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급반에서 중급반으로 GO!

RUN 런 #8 (부제 : 그리고 마주한 내 감정 뿌리 하나)

by 더앨리스

나의 꾸준함은 계속되었고 매일매일 성실히 내 시간들을 쌓아 올렸다.


시간이 지나며 2~30대의 젊은 회원들 사이에서도 점차 잘하는 그룹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만족감이 생겼다.

강사님은 늘 미소를 짓고 계셨고 어떤 영법을 하든 매우 세세하게 자세를 잡아 주셨다.

하루의 시작은 편안함과 안정감으로 채워졌다.


나는 최대한 초급반 강사님과 함께하고 싶었다.


물론 강사님들은 1년마다 로테이션을 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헤어져야 하고 또 언젠가는 다시 만나겠지만 최대한 이 환경에 머물고 싶었다.


새벽반으로 온 지 3개월 정도가 지났을 때,

강사님은 나에게 중급반으로 가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다.


사실 10시반 강사님도 새벽반으로 옮길 때 중급반으로 가도 되는데 왜 초급반으로 신청을 했냐고 물으셨었다.


그때 나는 당연히 중급반은 내가 갈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10시반의 나이 많으신 회원분들 사이에 있으니 잘해 보이는 효과일 뿐이라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다니는 센터의 경우 레벨업 하여 반을 옮기는 게 쉽지 않다.


워낙 각반의 고인물들이 많아서 자리도 잘 안 생기는 데다가 반 변경 기간이 되면 새벽부터 줄을 서서 대기를 하는 회원들로 인산인해가 되기에 그 모습을 한번 본 후로는 엄두가 안 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엔 각 반의 강사님들이 회원 몇 명을 미리 조정하시면서 나에게 반 변경 권유를 하셨던 것이었다.


좋은 기회였지만 망설여졌다.

이게 망설일 이유가 있나? 도무지 내가 이해되지 않았다.

단순히 생각하면 때가 되었기에 반을 옮기는 것뿐이지 않은가!


그 당시에는 내가 중급반을 가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만 생각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기준치가 타인에 대한 기준보다 좀 높은 편이다.


비단 수영실력뿐만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타인에겐 관대한 편이지만 나 자신에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댈 때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때부터 많은 형제들 속에서 자라서인지 부모님은 늘 양보와 겸손을 강조하셨다.


그렇지 않아도 내성적인 성격인데 겸손을 과하게 교육받다 보니 부작용이 생겼고 살아오면서 그 부작용인 소심함과 자신감 부족으로 다소 피곤하게 살아왔다.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순간에 과한 겸손은 나를 세상 제일가는 쭈글이로 만들었는데, 내가 자라면서 키가 커지고 나이를 먹고 성숙해지는 긴 시간 동안 나의 내면은 지속적으로 작아지고 있었다.


겸손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나친 겸손은 나 자신을 해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


학교를 다닐 때에도 사회에 나와서도 나의 한심한 겸손은 내게 때때로 상처를 주었다.


좋은 것과 덜 좋은 것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는 타인을 배려한다는 명목하에 덜 좋은 것을 선택했으며 누가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스스로 ‘을’의 포지션을 담당했었다.


나는 나의 취향과 주장을 타인에게 공표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힘들었다.


물론 일을 하면서 악역을 담당해야 할 땐 기꺼이 악역을 맡기도 했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내가 원해서 하는 선택보다는 다수를 위한 선택에 더 중점을 두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내가 그들을 배려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나는 최선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나 자신에게는 최악을 선물하고 있었던 것이다.


‘넌 가지면 안 돼, 가장 좋은 게 네 것이 될 리가 없잖아?’

‘늘 그렇듯 적당한 선에서 만족하며 살아.

‘원한다고 다 되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수백억 재벌이 아니면 인기 많은 연예인으로 살겠지..’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진짜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일까?'

'내 삶의 중요한 순간인데 정말 내가 주인공이 되면 안 되는 것일까?'


고작 수업의 반을 변경하는 것일 뿐인데

왜 나의 내면에 깊은 뿌리를 내린 ‘겸손’이라는 단어와 내 삶의 한 축을 담당하며 나를 꼼짝 못 하게 했던 '나쁜 습관'이 떠올랐을까?


예전의 나라면 단순히 수업을 변경하는 것에 크게 의미부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인생에서 매우 쉬운 결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불편하면 그냥 안 가면 되는 거지, 굳이 불편한 감정을 캐내어 들여다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삶을 관조하기 시작하면서 일상에서 다루어야 했지만 오랜 시간 동안 다루지 않은,

그래서 저 깊은 곳에 묻어 두어야만 했던 감정의 파편들이 존재감 있게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상한 파편들의 관리자는 내게 말했다.


“넌 지금 이 감정을 다루어야 해. 피하지 말고 깊이 들어가!

지금 하지 않으면 이 상황은 계속해서 반복될 거야. 뿌리는 더 깊숙이 들어갈 거야.

이 순간을 놓치지 마!”


그래서 나는 다시 생각해 봤다.

나는 왜 머뭇거렸을까?


나에게 철저하고 엄격한 왜곡된 나의 잣대는 초급반에서 중급반으로 올라가는 것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았고 당연히 가질 수 있는 내 것에 자격을 운운하며 딴지를 걸어왔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는 그 잣대를 기꺼이 수용했고 충실히 따랐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 기준을 따를 필요도 이유도 없다.


“아! 드디어 내가 나 자신에게 결정권을 넘겨주었구나.”

“그걸 알려주려 불편한 감정이 튀어나왔구나..”


이렇듯 사람은 매우 사소한 사건에서 진짜 내 감정을 마주 할 때가 많다.

그것은 뭔가 부조화의 느낌이며, 살짝 불편하면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의 동요로 찾아온다.


이런 상황을 만나면 그냥 덮어두지 말고 직면해 보기 바란다.






만약 이 일이 단지 수영수업의 반을 변경하는 게 아니라 이민을 가야 한다거나 생사의 고비에서 해야만 하는 결정이었다면 어땠을까?


나는 감히 이렇게 생각한다.


사소한 결정과 중대한 결정? 그런 것은 없다고…


그 안에 다루어야 할 감정이 있다면 그 모든 결정은 사회적 기준의 경중이나 손익을 논하는 게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다시 반변경 권유를 받던 그 시간으로 돌아가 보자!


‘지금 충분히 이 시간이 좋기도 하고 내 수영실력은 너무 불완전한데 가도 되는 건가?’

‘왜 고민이 되지?’ 슬슬 불편한 감정이 올라온다.

‘수업 끝나고 집에 가서 이 불편한 감정에 대해 명상해 보고 뿌리를 찾아봐야겠다.’


혼자 골똘히 고민하고 있는데 강사님이 딱 한마디를 더 보태셨다.


“회원님 이제 접영 하셔야죠!”


‘오잉? 접영, 그래 접영을 배울 수 있겠구나! 그 생각을 못했네!’

‘감정의 동요고 뭐고 다 필요 없어!’

‘나도 이제 접영을 하며 화려하게 날 수 있는 거야!’

(선 결정 후 직면)


네~! 가겠습니다. 중급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