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불멸을 원하는 욕망 때문에 누군가에게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작가님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우리는 그들이 만들어 낸 이미지일 뿐, 결코 그것이 우리 자신이 아님을 소설 속에서 '우리는 우리 이미지 뒤에 숨을 수 있고, 우리 이미지 뒤로 영원히 사라져 버릴 수 있으며, 우리 이미지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도 있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의 이미지가 아닌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고는 작품 곳곳에 이미지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할애하셨는데요. 이미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 자아는 포착될 수 없고, 묘사할 수 없는 반면, 너무나 포착하기도 쉽고 묘사하기도 쉬운 유일한 실재는 바로 타인의 눈에 비친 우리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더욱 끔찍한 사실은 당신이 당신 이미지의 주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처음에는 당신 스스로 그 이미지를 그리려고 애쓰지요. 그러다가 적어도 그 이미지에 영향력만이라도 행사하고, 어떻게든 통제를 해 보려 들지만 헛수고임을 알게 됩니다. 당신을 보기 딱한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데는 적의에 찬 쪽지 하나면 족하니까요. 그러니깐 우리 이미지란 겉모습일 뿐이고, 그 뒤에 세상 시선과는 무관한 우리 자아의 실체가 숨어 있을 거라고 믿는 건 천진한 환상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타인의 이미지로 인식된다는 점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 틈에 끼어 사는 한,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모습이 곧 우리일 거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신경 쓰면서, 가능한 한 호감을 주려고 할 수밖에 없는 거 아닌가요?
네, 우리가 사회적 동물인 이상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자아와 타인의 자아 사이에 눈이라는 매개를 통하지 않는 직접적인 접촉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의 생각에 비칠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불안한 탐색을 빼고서 사랑을 생각하는 게 가능한 일은 아니죠. 상대가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면, 이미 그를 더는 사랑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미지와 실제의 우리가 다른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당신이 거울 없는 세상에서 살았다고 생각해 보세요. 당신은 당신 얼굴을 꿈꾸었겠지요. 아마 당신은 그 얼굴을 당신 내면의 외적 반영으로 상상했을 겁니다. 그러다가 마흔 살쯤 되었을 때, 사람들이 당신에게 유리거울을 비춰 주었다고 가정해 봐요. 그 순간 얼마나 놀랄까요. 아마 당신은 전혀 낯선 얼굴을 보게 될 겁니다. 그때 당신은 분명히 알게 되겠지요. 당신 얼굴이 곧 당신인 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저는 소설에서 타인과의 연결 속에서 이미지로 남게 되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는 순간조차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합니다. 가끔은 나의 눈물을 알리고 싶은 순간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의 감정을 과시하고 싶어하고 그 속에서 더 큰 슬픔의 격랑에 휘말리려 할 때가 있는 거죠.
다른 사람에 의해서 이미지가 형성되고, 그것이 내가 생각한 이미지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수한 시선 속에 놓일 수밖에 없는 거 같아요. 작가님도 사람들의 수많은 시선이나 관심을 극도로 피하는 거 같은데요.
어떤 면에서 사람들의 시선이야말로 몹쓸 압제자요, 흡혈귀의 입맞춤 임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얼굴에 주름을 새긴 것은 바로 시선들의 예리한 날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매일 무수한 시선들이 우리를 꿰뚫건만 그것으로도 불충분하여 병원에서, 거리에서, 수술대 위에서, 숲에서, 심지어 침대 속에서까지 잠시도 우리를 떠나지 않고 우리를 관찰하고 있습니다. 삶의 영상은 어떤 분쟁이 일어나거나 대중의 호기심이 요구할 때는 언제라도 활용될 수 있도록 고스란히 문서함에 보존될 것입니다. 시선들의 감미로운 부재인 고독은 찾기 쉽지 않습니다.
책에서는 자아의 유일성을 가꾸는 두 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아녜스'와 '로라'를 예로 들어 '뺄셈형 인간'과 '덧셈형 인간'으로 나누었습니다. 우리들은 이 둘 중 어떤 형 인간에 더 가까운지요.
소설 속 인물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타인의 시선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고 싶어 하는 대상과 타인의 시선을 받고 그들에게 하나의 이미지로 남고 싶어 하는 대상으로 말입니다. 그들을 대비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각자를 돌아보기 위해서요.
