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언급하면서 시작됩니다. 영원회귀 사상의 반대 개념인 일회적 삶을 이 소설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무거움과 가벼움'을 연결하여 말씀하시는 거 같은데 그것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영원회귀 사상을 뒤집어 생각하면 일회적 삶이 됩니다. 삶이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것을 뜻하죠. 인생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므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고, 가벼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 번뿐인 삶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면 인생은 가벼움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 번뿐인 삶이 무한히 반복된다면 인생은 반대로 무거워집니다. 인간의 사소한 행동 하나조차도 심혈을 기울여야 하고, 그에 따른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게 됩니다. 그래서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무거운 짐이 됩니다.
당신의 소설에는 철학적 요소가 다분합니다. 어떤 사람은 '소설은 이야기이다'라고 하고, 시몬 드 보봐르는 '소설은 묘사이다'라고 한 반면에 작가님은 '소설은 사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계와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이 생각하는 철학과 소설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사실 소설가가 자신의 것이 아닌, 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의 수단에 의지한다면 온전한 소설가가 될 능력이 없다는 증거이며 예술적 결함의 증거가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소설가는 자신의 생각을 소설 속에 집어넣습니다. 철학자가 자기의 사상을 개념으로 설멍하는데 반하여 소설가는 인물에게 육화 시켜서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지적으로 매우 까다로운 사색을 소설 속에 통합하는 것, 그리고 아름답고 음악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작품의 필수 요소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현대 예술의 시대에 소설가가 감행할 수 있는 가장 대담한 혁신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서 제가 줄거리를 말해보겠습니다.
소설의 배경은 1968년 체코에서 벌어진 프라하의 봄을 배경으로 한다. 시대와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에서 토마스,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의 각기 다른 삶이 변화되고 굴곡되어 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토마시는 사랑과 섹스는 별개라고 생각하고, 삶의 가벼움과 자유를 추구한 외과의사이다. 우연히 외부진료를 나갔다가 카페에서 일하는 테레자를 만난다. 그녀는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 무거운 사람이다. 그리고 정치적, 사회적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화가 사비나는 토마시와 헤어지고, 혁명의 세계를 동경하고 역사의 수레바퀴의 일원이 되는 것을 동경하는 대학교수인 프란츠와 연인 관계이다. 사랑과 성, 역사와 이데올로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색깔이 다른 네 남녀의 사랑은 갈등과 반목을 거듭한다.
갈등과 반목은 달리 말하면 간극인데, 작품 속에는 가벼움과 무거움, 영혼과 육체, 우연과 운명, 개인과 역사, 삶과 죽음까지 소설에서 다룰 수 있는 모든 주제가 담겨 있습니다. 거대한 스펙트럼을 한 소설에 넣는 것에 어려움은 없었나요?
저의 소설뿐만이 아니라 겉으로는 연애소설처럼 보이지만 간격이 있는 두 가지를 보여주는 작품은 많습니다. 그렇다고 이분법적인 사고나 둘 중에 하나가 옳다는 것을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둘 사이에서 진자운동처럼 움직이지만 이것들이 어떻게 바뀌어가는지가 저의 관심사항입니다.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도 말하고 싶은 내용이고요.
에세이와 소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작가님의 스타일이기도 하고, 매력인 거 같은데요.
진행되는 이야기와 그 이야기에 대한 저의 코멘트는 제 책을 읽는 독자들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키고 싶은 마음의 일환입니다. 이야기가 늘어질 때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싶었거든요. 보통 독자들은 서사에 관심이 많은데 제가 이야기를 잡고서 이야기를 조금씩 흘려주는 식으로 제가 이끌고 싶어서요.
토마시를 만나러 온 테레자의 손에 들려 있던 책이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이고. '카레닌'이라는 강아지의 이름도 '안나 카레니나'에서 따온 거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잘 보셨습니다. 『안나 카레니나』하면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뿐만 아니라 레빈과 키티라는 또 다른 커플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레빈과 키티라는 자신들의 이상향을 농촌 공동체에서 찾아나갑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비슷하죠. 커플 중에 죽는 것도 비슷하고, 토마시와 테레자의 동지애적 사랑을 볼 수 있는 것도 비슷합니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힌트를 얻는 건 사실입니다.
이 소설은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 또는 가벼운 것인가를 묻고 있지만 둘 중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고 생각합니다만.
네, 맞습니다. 가벼운 건 가벼운 대로 인간 실존의 딜레마를 빚는 것이고, 무거운 건 무거운 대로 족쇄로 작용합니다. 어떤 것이 옳다는 것은 없습니다. 네 사람의 삶의 변주를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토마시와 테레자는 여러 가지 일을 겪고 난 후 동지애적인 결합을 이루는 것처럼 다른 식으로 전개되는 모습을 담고 싶었습니다. 관계 속에서 얼마나 갈등하고 힘들어하면서 새로운 해법을 찾아내는가를 보여주고 싶었던 거죠.
독자는 소설을 읽는 동안 '무거움과 가벼움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지만 소설 속에서는 어떠한 해답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생각한 답이 있다면 힌트라도 주실 수 있습니까?
짐작하듯이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은 무 자르듯이 쉽게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물들을 보여줄 뿐입니다.'가벼움과 무거움'사이에서 진동하는 인간들 말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스스로가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끝끝내 그것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실망할 일은 아닙니다. 가벼움과 무거움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이냐를 판단하는 것이 소모적인 논쟁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