나칠 정도로 엄숙하게 모든 일을 받아들입니다. 비극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고상하고 뭔가 운명에 도전하는 그런 것, 인간의 삶은 가치가 있고 도전해 볼 만하다는 것. 그래서 비극에서 위안을 받습니다.
그런데, 희극 코미디의 세계는 결론적으로 인간 아무것도 없어. 인간 뭐 별거 있나? 그래서, 진지한 사람들을 우스꽝스럽게 만들 때 쓰는 것이 생리현상입니다. 그래서 저의 작품인 『농담』에서 죽으려고 약을 먹었는데 설사약이라는 설정을 한 것입니다. 사람이 고상하고 진지한 척하는데 별거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