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소설 『정체성』은 다른 소설에 비해 두께에 대한 거부감도 없고 내용도 심플합니다. 어린 아들이 죽은 후 실의에 빠진 '샹탈'은 남편과 이혼하고, 연하의 연인인 '장마르크'와 동거를 합니다. 그녀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권태로움에 빠진다. 어느 날, 그녀는 장마르크에게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더라"라는 애잔한 슬픔의 말 한마디를 토로한다. 말 한마디로 사건이 시작됩니다. 장마르크는 샹탈을 기쁘게 하기 위해 익명의 스토커가 되기를 자처합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의 첫 번째 편지는 "나는 당신을 스파이처럼 따라다닙니다. 당신은 너무, 너무, 아름답습니다." 마침내 나비의 날갯짓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의 편지가 그녀의 삶, 나아가 둘 사이의 관계에 어떤 파문을 던질지를 몰랐다.
다른 편지들도 속속 보내지고 그녀는 점점 그것을 무시할 수 없게 됩니다. 편지는 지적이며 점잖았고 조롱기나 장난기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것은 유혹이 아닌 숭배의 편지였습니다. 다음의 편지는 보다 대담했습니다. "사흘 동안 당신을 보지 못했습니다. 당신을 다시 보았을 때 너무도 가뿐하게 위로 떠오르고자 갈망하는 당신의 모습에 나는 경탄하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존재하기 위해서는 춤을 추며 위로 솟구쳐야만 하는 불꽃을 닮았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늘씬한 몸매로 당신은 경쾌하고, 디오니소스적이고, 도취한 듯한 야만적인 불꽃, 그 불꽃에 둘러싸여 있더군요. 당신을 생각하며 나는 당신의 알몸 위해 불꽃으로 엮은 외투를 던졌습니다. 당신의 하얀 육체를 추기경의 주홍색 외투로 가렸습니다. 이렇게 가린 당신의 몸, 빨간 방, 빨간 침대, 빨간 추기경 외투, 그리고 당신. 아름다운 빨간 당신이 눈에 선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빨간 잠옷을 삽니다. 자신의 편지를 받은 그녀의 변화에 그는 당혹해하며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이 소설도 전작들이랑 어딘지 모르게 비슷한 분위기가 있는 거 같습니다.
네, 당연히 비슷한 부분도 있지요. 작가의 작품은 하나의 작품의 변주일 수 있습니다. 이 소설도 권태, 무의미, 가벼움이 밑바탕에 있습니다. 거기에 한 사람의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이 되나를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편지에 진주 목걸이가 아름답다고 쓰자, 장마르크의 선물이지만 너무 화려하다며 자주 착용하지 않았던 진주 목걸이를 자랑스럽게 걸고 외출하고, 빨간 옷을 언급했더니 그녀는 빨간 잠옷을 입고, 그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여자로 변신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마저 바꾸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녀는 진주 목걸이를 싫어하는 여자에서 좋아하는 여자로, 붉은색을 경멸했던 여자에서 붉은색을 좋아하는 여자로 변하고 있으니까요.
네, 그렇군요. 그녀를 지켜보는 장마르크의 입장이나 생각에도 변화가 있습니다.
당연히 그렇죠. 그는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 미지의 스토커를 자처했지만 질투심도 느끼죠. 애써 치미는 질투의 감정을 삭이고 나서 그녀의 슬픔을 이해하기 위해, 그녀를 찬양하고 숭배하기 위해, 그녀를 치밀하게 관찰합니다. 그는, 모든 여자가 노화의 정도를 남자들이 자기에게 표출하는 관심, 혹은 무관심을 척도로 가늠하는 것을 이해합니다. 스토커의 편지, 그러니까 장마르크의 편지는 그녀로 하여금 망각하고 있던 자신의 매력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춘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스포트라이트가 그녀에게 엄청난 자기만족, 혹은 자긍심이라는 감정을 부여한 것입니다.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보석이 있는지를 알았을 때, 그녀가 어떻게 자신의 삶에 자긍심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신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확인할 때, 그녀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기쁨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길거리를 걸을 때도 우리의 걸음걸이는 레드 카펫을 걷는 여배우처럼 당당하고 아름다울 것이고, 낯선 사람과 대화할 때도 우리의 말과 행동은 거칠 것 없는 아우라를 뿜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자기 자신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존재하는 걸 자각하고, 그래서 자긍심이라는 감정에 사로잡히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습니다. 우리는 대개의 경우 모종의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위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가 받은 스토커의 편지가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이 얼마나 많은 보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를 알려 주는 숭배자가 없다면, 자긍심을 갖기란 너무나 힘든 법이니까요. 그렇습니다, 그는 제대로 오판한 것입니다. 연상의 동거녀는 자신의 노화를 걱정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녀의 우울과 슬픔은 사실 자신의 삶에 대한 자긍심이라는 감정이 연기처럼 빠져나가고 있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긴, 아무도 자신을 거들떠보지 않는 늙은이로 전락하는 순간이 바로 자긍심을 잃는 시점일 것입니다. 물론 그녀의 자긍심을 뺏은 주범은 그 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연애편지가 그녀만이 아니라 그의 '정체성'도 변화시킨 거 같습니다.
