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되고 싶은 사람들

by 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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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품은 늙어서 만나야 한다. 쿤데라의 작품이 그런 작품이다. 이 나이가 아니라면 장면 하나하나가 깊이 생생하게 다가올 수 있을까? 그는 이미지에 함몰되어 있을 것이냐, 이미지로부터 벗어날 것이냐를 반복적으로 물으면서 우리가 생각이 배제된 이미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 말은 사유할 것인가, 사유하지 않을 것인가의 다른 말이다. 우리는 헤밍웨이의 작품은 읽지 않지만 작가의 이미지를 강조한 자서전은 읽는다. 그의 이미지만 필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의 이론을 원치 않는 대신 삶을 힘들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나 노동자와 함께 웃고 있는 정치인의 이미지만을 소비한다. 쉬운 책만을 원하고, 이미지만 원한다. 그는 개별성이 아니라 범주화시키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사회가 심어놓은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모든 비극은 절대에서 생겨나니까.


쿤데라의 소설에 대한 생각은 그의 산문집인 『소설의 기술』을 참고하였습니다.


당신의 소설들은 한 편만을 제외하고 모두 7장으로 나뉘어 있지요. 이번 작품인 『불멸』도 7부로 구성이 되어있습니다. 당신 소설의 건축적 구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보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쓸 때 저는 어떻게 해서든 7이라는 숙명성을 깨뜨려 보려고 했어요. 오래전부터 그 소설은 여섯 부분으로 구상되었죠. 그런데 첫 부분의 형태가 끝내 만들어지지 않는 거예요. 결국 저는 이 부분이 사실상 두 부분이라는 것, 섬세한 외과 수술을 통해 둘로 분리해야 할, 한 몸으로 붙은 쌍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제가 이런 이야기들을 모두 털어놓는 것은 그것이 제 입장에서 볼 때에는 마술적인 숫자를 둘러싼 미신적 장난도 아니고 무의식적이며 이해할 수 없는 절대적 명령, 저로서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형식의 원형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제 소설들은 7이라는 숫자 위에 세워진 동일한 건축술의 변형인 셈이죠. 그렇지만 각각의 책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고, 독립적인 것입니다. 어떤 책이 그 작가의 첫 번째든, 열 번째든, 오십 번째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번 소설은 일단 구성 자체가 매우 신선합니다. 그래서인지 낯설고 혼란스럽기까지 합니다. 줄거리를 요약하는 게 의미가 없기도 하고요. 작가님이 직접 소설 속에 등장하여 소설 속의 인물들과도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괴테'의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면 시대가 다른 '괴테'와 '헤밍웨이'가 대화를 나누기까지 합니다.

저는 근대의 창시자는 '데카르트'만이 아니라 '세르반테스'라고 생각합니다. 철학과 과학이 인간의 존재를 망각했다면 바로 이 망각한 존재를 찾아내려는 유럽의 위대한 예술이 세르반테스와 더불어 형성되었다는 사실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 보입니다. 그리고 해를 거듭하면서 소설은 나름의 방식과 고유한 논리에 따라 존재의 상이한 면모들을 찾아내곤 합니다. 세르반테스의 동시대인들과 더불어 소설은, 모험이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그와 더불어 소설은 '내면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와 감정의 은밀한 삶을 검토하기 시작하죠. '발자크'와 더불어서는 역사에 뿌리내리는 인간을 발견하고, '플로베르'와 함께 소설은 그때까지 미지의 세계였던 일상의 지평을 탐사합니다. '톨스토이'와는 사람들의 결정과 행위에 개입하는 비합리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시간을 탐색합니다. '마르셀 프루스트'와 더불어 불 잡을 수 없는 과거의 순간을, '제임스 조이스'와는 붙잡을 수 없는 현재의 시간을 탐색합니다. '토마스 만'과 더불어서는 시간의 밑바닥에서 유래하여 우리 발걸음을 원격 조정하는 신화의 역할을 묻습니다. 소설은 근대의 시초부터 줄곧, 그리고 충실히 인간을 따라다닙니다. '후설'이 서구 정신의 요체로 간주한 '앎에의 열정' 이 이제 소설을 사로잡아 소설로 하여금 인간의 구체적인 삶을 살피게 하고 '존재의 망각'으로부터 지켜 주는 것이죠. 그리하여 '삶의 세계'를 영원한 빛 아래 보존하게 됩니다. "오직 소설이 발견할 수 있는 것만을 발견하라. 그것만이 소설의 유일한 존재 이유다."라는 '헤르만 브로흐'의 말을 나는 이런 뜻으로 이해하며, 그가 거듭 되풀이하는 이 말에 담긴 그의 고집에 공감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존재의 부분을 찾아내려 하지 않는 소설은 부도덕한 소설입니다. 앎이야말로 소설의 유일한 모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소설가의 각자의 작품에는 소설의 역사에 대한 함축적인 통찰이,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 담겨있습니다.


물론 『불멸』에는 챕터별로 다른 이야기인 듯 하지만 결국은 이어지고, 모든 인물도 연결됩니다. 시간의 흐름이나 사건이 중심이 아닐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도 맥락 없이 등장하고 에피소드를 만들면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신은 소설을 이야기할 때 '세르반테스'를 말하곤 합니다. 그가 소설의 탄생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가요?

