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적 대위법

by 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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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렇군요. 수긍이 갑니다. 잠깐 화제를 돌려 글 쓰기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한 번에 한 개 이상의 작품을 쓰시나요?

아니요. 한 작품에만 몰두합니다. 가끔 어떤 작품을 쓰면서 그전 작품을 손보는 경우는 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하나씩 순서대로 하는 걸 좋아합니다.


작업할 때 순서를 뒤섞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써 내려가시는 거군요.

네, 그렇습니다. 순서를 뒤섞어서 쓴 적은 없습니다. 각기 다른 부분을 조금씩 쓰면 아주 중요한 형식의 연속성을 잃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내적 연속성 말이에요. 때때로 형식을 수정하려고 할 때에서야 비로소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글을 쓰는 습관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어떻게 소설을 시작하시나요?

무엇보다도 백일몽이나 어떤 상황이나 상황에 대한 일종의 상념 같은 것이 떠오릅니다. 그러면 메모하거나 이야기의 전반적인 흐름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하지요. 누군가는 이 장면에서 들어와서 다른 장면에서 떠나가고, 누군가는 이 일이나 저 일을 합니다. 소설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할 때 플롯의 전반적인 윤곽은 이미 잡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플롯을 끝까지 고수해 본 적은 없습니다. 플롯은 글을 써나가는 동안 완벽해지거든요. 이런 과정이 저로 하여금 글을 시작하게 만듭니다. 소설을 시작할 때는 문체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같은 장면을 쓰고 또 쓰면서, 완벽하게 반대되는 상황을 만들어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글은 아침에 씁니다. 밤에 쓴 글을 믿지 않습니다. 너무도 쉽게 써지기 때문이지요. 간밤에 쓴 글을 아침에 읽어보면 결코 좋지 않더라고요. 글을 시작하는 데는 햇빛이 필요합니다. 글을 쓰기 전에 이상하고 오컬트적인 의식을 행하지는 않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곧장 작업실로 가서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하루의 첫 에너지를 글쓰기에 쏟아부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리고, 마지막 몇 줄은 남겨둡니다. 그래야 다음 날 전날 썼던 마지막 부분을 쓰면서 일을 시작할 수 있거든요.


헤밍웨이도 똑같은 방법을 썼다고 하더군요. 문장을 반만 쓰고 남겨놓아서, 다음 날 연결해서 쓸 수 있도록 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을 모두 쓰지 말아야 다음 날 더 쉽게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 봄니다. 제가 언제나 가장 힘든 부분도 시작하는 일입니다. 아침에 어제 쓰던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하면 불안감이 덜하고 기계적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는 거죠.


한 번은 헤밍웨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그가 책을 한 권 마쳤을 때 텅 비고, 슬픈 느낌이면서도, 행복함을 느꼈다고 하셨지요. 그런 상황에서는 어떤 느낌이신가요?

정확하게 똑같은 것을 느낍니다. 한 권의 책 쓰기를 마쳤을 때 저는 텅 빈 기분, 불안함을 느낍니다. 소설이 저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지요. 하루하루 지나면서 저는 소설을 빼앗겼다고 느낍니다. 마치 술을 끊은 알코올 의존자처럼요. 소설은 장식물이 아닌 어떤 것입니다. 인생이 갑작스럽게 제게서 단절된 느낌이 들지요. 이 느낌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즉시 저 자신을 또 다른 작품으로 던져 넣는 겁니다. 먼저 작품과 그 뒤에 나오는 작품 사이에 공허감이 더 깊이 파고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말고 즉시 일로 되돌아가야만 합니다.


작가님은 현대문학에서 어느 인터뷰에서 심리학 소설의 종언에 대해 말씀하신 거 같은데요.

소설이란 최고의 지적 종합물이며, 인간이 아직도 전체로서의 세계에 의문을 던질 수 있는 마지막으로 남은 공간이라고 여겼습니다. 소설은 종합하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소설은 시, 판타지, 철학, 경구, 에세이를 다 합쳐놓은 것이라고 확신했어요.


작가님은 '소설적 대위법(철학, 서사, 꿈을 하나의 음악으로 엮어내기)'의 형식을 선호하시는 거 같습니다.

위대한 지적인 종합으로서의 소설이라는 개념은 거의 자동적으로 '다성(원래는 여러 가지 멜로디가 각자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음악형식을 가리킨다)'이라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건 아직도 해결해야 할 문제로 남아 있지요.


다성이라는 은유를 사용해서 문학에 적용하고 계시는데, 문학에 사실상 가능하지 않은 요구를 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요?

소설은 외적 요소를 두 가지 방식으로 포함할 수 있습니다. 돈키호테가 여행할 때 다양한 인물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지요. 이런 식으로 관계없는 독립적인 이야기들이 소설의 틀에 맞아 들어가면서 작품 전체 속으로 편입됩니다. 그리고, 이와는 다르게 어떤 이야기를 중심적 이야기와 연결시키면서 두 이야기를 동시에 흘러가게 합니다. 목적은 다른 이야기를 함께 엮는 것이지요. 이질적으로 남겨놓은 요소들을 동일한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형식의 작법을 설명하는 말로 '다성'이라는 말보다는 '대위법'이라는 말을 선호합니다. 소설적 대위법의 기본 요건은 첫째로 다양한 부분의 평등성, 둘째로 전체의 불가분성이지요. 어찌 보면 이 기법을 사용한 방식은 지나치게 기계적이고 시적이지 못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단점이 존재합니다.


대위법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는 덜 두드러지더군요.

바로 그 점이 제가 목표한 것이었지요. 꿈, 서사, 성찰이 서로 분리될 수 없고 완전히 자연스러운 흐름이 되어 함께 흐르기를 바랐거든요. 하지만 소설의 대위적인 특징은 6장에서 뚜렷하게 드러나요. 스탈린 아들의 이야기, 신학적 성찰, 아시아의 정치적 사건, 방콕에서의 프란츠의 죽음, 보헤미아에서의 토마스의 장례식이 모두 '키치란 무엇인다?'라는 영원한 질문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거든요. 이 대위적인 구절이 소설의 전체 구조를 지탱하는 기둥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건축 비결이거든요.


작가님의 소설은 거의 세 가지 틀, 사랑(심리학)과 성(욕망)과 정치(역사)인 거 같습니다.

네, 듣고 보니 맞는 거 같기도 합니다. 말씀하신 사랑, 성, 정치는 저의 소설을 안정적으로 지탱해 주는 삼각형같은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깨를 내주고 머리를 받아주며 서로를 돋보이게 합니다. 거기에 '불멸'을 향한 욕망도 있고, '웃음과 농담'도 대위적으로 어우러져 있습니다. 마치 협주곡처럼 말입니다. 아, 그리고 '정체성'도 있네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프랑스로 귀화한 저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정체성』과『향수』를 통해서 말했습니다.


오랜 인터뷰에 성실히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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