편지를 쓰기 위해서 그는 그녀의 매력을 주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그녀를 숭배했고 사랑했던 자신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 여러모로 많이 변모한 그녀를 새롭게 사랑하게 된 남자로 변한 것 이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스토커로서 편지를 쓰기 위해 그는 지금까지 무관심 속에 방치되었던 그녀를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지금까지 간과하고 있었던 연인의 매력, 그리고 시간이 지난 뒤 그녀가 얻게 된 새로운 변화들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새롭게 찾아낸 그녀의 모습에서 그는 자신의 가슴에 사랑이, 과거와는 다른 색깔의 사랑이 또다시 차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스토커의 편지가 그가 보낸 것이라는 사실이 들통나자, 화를 참지 못한 그녀는 순간적이나마 그를 떠나버림니다. 같이 있던 사람이 나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는 그 사람이 내 곁을 떠났을 때야 뒤늦게 자각하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죠. 두 남녀는 헤어지고 나서야 자신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런던에서 재회함으로써 소설이 끝나게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화해를 한두 사람은 잠자리를 함께할 때 마침내 알게 됩니다. 사랑은 서로를 주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아가 서로를 숭배하면서 자긍심을 심어 주는 것이라는 걸.
그래서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우리에게 애잔하지만 깊은 감동을 줍니다.
'그녀는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으로부터 눈길을 떼지 않을 거야. 쉴 새 없이 당신을 바라보겠어."그리고 말을 멈추었다가 이렇게 이었다. "내 눈이 깜박거리면 두려워. 내 시선이 꺼진 그 순간 당신 대신 뱀, 쥐, 다른 어떤 남자가 끼어들까 하는 두려움." 그는 몸을 조금 일으켜 입술을 그녀에게 대려고 했다.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냥 당신을 보기만 할 거야." 그러더니 다시 말했다.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 놓을 거야. 매일 밤마다."'
따지고 보면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의 시선이 아니라 천박하고 음탕한 익명의 시선, 호감이나 취사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고 사랑도 예의도 없이 필연적으로, 숙명적으로 그녀 육체로 쏟아지는 시선입니다. 이런 시선들이 그녀를 인간 사회에 머무르게 하고 사랑의 시선은 그녀를 무리로부터 유리합니다.
우리는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과 함께 있으려고 합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방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발견하는 놀라운 재주가 있고, 사랑하는 사람은 경탄하는 사람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니 어떻게 내가 가진 치명적인 단점이 그의 눈에 들어올 리 있겠습니까. 그래서 애인은 우리에게 다른 타인이 결코 줄 수 없는 자긍심을 되찾아줄 수 있는 겁니다. 반대로 나의 모든 면에 무관심하거나 혹은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좋은 친구 혹은 좋은 동료일 수는 있어도 말입니다.
결론은 정체성과 자긍심에 관한 이야기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독자들은 타인에 의해서 바뀌는 정체성만을 이 소설이 이야기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 감춰진 중요한 테마는 자긍심인 거죠. 스피노자는 '자긍심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과 활동 능력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기쁨'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명시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되돌아본 자신의 모습이 긍정적일 때에만 우리는 기쁨을 느끼는 법이죠. 자신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그리고 얼마나 아름다운지 확인할 때 기쁨을 느낍니다. 단순히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자긍심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샹탈과 장마르크는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죽은 아들을 통해 자아의 개별성과 정체성에 대해 생각합니다. 사랑을 하면서 실존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도 느껴지는 데 작가님이 생각하는 정체성은 무엇인가요.
정체성은 혼자 생기는 게 아닙니다. 사람과의 관계나 사회적 맥락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죠. 어떤 사람들은 정체성이 그 사람의 고유성이기에 독립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관계 속에서 형성이 된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죠. 우리가 생각하는 정체성은 타인의 시선으로도 쉽게 바뀌고요. 사람마다 거의 변하지 않는 그만의 인장 같은 것이 아닌거죠. 그런데 어찌 보면 정체성은 여전히 알 수 없고, 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변하는 이유는 외부와의 관계가 변하기 때문이다. '정체성 = 관계+이름+얼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름과 얼굴이 추가되죠.
네, 동의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체성을 사전적 의미로 만 이해합니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일관되게 유지하는 본질적인 특성이라고 생각했다. 관계는 이해합니다.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를 중시합니다.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인물도 예외는 아닙니다. 다만, 세상의 모든 시선을 경멸하고 고독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은 별개겠죠. 자아의 총체성인 정체성은 앞서서도 말했지만 역설적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나기 싫은 사람이 있다면 왜 만나기 싫은 것일까? 그는 나의 과거의 정체성을 되살리기 때문이다. 좋고 싫은 이유들은 그들을 통해 발견되는 자신의 정체성에 우리의 감정이 투영된 것이다. 그런데 이름과 얼굴은 무슨 의미인가요.
이름도 관계 못지않게 정체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익명을 사용하거나 위장이나 마스크를 쓰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익명을 사용하자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합니다. 비록 동일 인물이더라도 다른 이름을 사용하자 다른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다르게 부른다면 자신의 이름으로 불러주기를 바랍니다. 사람뿐 아니라 어떤 대상을 그 고유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그 대상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자신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사실에 불쾌해한다. 이처럼 이름은 어떤 사람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수단이고, 반대로 그 정체성을 가장 잘 숨길 수 있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위장이나 가면은 더 위험합니다. 위장을 하거나 가면을 쓰고 있다면 거침없이 끔찍한 일들을 벌일 수도 있습니다. 가면은 이제 하나의 독립된 물체가 됩니다. 그 배후로 수치감과 자의식에서 해방된 인간은 숨어버리고, 본능에 충실한 괴물이 탄생합니다. 순하게 말해서, 얼굴을 가리는 것은 자신의 원래의 정체성을 숨기고 새로운 정체성을 입는 행동입니다. 결국 이름과 얼굴이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