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지한줄 Oct 25. 2023

구두쇠 남편에게

일반부 금상 - 이영란

긴 장마가 끝나고 초록을 한껏 머금은 이파리마다 은빛 햇살이 축복처럼 내리는 공원에서 문득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게 왜 하필 당신일까요.

어제 말다툼을 해서 아직은 불편한 감정인데.

살면서 언쟁을 한두 번 한 것은 아니지만 어제는 유난히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으르렁거리는 당신에게 

화가 나서 세차게 내리는 비를 뚫고 집을 나갔죠.

진작 편지로 서로의 바람이나 불만을 표현하며 살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당신! 어쩜 그럴 수가 있나요.

사소한 일로 화를 내고 집을 나간다니까 잡지도 않고, 도대체 무슨 배짱인지 정말 궁금하네요.

저도 이제 60살이 넘었고 믿음직한 사위와 항상 내 편인 손녀가 둘이나 되는, 생각보다 대단한 여자라고요.

당신만 믿고 졸졸 따라다니던 예전의 순진한 농촌 처녀가 아니랍니다.

이 얘기를 하다 보니 당신과 연애하던 40년 전 일도 떠오르네요.

부모님의 반대에도 몰래 만나오던 23살 봄날이었죠.

서울에서 일 보고 내려갈 테니 퇴근 후의 기차역에서 만나자고 하셨지요.

여자의 탁월한 예감으로 오늘 프러포즈를 하고 결혼에 대한 확답을 받으려나 보다 내심 기대에 부풀어 서둘러 기차역으로 나갔어요.

얼마 후 당신이 꽃 한 송이를 들고 나타났고 사람들이 많은데도 박력 있게 무릎을 꿇더니 연둣빛 샌들을 신겨주었죠.

그게 끝인 줄 알았는데 허전한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면서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지요.

“영란 씨! 나랑 결혼합시다. 사는 동안 손에 물 한 방울도 안 묻히게 해 드릴게요.”

전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동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며칠 후 당신을 우리 집으로 데려가 소개하고 결혼시켜 

달라고 떼를 썼답니다.

그때는 사랑에 눈이 멀어서 모든 게 좋게만 보이고 드렸답니다.

나중에 사랑에 대한 콩깍지가 벗겨지고 서울 생활에 물들어 갈 때쯤 저는 당신의 선물에 대해 알게 되었어요.

꽃은 기차역 근처에서 개나리 한 송이를 꺾었고 샌들이랑 목걸이는 중고 가게에서 사 왔다는 것을...

당신이 내게 손에 물 한 방울도 안 묻히고 살게 해 준다고 하셨죠.

그런데 결혼하자마자 누워서 TV를 보면서 물, 커피, 재떨이 하면서 상전 노릇을 하더군요.

친정엄마가 여자는 시집가면 그 집에 뼈를 묻으라고 하셔서 물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어요.

게다가 당신의 성질은 화가 나면 물불 안 가리고 때론 사나운 호랑이 같았죠.

잔소리는 또 얼마나 해 대는지 마치 폭격기 같았답니다.

당신! 어제 우리가 왜 싸웠는지 생각 좀 해봐요.

제가 마트에서 장을 봐왔는데 영수증과 물건을 일일이 대조하면서 날짜가 하루 남은 거 사 왔다고 화를 내더니 양파는 집에 두 개나 남았는데 사 왔다, 경제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며 잔소리를 시작하더군요.

그런 당신을 보며 이 나이까지 일일이 잔소리를 들으며 살 거면 차라리 혼자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집을 나오는데 ‘어디가, 밥해야지’하는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더군요.

막상 집을 나와보니 갈 곳이라곤 딸네밖에 없더군요.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고 나니 아이들 재울 시간이라서 어딘가 가야 하는데 카드도 돈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꺼놨던 핸드폰을 켜며 마음의 주문을 걸었어요.

당신에게 사과하는 문자가 왔으면 집으로 가고, 없으면, 없으면... 그런데 이런 문자가 와있더군요.

“중전, 화 그만 내고 들어오시오. 내가 처음으로 돼지고기 넣고 감자찌개 했다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오데요.

참 오랜만에 듣는 애칭이라서.

내일은 얼마나 맘 놓고 잔소리하려고 중무장했을까?

당신이 밉다가도 옛날 생각을 하면 사르르 녹기도 해요.

제가 결혼반지를 잃어버렸을 때 분실물보다 당신의 지독한 잔소리가 무서워서 하루 종일 벌벌 떨었답니다.

그런데 당신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다 잃어버려도 당신만 안 잃어버리면 돼.”

예상과 달리 그렇게 말한 당신이, 구두쇠인 당신이 얼마나 믿음직하고 멋있든지요.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화가 나다가도 웃음이 나온답니다.

가끔 당신은 정말 멋진 남자랍니다.

여보! 이제 우리, 60살이 훨씬 넘었어요.

당신은 무료 교통카드도 받은 나이고요.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아메리카노도 낭비라고 못마시게 하나요.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관객이 천만 넘는다는 영화도 보러 가요.

딸이나 친구가 아닌 당신과 보고 싶어요.

우기가 걷힌 뒤 나뭇잎이 더 싱싱하고 그 이파리에 내리는 햇살이 아름답듯이 우리도 이제 다투지 말고 남은 시간 행복하게 살아요.

이만 줄일게요.


당신의 아내가

이전 17화 할아버님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