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10Km를 여러 번 뛰어 보기로 했다. 울트라 마라톤 대회 때도 10Km씩 끊어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일단 10Km만 더 가자, 다음 10Km만 더 가자! 그렇게 100Km를 차근차근 10Km,10번만 뛸 예정이다.
진주 산길 마라톤 대회를 나가기로 했다. 사실 이 대회 공지가 떴을 때 갈까 말까 고민을 했다. 내가 진주에 살고 있기 때문에 '전 마라톤을 해요'라고 말하면 진주 사람들중에"진주 산길 마라톤 나가 봤어요?"라고 묻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다. 그렇게 유명한 대회는 아니지만 진주 곳곳에 걸려 있는 현수막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마라톤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일 년 내내 전국 각지에서 그렇게 많은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지 모를 것이다. (나도 정말 몰랐다.)창원시계종주를 하고 트레일러닝은 나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산에서는 걸어 다녀도 잘 넘어지는데 뛰어야 하다니!... 생각만 해도 힘들 것 같다. 도저히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접수를 하고 말았다.(마라톤 대회 접수를 할 때는 잠깐 뭐에 홀린 듯하다.) 여름에는 트레일 러닝을 많이 한다. 로드는 너무 덥기 때문이다. 새벽에 뛰어도 덥기 때문에 나무그늘과 시원한 피톤치드가 나오는 트레일 러닝을 많이 한다. 나의 장점은 남들이 하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무모함은 거기에서부터 나온다.
울트라 마라톤 대회가 다가온다. 갈수록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뛰겠지라는 마음을 먹고 걱정을 미룬다. 힘들었던 훈련의 힘들었던 느낌은 사라지고 내가 행복했던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마치 산고를 치르던 임산부가 그때 죽을 것 같이 아팠던 기억을 잊고, 다시 둘째, 셋째를 임신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아름다운 망각이다. 마라톤 뛸 때는 죽을 것 같이 힘들었지만 뛰고 나면 죽지는 않았기 때문에 행복했던 기억만 떠올리며 또 홀린 듯 마라톤 대회 접수를 한다.
이제 이 100Km를 달리는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J님(함께 100Km를 뛸 예정이며, 시계종주를 같이 뛰었다.)과 K언니(시계종주 때 안민고개에 응원을 와준 은인)가 대회를 함께 나가기로 했다. J님은 작년 진주 마라톤에서 받았던 진주도라지주가 이번 대회에도 기념품이라 그게 맛있어서 뛴다고 했지만 대회에서 입상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J님이랑 K언니 둘 다 대회에서 입상을 해본 적이 있는 입상자들이었다. 당연히 둘 다 잘 달리고 싶어 하는 욕망 가득한 선수들이다. K언니도 말로는 힘들다. 못 뛴다 하지만 승부욕과 깡다구가 있어서 엄청 잘 뛰었다. 물론 나도 대회를 나가기 전에는 열심히 뛰겠다고 생각한다. 이번대회에서는 나도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달려보겠다며 다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막상 뛰면서 심박수가 올라가고 힘들어지면 그런 잘하고 싶은 마음을 순식간에 놓게 된다. 어느새 '나는 오래오래 달리기 해야 하니까 다치지 않고, 몸 상하지 않게, 완주만 해보자!'라고 합리화를 한다. 나는 내 몸을 너무 아끼는 것 같다. 이것이 또 나의 장점이기도 하다. 아직 까지 이렇다 할 부상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부상 없는 비법을 물어보면 힘들고 빠르게 달리지 않아서라고 말한다. 그렇게 나는 사실 게으른 러너이다.
열정 러너들과 함께 있으면 나도 열정러가 된다. 그동안 마라톤 대회에서는 중간이나 뒤쪽에서 출발하여 천천히 달렸는데, 이번 대회에서는 J님과 K언니의 입상욕심으로 거의 앞쪽에 줄을 서게 되었다. 시작을 알리는 '탕!'이 울리고 모두 그 길을 우르르 달려 나갔다. K언니를 따라가려고 초반에 열심히 달렸는데 심장이 약간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가민을 보니 페이스가 4:18! 약간 오르막이지만 평지에서도 달리기 힘든 속도였다. 나는 내 페이스를 보자마자 K언니를 따라가는 것을 포기했다. 나는 초반부터 이렇게 달리면 얼마 못 가서 퍼질 것이 분명했다. 내가 생각보다 겁이 많다. 초반 1Km는 5분 9초로 평소보다도 엄청 빠른 페이스가 나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약간의 희망을 가진 것 같다. 1시간 안에 들어가자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은 늘 자연 앞에 겸손해져야 한다.
자연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내가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해주지 않았다. 아스팔트가 끝나자마자 가파른 오르막이 나왔다. 나름 오르막에 자신이 있었는데 오르막을 만나자마자 발이 정지했다. 초반에는 잔발로 느리게라도 뛰자는 마음이었지만 앞에 걸어가고 있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보는 순간 마음이 달라진다. '나도 그냥 걷자.'나는 걸었지만 나의 뒤에 있던 사람들은 거친 숨소리를 내면서 나를 지나쳐 갔다. 대회 때는 사람들의 숨소리가 잘 들린다. 내 숨소리도 잘 들린다. 산에 있는 모든 것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 나의 숨소리, 흙 밟는 발자국 소리만 온 산을 가득 채웠다. 습도가 높아서 땀이 많이 났다. 앞에 사람은 물폭탄을 맞은 것처럼 옷이 다 젖었다. 이렇게 힘들어하면서 왜 다들 돈 주고 이 고생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다가 '아! 나도이러고 있네.'생각했다. 1시간 안에 들어가려고 했기 때문에 1시간 페이스메이트분들이 나를 지나갈 때 따라가려고 한 30초 정도 노력하다가 포기했다. 오르막이 좀 자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오르막은 아닌 것 같았다. 체감 경사 75도였다.
