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2

by 노아

"난 그시절을 사랑하는 걸까.. 그시절 속 너의 모습을 사랑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그시절, 지금, 앞으로의 너를 사랑하는 걸까.."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르고도 청명한 하늘. 그 하늘 아래에 드리워있는 푸른 초원.. 드넓은 초원.. 민지가 생각난다.. 이 대지 위를 뛰놀고 있을 야생과도 같은 그녀.. 그녀가 내 시야에서 사라지지를 않는다.. 하루에 백만번 더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1초 정도의 시간만 그녀를 마주할 수 있다면.. 다시 볼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어..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밥은 먹고 있는지. 눈물은 흘리지 않고 있는지.


차오르는 기억을 삼키고 또 삼킨다. 목에 걸려 숨막힌다해도 참아낸다. 그렇게 악착같이 참아낸다. 뭉개져버린 기억의 향수에 취해 밤새 구역질을 하는 일상. 그리고 아침에 돌아보면, 구토의 흔적 뿐이다. 아름다웠던 추억들이 한순간의 악취가 되어 후회로 끝나는 나날..


"이 세상에서 없어지고 싶어.. 지금 죽을 수만 있다면.. 죽고 싶어.."


그래도, 죽기 전.. 마지막으로 그녀를 한번만 더 볼 수 있다면.. 오늘도 그렇게 밤새 구토를 한 후, 울렁거리는 마음 안고 이 봄날을 보내는 중이다.



"재성님~ 오늘 날씨 참 좋지 않아요??? 빨리 이리 와요~"


멀리 보이는 나홀로 나무를 향해 뛰어가는 그녀의 모습. 이제 막 역에서 도착한 나, 내가 타고 있는 열차에서 내려야 하는데.. 이번에도, 역시 못내리고 이 기차에서 하차를 못할 거 같은 느낌이 든다. 아무래도 나는 영원의 망각에 이르러서야 이 시간을 끝낼 수 있을 거 같아.. 지금 나의 시대에 당신을 위한 자리는 없어.. 미안해요..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당신이 못나서도 아니야. 그저, 타이밍이 안맞았을 뿐이라고 생각해줘요.. 그때였다. 그녀가 갑자기 나에게 달려와 내 손 위에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포갰다. 마치, 칠흑같이 어두운 밤 위에 달 하나를 포개면서 빛을 만들어주듯이.. 순간의 설렘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그녀의 진심이 손 끝으로부터 느껴지고 있었다.


"재성씨.. "


그녀는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을 바라보았다. 날 향해 보이는, 촉촉한 눈빛.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한, 하얀 뭉개 구름. 맑고도 깨끗한 이슬을 흘릴듯한 청명함이었다. 그 이슬 하나가 내 마음에 떨어지는 순간, 회색빛 먹구름으로 가득한 내가 조금은 이 봄날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금이라도, 찰나라도 푸른 하늘과 따스한 공기가 지금 나에게로 불어올수 있을까.. 나의 봄바람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영원히 기약없이 지나가버렸는데.. 그녀는 머뭇대다가 나에게 말했다.


"재성씨.. 마음에 아직.. 그분이 있으시다는 거 알아요.. 그래서, 아직 제가 마음에 없으실수도 있는데요.. 그래도, 저한테 기회 주시면 안돼요...?"


천천히 그러나 선명한 음색으로 그녀는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분명하게..


"재성씨한테 뭘 바라는게 아니에요.. 그냥.. 지금 제 앞에 있는 당신한테, 제 마음을 전해주고 싶어요. 아껴주고 싶어요.. 이런 제 마음만큼은 거절하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기다릴수 있어요.. 나... 기다릴께요.."


그리고 떨어지는 빗방울. 그 빗방울이 나에게 스며든 순간.. 야속하게도 그 순간이 떠올랐다..


"고마웠어.. 사랑해.."


내 품속에서 눈물 흘리던, 민지의 눈물... 그때 그순간은 아직도 선명히 내 기억에 남아있어. 지금 이 기억이 살아있는한, 당신의 눈물에서 그때의 눈물이 보일 수 밖에 없어.. 이게 곧 내 대답이야.. 그때의 잔잔했던 바다는 지금의 파도가 되어 시시각각 내 안에서 요동치고 있는데. 지금의 나로선, 그 파도가 자연스레 죽어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그 파도가 죽는 날에, 그때 당신이 다시 나에게 와준다면. 그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다면, 당신과 시작해도 될까요..


"단비씨.. 미안해요.."


안돼.. 이건, 당신을 향한 예의가 아니에요.. 희망고문으로 사람 마음 힘들게 하는 게 얼마나 큰 고문인지 잘 알잖아.. 당신마저 내가 겪고 있는, 이 형벌을 같이 겪게 할수 없어.. 미안해요..


"재성씨.. "


방금 또 내 먹구름으로부터의 회색빛이 그녀에게로 물들지나 않았을지.. 나 혼자 그 순간에 갇혀서 현재를 살지 못하고 있다.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당신을 보지 못하고 있어.. 당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목소리를 갖고 있는지. 당신이 어떤 말들을 했는지, 지금의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 우린 같은곳,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으니까. 기억의 시차로 인해 아직 적응 못하고, 당신 세계의 문턱에서 멈춰있는 나니까.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단비씨는 저보다 좋은 사람 만날거에요.. "


지금 내가 흘리는 눈물이 이 공기를 떠도는 잿가루가 되어 바람에 흩날리듯이 날아갈 수 있도록... 지금 날 향해 스치는 바람과 함께 지나가 그녀에게로 닿기를.. 너를 생각하면서 지금 내가 흘리는 눈물이 너에게 닿을 수 있기를. 언젠가, 다시 만날수 있다는 희망과 미래가 있었으면 좋겠어.. 그 미래와 희망이 사라진 지금 속에서 너와의 추억 속에 살고 있는 나야.. 그만큼 네가 보고 싶어. 잠시라도 널 보고 싶어..


지금 내 위를 떠도는 하얀 배. 드넓게 펼쳐져있는 푸른 하늘 위에 떠도는 하얀 배 하나.. 그 배 타고, 네가 있는 곳으로 가고파.. 너는 어디에 있을까.. 지금 이 순간 어디에 있을까.. 이제는 꿈 속에서밖에 볼수 없는 너. 너를 향해 부르짖지만, 돌아오는 건, 언제나 내 기억 속의 네 모습, 네 음성 뿐. 그 기억들이 엮어낸 실에 내 심장 점점 조여져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잠시 잠든다해도, 네가 없는 세상에서 홀로 있는 나를 인지하는 느낌만 들면서 고독에 몸부림치기만 해. 보고 싶어.. 민지야.. 너는 어디에 있는 거니. 아무래도, 그때 너를 잡을 걸 그랬나봐..


이제야 알 거 같다. 내가 내 스스로에게 했던 질문..


내가 누굴 사랑하는 가에 대한 질문..


나는, 그때의, 지금의, 그리고 앞으로의 너를. 마치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로 이어져있는 시간처럼. 너 하나만을 사랑했었나봐. 푸른 하늘과 드넓은 대지.. 그 속에서 이미 존재하지 않을 너를 생각하며 오늘도 어느 봄날과도 같은 하루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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