매일 점점 더 많은 얼굴이 등장하고 그 얼굴들이 날이 갈수록 서로 닮아 가는 이 세상에서, 사람이 자아의 독창성을 확인하고 흉내 낼 수 없는 자기만의 유일성을 가꾸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덧셈법과 뺄셈법이다. 아녜스는 자신의 순수한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자신의 자아에서 외적인 것과 빌려온 것을 모두 추려냅니다. 이 경우 연이은 뺄셈 때문에 자아가 0이 되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로라의 방법은 정확히 반대입니다. 자신의 자아를 좀 더 잘 보이게 하고, 좀 더 파악하기 쉽게 하고, 좀 더 두텁게 하기 위해서, 그녀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덧붙여 그것에 자기를 동화합니다. 이 경우 덧붙인 속성들 때문에, 자아의 본성을 상실해 버릴 위험이 있게 되죠.
소설에서는 유럽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만.
위대한 문화란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유럽의 병적 태도가 낳은 딸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언제나 앞을 향해서만 뛰어가면서, 세대의 연속을 마치 각각의 선수가 앞 주자를 앞지르고 다시 뒤 주자에게 추월당하는 그런 릴레이 경주로 여기는 광기 말입니다.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이 릴레이 경주가 없다면 유럽 예술도 없을 것입니다, 유럽 예술의 특징, 즉 독창성이나 변화에 대한 욕구도 없을 겁니다. 그리고 전쟁과 문화는 유럽의 두 축입니다. 유럽의 하늘과 지옥이며, 영광이며 수치입니다. 그럼에도 이 둘은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 수 있는가? 타인들과 기쁨과 괴로움을 자기 것으로 하지 못하면서 그들과 한통속이 되지 못하면서 어떻게 함께 살 수 있는가요?
인생에서 견딜 수 없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로 존재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 거기에는 어떤 행복도 없습니다. 산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고통스러운 자아를 나르는 일일뿐입니다. 하지만 존재, 존재한다는 것은 자신을 샘으로, 온 우주가 따뜻한 비처럼 내려와 들어가는 돌 수반으로 변모시키는 것입니다.
『불멸』을 읽다 보면 새로운 용어가 등장합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는 '키치(kitsch)'란 말을 새롭게 정의하신 것처럼 『불멸』에서는 '이마골로기 (imagology)' 라는 말을 새로 만드셨습니다.
이마골로기 (imagology)는 이미지(image)와 이데올로기(ideology)의 합성어로 제가 직접 만들었습니다. 이 소설에서 제가 말하고 싶은 내용의 핵심어입니다. 이마골로기는 '이미지에 지배당하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불멸을 하고 싶은데 잘못된 이미지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파리에서 같은 층에 사는 나의 이웃은 낮에는 사무실에서 다른 동료 직원을 마주 보고 앉아 시간을 보낸 뒤, 집에 돌아오면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기 위해 텔레비전을 켭니다. 텔레비전에서 아나운서가 최근 여론조사를 해설하면서, 대다수 프랑스인이 프랑스를 유럽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로 생각한다는 정보를 알려주면 그는 매우 기뻐하며 샴페인 병을 땁니다. 그러나 바로 그날, 자신이 사는 골목에서 일어난 강도 사건 세 건과 살인사건 두 건을 그는 절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이처럼 여론조사는 이마골로기 권력의 완벽한 도구입니다. 이 권력이 대중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는 것은 여론조사 덕분인 것이죠.
사후세계에서 괴테와 헤밍웨이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미지 속에 숨어있는 우리는 그 이미지를 진짜 자기 자신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일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 같습니다만.
헤밍웨이는 자신의 책은 읽어보지 않은 체 자신에 대해서 떠들어대는 이야기를 하면서 '영원한 구형(求刑)'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책을 읽고 그 속에서 작가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가십거리로 그를 판단합니다. 자유분방한 사람이라는 보이는 이미지와 함께 그는 불멸하는 것입니다. 불멸한다는 거, 그것은 이미 그 대상의 본질로부터는 멀어진 것이 아닐까? 더 이상 사라지지 않는 하나의 이미지와 비치는 대상의 본질은 이미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 진실은 사라지고, 그의 이미지만 남습니다. 불멸의 대상으로 말입니다. 이미지는 언제든 누군가에 의해 덧씌워질 수 있습니다. 불멸의 대상은 그 이미지에 대해 더 이상 발언할 기회가 없게 됩니다. 그는 이미 사라졌으므로.
소설에서는 불멸이라는 것을 통해서 문학의 영원성을 말씀하신 거 같기도 합니다만.
네, 맞습니다! 문학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그 속에 있기 때문에 불멸의 이미지와 아우라를 가지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수많은 문학작품 속의 등장인물들을 머릿속에 떠올릴 때 그들이 가지고 있던 고유의 성격과 이미지가 우리에게 고착화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변하지 않은 영원한 불멸의 존재로 남게 되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