4Km 정도 되자 남자 10Km 주자들이 마주하며 달리고 있었다. 나는 J님의 입상을 응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J님이 몇 번째인지 세기 시작했는데, 세상에는 잘 달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다들 산길에서 저런 속도로 달리다니! 남자 20명이 넘게 지나가고 나서야 J님을 만났다. 너무 빠른 속도로 마주쳤기 때문에 인사만 해서 자세히 못 봤지만 J님은 분명히 양팔을 벌리며 웃으면서 뛰고 있었다.(뭔가 만끽하고 있는 듯했다.) 순간 저런 걸 광기라고 하나 느껴졌다. 마주하는 사람들 모두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지만 많이 힘들어 보였는데, J님도 힘들어 보이긴 했지만 표정이 너무 밝아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여자 선수들도 세었는데, K언니는 여자 8번째로 뛰고 있었다. 마주 했을 때 말해주려다가 8번째라는 순위가 언니에게 힘이 빠지는 순위일까? 아니면 오히려 더 자극이 되는 순위 일까 생각을 하다가 말해주는 것을 놓쳐버렸다. 여자 러너들의 순위 급들은 다들 날렵하고 가벼운 몸을 가지고 있었다.
무거운 나의 몸을 이끌며 달리기를 하며 나는 내 몸이 달리기를 하기에는 좀 무겁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다이어트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10Km를 달리는 데에도 힘이 많이 들었다. 종아리와 엉덩이는 쑤실 정도로 뻐근하고, 숨은 가파 왔다. 오르막길을 걸어도 심박수가 160이 넘었다. 오르막길 다음에 평지가 나오자 나는 나 자신을 달래야 했다. 본능은 '이왕 걷게 된 거 계속 걸어보자!'라고 말하고, 생각은 '그래도 뛰어야 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거야!'라고 말하고 있었다. 결국은 나의 생각이 이긴 것 같다. 무거웠던 발걸음은 한두 발짝을 옮기면 조금씩 가벼워지고 또 이게 뛰어진다. 반환점을 지나서 이제 거의 내리막 길만 남았다. 내리막은 마냥 편하고 좋을 것 같지만 이것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다. 나는 사실 내리막길을 잘 내려가지 못한다. 몸에 힘을 빼고 달려야 하는데, 아직까지 내리막에서 힘이 잘 안 빠진다. 무릎에 힘을 잔뜩 주고 경직된 팔다리로 내려갔다. 특히 흙길 내리막은 도통 속도가 나지 않는다. 굴곡진 땅에 발을 끼워 맞춰야 하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집중해야 한다. 내려가는 것은 쉬울 것 같지만 어렵다. 올라가는 것도 , 내려가는 것도,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노력해 보기로 한다. 목표로 한 한 시간 이내는 이미 틀려 먹었지만 최선을 다하기로 한다.
마지막 3Km 정도가 남았을 때부터 임도와 아스팔트 길이 나왔다. 난 역시 로드를 좋아하나 보다. 약간의 내리막 길을 기분 좋게 뛰었다. 기억은 기분 좋게 뛰었지만 막상 뛸 때는 30초마다 한 번씩 숫자의 노예가 되어 가민을 보면서 거리가 얼마나 남았는지를 체크했다. 앞에 사람들이 보였다. 옷이 땀에 절어서 있기도 하고, 숨을 거칠게 내쉬면서 힘든 얼굴들이다. 나도 힘들지만 계속해서 달릴 것이기 왜 달리는지 알고 있다. 결승점에 다 왔다. 그 순간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아주 목이 마른데 풀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 한 방울, 마지막까지 참고 참고, 모아 모아서 한입에 털어 한 모금 마시는 쾌감이다. 총 1시간 6분 58초. 내가 그렇게 걸었는데도 이 페이스라면 만족스러웠다
K언니와 J님은 예상대로 여자 9등, 남자 청년부 10등 목걸이를 달고 있었다. 입상이 부럽기는 하지만 욕심나지는 않는다.
대회를 마치고 대회에서 주는 콩국과 수박화채를 들이켰다. 둘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난 뛰는 동안 배가 고팠었나 보다. 둘 다 깨끗하게 먹었다.
10Km도 힘들었다. 빨리 달리지 않았지만 힘들었다. 100Km는 어떻게 달리나 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10Km를 달릴 때와 100Km를 달리 때가 다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더 튼튼한 마음으로 달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10Km를 달렸을 때는 이렇게 9번만 더 달리면 되겠다라고 생각하겠지.... 30Km를 달렸을 때는 힘들지만 잘 달리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50Km를 달릴 때는 아직 까지는 달릴만하다고 느끼겠지.. 70Km를 달렸을 대는 고비가 오고 힘들지만 포기할 순 없다고 생각하겠지... 90Km를 달렸을 때에는 이제 그 10Km만 남았으니 굴러서라도 더 가자라는 마음을 가지겠지... 그렇게 100Km를 10Km 10번으로 채울 것이다.
왼: 거의 결승점에 다다른 사진이다. 10Km를 뛰고 10년은 늙어보인다. 오: 기록사진. 좀 쉬고 나니 늙었던 얼굴이 돌아왔다.