신이 우주의 질서를 관장하고, 선과 악을 가르고, 모든 사물에 뜻을 부여했던 것을 서서히 떠나 버릴 때, 돈키호테는 집을 나갑니다. 이제 그에게 세계는 더 이상 알아볼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지고의 심판관이 부재하는 이 세계는 돌연 엄청나게 모호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죠. 하늘의 유일한 진리는 인간들이 나누어 갖는 수많은 상대적 진실들로 흩어져 버립니다. 이리하여 근대가 탄생했고 이와 더불어 이 세계의 이미지이며 모델인 소설 또한 탄생했습니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를 모든 것의 기반으로, 그리고 헤겔은 우주와 대면한 유일한 존재로 이해하는 태도를 영웅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세르반테스처럼 세계를 애매성으로 이해하고 유일한 절대 진리가 아니라 모순되는 상대적 진실들의 더미와 맞서야 한다는 것, 따라서 불확실함의 지혜를 유일한 확실성으로 지닌다는 것은 그에 못지않은 큰 힘을 요구하게 되죠. 그런 의미로 세르반테스를 소설의 탄생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전체주의 국가에서의 소설의 의미는 어떻습니까? 작가님은 직접 그 현장에 있어서 남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저는 생애 많은 부분을 지낸, 이른바 전체주의 세계에서 소설의 죽음, 그 잔혹한 죽음(금지, 검열, 사상적 탄압을 통한)을 목격했고 체험했습니다. 소설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것은 그때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소설은 근대 유럽과 마찬가지로 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 현상의 상대성과 애매성에 기초한 이 세계의 모델인 소설은 전체주의적 세계와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이 비양립성은 광신자들을 이교도와 구분 짓고 인권 운동가를 고문 기술자와 구분 짓는 비양립성보다 더 골이 깊습니다. 이것은 정치, 도덕적일 뿐만 아니라 존재론적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유일한 진리 위에 기초한 세계와 소설의 애매하고 상대적인 세계는 각기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전체주의적인 진리는 상대성과 의혹과 질문을 제거하고, 따라서 그것은 제가 소설의 정신이라 부르는 것과 어울리지 못합니다.


그럼 소설의 정신은 무엇인가요?

소설의 정신은 복잡함의 정신입니다. 모든 소설은 독자들에게 "사실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복잡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소설의 영원한 진실은 이것이지만 묻기도 전에 존재하면서 물음 자체를 없애 버리는 성급한 대답들의 시끄러움 때문에 점점 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소설의 정신은 연속의 정신입니다. 모든 소설은 그에 앞선 작품들에 대한 대답이며, 소설에 앞선 모든 체험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정신은 현재에만 고정되어 있습니다. 이 현재는 너무 넓고 방대해서 우리의 지평에서 과거를 몰아내고 시간을 현재의 순간만으로 축소해 버립니다. 이 같은 체계에 휩쓸린 소설은 더 이상 작품이 아니라 다른 사건들과 다를 바 없는 시사적인 사건이며, 내일 없는 몸짓일 뿐입니다.


작가님은 『불멸』에서 '소설은 사이클 경주를 닮을 게 아니라, 많은 요리가 나오는 향연을 닮아야 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의미는 무엇인가요?

행위와 사건들이 단 하나의 인과관계에서만 펼쳐진다면 이런 소설은 좁은 길과도 같습니다. 또한 극적 긴장이 대단원을 장식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면 소설은 한낱 짚단처럼 소진되고 맙니다. 여러 가지 플롯과 실험적인 요소들, 매 페이지와 문장 하나하나마저도 소설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향연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현대의 이미지로부터 텍스트가 탈피하기 위함입니다. 수많은 문학작품이 영상, 혹은 드라마, 혹은 애니메이션으로 변환됩니다. 텍스트가 어려운 독자들은 영상의 매력에 쉽게 빠지며 우리 사회에서는 변환된 이미지가 원작보다 뛰어나지 않음에도 원작의 이미지를 먹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각부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고 끝날 때쯤 그는 등장할 때처럼 자취 없이 사라져 버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무엇의 동기도 아니며, 어떤 효과도 낳지 않게 말입니다. 제 마음에 드는 게 바로 그런 겁니다. 소설 속의 소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불멸』은 '불사' 또는 '영혼 불멸의 개념'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도 나라는 존재가 기억되는 것입니다. 즉, '불멸에 대한 욕망'이라는 것은 '기억되기 바라는 욕망'입니다. 불멸도 단지 자기가 기억되길 바라는 범위가 불특정 다수에 미치느냐 아니면 자기가 사랑하는 소수에 한정하느냐의 차이에 따라 전자를 '큰 불멸', 후자를 '작은 불멸'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런 식으로 분류한다면 야심가는 큰 불멸이겠죠. 소설 속의 불멸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독일의 대문호인 '괴테'를 등장시킨 거 같습니다.

네, 맞습니다. 불멸 앞에서 인간은 평등하지 않습니다. 작은 불멸은 생전에 알고 지낸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어떤 인물에 대한 추억을 말하고, 큰 불멸은 생전에 몰랐던 이들의 머릿속에도 남는 어떤 인물에 대한 추억이다. 바로 예술가나 정치가의 생애이겠죠. 멸한다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인간 경험인데도, 인간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그에 따라 처신하려 한 적이 없습니다. 사람은 멸하는 존재가 될 줄 몰라요. 그런 면에서 불멸을 원하는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베티나'를 등장시켰습니다. 괴테는 베티나와 어떤 깊은 관계를 가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괴테를 일방적으로 사랑하며 그녀가 남긴 기록들 때문에 불가피하게 그녀와 엮인 불멸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괴테는 독일의 위대한 작가로서 시대와 국적을 뛰어넘어 불멸하는 거장이 됨과 동시에 베티나와의 의문스러운 관계라는 이미지도 덧씌워진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실존적 존재와는 별개로 다른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로 존재한다는 것임을 보여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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